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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가족을 그렇게… 내 맘속에 묻었다
애들 끼고 이불 뒤집어 써…
한참후 정신 차려보니 아이들이 없어
황해도 평산군 출신인 우리 부부는 1948년 서울 아현동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전쟁이 터지자 서대문 형무소 형무관이었던 남편은 "애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나는 3남매를 데리고 혼자서 피란 갈 엄두도 못 내고 힘겹게 살고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아침이었다. 젖먹이 막내를 업고 양식을 구하러 집을 나섰는데, 아현동 고개 너머 마포 쪽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울렸다. 집에 두고 온 8살 아들과 6살 딸이 생각났다. 부리나케 달려서 집으로 왔다. 나는 막내를 둘러업고 솜이불을 꺼내 뒤집어썼다. 그리고 두 아이를 양쪽 겨드랑이에 낀 채 납작 엎드렸다. 잠시 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당에 폭탄이 떨어졌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나는 길바닥에 쓰러져있었는데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아이들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만치 불에 타서 터만 남은 우리 집이 보였다. 얼른 등에 업은 막내를 돌려 안아보니 "으앙"하고 울었다. 넋을 잃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엄마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20m쯤 떨어진 곳에 튕겨나갔던 둘째 딸이 피투성이가 돼 걸어오고 있었다. 입고 있던 노란 인조견 치마는 날아가고 허리춤에 고무줄만 남아 있었다. 길 맞은편 언덕 방공호에서 사람들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우리를 불렀다. 방공호에 두 아이를 내려놓고 못 나가게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친 뒤 연기가 피어나고 있는 우리 집터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아들은 머리가 깨진 채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그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홑이불에 싸서 아들을 집터 근처에 묻었다. 며칠 후 남편이 돌아왔고, 우리는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었다. 60년이 지났지만, 내 기억 속의 아들은 여전히 환한 웃음을 띤 채 뛰놀고 있다.
● 그때 그 장면
공산군 포로에게 살충제 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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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RA) 1951년 3월 9일 유엔군들이 공산군 포로들에게 살충제인 DDT를 살포하고 있다. /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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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제은(69·서울 용산구)
2000년 5월 국가보훈처에서 전화가 왔다. 내 큰 형님 고(故) 연제근 상사가 전쟁영웅으로 선정됐다고 했다. 11살 아래였던 나를 유난히 귀여워했던 형님이다.
8남매 중 장남이었던 형님은 남자답고 의젓했다. 16살 되던 해 이웃 마을 처녀와 결혼했고, 2년 뒤 "나라를 지키겠다"며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했다. 6개월에 한두 번씩 휴가를 나올 때면 "제은이, 공부 열심히 해야지"하며 운동화랑 학용품을 잔뜩 사줬다. 1949년 10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서 공비 9명을 생포한 형님이 특별 휴가를 나왔다. 형님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이 형님이 영웅 됐다"고 외쳤다. 부모님은 그날 잔칫상을 차렸고, 그것이 형님과 함께 한 마지막 식사가 됐다.
전쟁이 터지고 두 달이 채 못 돼 인민군이 포항까지 내려왔다. 형님은 국군 3사단 22연대 분대장으로 포항 장흥동에 배치돼 있었다. 9월 17일 새벽 형님은 '형산강 도하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선발대로 자원해 분대원 12명을 이끌고 가슴까지 물이 차는 형산강을 건넜다. 잠수해 기어가다 숨이 차면 머리를 내밀었고 그때마다 적 기관총이 불을 내뿜었다. 분대원 중 9명이 붉은 피를 토하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형님은 끝까지 강을 건너 준비해온 수류탄을 적 기관총 진지에 던졌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적의 진지는 박살이 났다. 형님은 수류탄 두 개를 더 던진 뒤 가슴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형 나이 스물넷이었다. 형의 목숨 건 투혼으로 아군은 쉽게 강을 건넜고, 이튿날 포항을 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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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제근 상사
형님은 이 공로로 훈장 두 개와 무공포장을 받았지만 우리 가족 가슴엔 깊은 상처가 남았다. 형님의 사망통지서를 보고 충격을 받은 형수는 그해 겨울부터 돌도 채 지나지 않은 둘째 딸에게 젖을 먹이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전염병에 걸린 첫째 딸과 영양실조를 앓아오던 둘째 딸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다. 얼마후 형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 어머니는 매일 밤 논둑으로 나가 우셨다.
지난 2001년에는 형님 모교인
충북 증평군 도안초등학교에 형의 동상도 세워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형을 기억하는데, 하늘에 계신 형님은 그걸 알고 계실까.
인민동무들에게 형장으로 끌려가다 막내딸인 날 찾아 두리번대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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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영순(73·경기도 용인시)
전쟁이 터지자 내 고향 전북 고창군 법지리에는 붉은 완장을 두른 '인민동무'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7월 중순 어느 날, 그들이 집에 들이닥치더니 작은 오빠를 끌고 갔다. 며칠 뒤엔 아버지가 인민 지소에 가야만 작은 오빠를 풀어주겠다면서 아버지까지 데리고 갔다. 그때 아버지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라는 단체 간부였고, 작은 오빠는 국군 장교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달려와 "네 오빠가 다른 청년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가 총살당했다"고 알려줬다.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빨리 아버지께 오빠 소식을 알려라"고 했다. 단숨에 달려가 면회를 신청해 소식을 전하니 아버지는 말없이 부르르 떨기만 했다.
막 건물을 나서는데 뭔가 일이 벌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총을 든 인민군들이 새끼줄로 마당을 둘러치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이어 철창 안에 있던 아저씨들이 손목이 묶인 채 줄줄이 끌려갔다. 그런데 거기 우리 아버지가 보였다. 가슴이 막 쿵쾅 뛰었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나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13살짜리 소녀는 너무 무서웠다. 아무 생각도 없이 집으로 죽기 살기로 뛰었다. 그러다 번쩍 "아버지는…"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헐떡이며 인민 지소에 다다랐을 땐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여러 사람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그쪽으로 걸어갈 때 누군가 나를 붙잡았다. 교장선생님 부인이었다. "너희 아버지도 총살당해 저기에 계신단다." 교장선생님도 아버지와 같은 단체에 있었고, 한 자리에서 총살됐다고 한다. 난 차마 아버지 시신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다.
다음 날 옆 마을에 살던 사촌오빠 둘이 아버지 시신을 몰래 찾아와 마을 뒷산에 매장했다. 인민 동무들이 지게꾼을 앞세우고 또 들이닥쳤고 "반동분자 집이니 재산을 몰수한다"며 가재도구와 먹을거리를 모조리 쓸어갔다. 9월 말 국군이 마을에 진격할 때까지 우리는 숨소리도 못 내고 지냈다.
그해 여름의 기억은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때 충격으로 난 지금도 총칼 쓰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못한다. 그날, 손이 묶여 끌려가며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아버지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