[31] 콜롬비아 참전용사 갈비스씨 '우리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호세 엘리 로하스 갈비스(81·콜롬비아 참전용사)
내 옆에 있던 종군기자 피 흘리며 죽어가고…
부상당한 미군 부축해 죽을 힘 다해 걷고…
산화한 전우를 기억하며 6·25를 책으로 펴내
- ▲ 호세 엘리 로하스 갈비스(81·콜롬비아 참전용사)
당시 나는 수도 보고타에서 회계사가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콜롬비아군 소위였던 내 친구가 함께 참전하자고 권유했고, 나는 21살 젊은 시절 호기심에 이끌려 참전하기로 했다. 1952년 2월 육군보병학교에서 한달쯤 군사훈련을 받았고, 따로 위생병 교육도 받았다.
한국으로 가는 여정은 길었다. 보고타에서 수송기로 콜롬비아의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2000여명의 유엔군 동료들과 함께 미군 수송선 보도인(Beaudoin)호에 올랐다. 배는 파나마 운하를 지나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잠시 머무른 뒤 일본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일본 사세보 항구에서 며칠간 정박한 후 마침내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다시 트럭과 기차를 번갈아 타고 며칠을 간 끝에 1952년 6월 23일 강원도 김화지구에 다다랐다. 도착과 동시에 전투에 투입됐다. 그곳에선 몇 개월간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 탈환전이 벌어졌다. 7월 4일 함께 간 콜롬비아 동료 중 전사자가 나왔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전투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나는 위생병 교육을 받고 왔지만 전투 현장에서는 갑자기 공병(工兵)부대에 배치됐다. 전장(戰場)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수류탄으로 군데군데 움푹움푹 파인 곳을 찾아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한가운데서도 무너진 진지를 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 걸려 진지를 보수해놓아도 중공군은 단 몇초 만에 파괴시켜버렸다. 적들이 때때로 한밤중에 기습하는 바람에 온갖 함정과 장애물들을 설치하면서 밤잠을 자지 못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중공군은 엄폐물을 세워놓고 끊임없이 기관총을 쏘아댔다. 몸을 숨기려면 잠시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하루살이 목숨만큼이나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살아남은 걸 보니 천운이 따랐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모든 가톨릭 성인(聖人)들에게 목숨만은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 ▲ 갈비스씨가 6·25 전쟁에 참전한 뒤 발간한 단행본‘날짜 변경선 넘어’의 표지.
9월 초 우리 부대는 강원도 철원으로 보내졌다. 그때는 본래 임무대로 위생병으로 싸웠다. 그곳에서 우리 콜롬비아군은 젖먹던 힘까지 내서 싸워야 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허공으로 쏘아올려진 조명탄이 까만 밤하늘에 천천히 떨어지면 수많은 중공군과 유엔군 시신으로 뒤덮인 전장이 드러났다. 나는 총탄을 맞은 한 미군 소위의 상처를 알코올로 닦고 모르핀 주사를 놓았다. 그가 안전한 곳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걷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무서운 건 중공군뿐이 아니었다. 적도 근처의 나라에서 겨울을 겪어보지 못했던 나는 한국의 겨울이 치가 떨리도록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추운 어느 겨울날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이 우리 부대에 방문, 콜롬비아 국기에 미국 대통령의 상징을 달아줘 모두가 기뻐했던 일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1953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1월 25일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미군이 싸우고 있는 티본(T―bone)능선에 동료 세 명과 함께 위생병으로 파견됐다. 나는 전투기가 투하한 폭탄으로 생긴 구덩이로 부상자들을 끌고 와 치료했다. 오후 3시가 되자 무기와 탄약 심지어 병사까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사진 촬영을 하러 온 한 종군기자가 총탄을 맞고 옆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한 푸에르토리코 출신 미군 병사는 나에게 "이봐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다면 땅에 껌처럼 붙어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뱀처럼 배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기어다녔다. 콜롬비아군이 소속된 유엔군 부대에서만 하루 100명이 넘는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나 잔인한 순간들이었다.
3월 12일 후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 부대가 다시 전방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렸다. 솔직히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다행히 며칠 후 콜롬비아로 돌아간다는 통보를 받았다. 우리는 부산에 내려와 귀국하는 선박에 승선하기 전에 UN기념공원에 들렀다. 우리는 콜롬비아 전사자들의 묘지에서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산화한 전우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한국전 참전 이후 나는 지구 반대편의 전쟁터를 기억하며 '날짜 변경선 넘어'(Despues Del Meridiano 180)란 책을 썼다. 이 책의 마지막에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아디오스(Adios·안녕) 한국이여, 우리는 한국을 떠나는 날 우리의 피와 고통이 헛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신들이 '우리는 자유다. 평화를 찾았다'고 저 바람과 들판과 산들에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