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너흰 10분 후 총살이야 인민경찰이 탄환 가지러 갔어" 넷째 형 친구의 귓속말에 난 경찰서 화장실로 탈출 500m쯤 갔을때 뒤에서 총성이…
〈특별취재팀〉
[28] 진관호씨 '지옥 문턱에서 도망친 나와 큰형'
진관호(79·전북 전주시)
-
- ▲ 진관호(79·전북 전주시)
-
진관호(79·전북 전주시) 내 나이 만 19살, 군산사범학교 2학년 때 전쟁이 터졌다. 난 전쟁도 싫었고, 군인이 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내 고향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는 어느새 인민군 치하가 돼 버렸다. 우리 가족은 반동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혔다. 난 7형제 중 다섯째였는데 셋째 형이 국군, 넷째 형이 경찰관이었다. 전 재산이 몰수되고, 감시 대상이 됐다.
국군·경찰 집안으로 찍혀그해 9월 어느날, 방공굴 파는 밤샘 부역에 동원됐다가 다음날 아침 집에 돌아오고 있었다. 이웃 동네 자위대장이 나를 보더니 "너, 경찰 동생이지. 잘 만났다"라며 나를 경찰지서로 끌고 가 임시감옥으로 쓰던 숙직실에 가뒀다. 그곳에는 이미 10여명이 잡혀와 있었고, 큰형과 사촌 동생도 있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오후 늦게 감옥문이 열리더니 자위대원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동무들 걱정 많이 했지. 노력동원에 불참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뜻에서 구속했을 뿐이고 이따 석방할 테니 앞으로 열심히 일하시오." 석방이란 말에 너무나 기뻤다. 그들은 우리를 잠깐 나오게 해서 저녁밥도 먹였다.
밥술을 뜨려던 찰나, 한 사람이 "너 길호 동생이지" 하더니 나를 붙잡았다. 가만 보니 넷째 형의 친구였다. 그는 내 귀에 대고 "너희는 총살이야. 총알 가지러 간 인민경찰이 10분 후에 도착하면 바로 죽게 돼 있어. 어젯밤에도 50명이 총살됐어"라고 말했다. 인민군들은 퇴각하기 직전 마지막 살육을 저지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밥을 먹는다고 난리였지만 나는 숨이 막혔다. 무조건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사촌 동생은 화장실을 통해 탈출하고, 형은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기로 했다. 일단 건물 밖으로 나오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빠져나갈 곳은 따발총을 든 보초가 지키고 있는 골목 쪽밖에 없었다.
그때 기적이 생겼다. 보초가 총을 옆에 두고 어떤 사람과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옆을 "가라면 가리라. 빨강 깃발은…"이라며 인민군한테 배운 노래를 부르며 태연하게 지나갔다. 감옥에서 탈출하는 놈들이 노래를 부르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빠른 걸음으로 500m쯤 갔을 때 낌새를 눈치챈 인민경찰들이 뒤에서 총을 갈겼다. "픽, 피융" 총알이 사방에 난사됐지만 큰 논두렁 아래로 숨자 총성이 멈췄다.
-
- ▲ 1952년 진관호(가운데)씨가 군산사범학교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진관호씨 제공
집에 와보니 가족 7명 떼죽음 당해
집에 섣불리 나타났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집 주변 논에 숨었는데, 마침 거기에 숨어있던 큰형을 다시 만났다. 형은 이렇게 설명했다. "네가 나가고 나서 다들 총살당할 거라는 걸 알게 되자 무작정 함께 도망 나갔지. 길이나 냇가로 뛰어간 사람은 전부 총 맞아 죽고, 나처럼 논으로 도망간 사람들만 살았어."
논두렁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나자 큰길로 흑인 유엔군 병사들이 지프차를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살았구나 하는 감격의 눈물이 나왔다. 길을 걷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군산에서 우체국에 다니는 둘째 형이었다. 둘째 형은 나를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 형은 "빨갱이들이 우리 가족 다 죽이고 도망갔어"라고 울부짖었다. 인민군들은 우리 아버지, 넷째 형님, 내 남동생 둘, 큰 형수, 큰형의 아들과 딸까지 모두 일곱명을 죽였다고 했다. 형수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다.
방공호에서 한명씩 곡괭이로…
만행은 마지막 부역을 갔던 그날 밤 벌어졌다. 인민군들은 "방공호에 가서 청소를 합시다"라며 우리 가족을 포함해 '대상자'들을 유인했다. 그들은 방공굴 안에서 한 명씩 뒷머리를 곡괭이로 찍어 죽였다고 한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 모두 72명이 죽었다. 나를 기준으로 10촌 이내에서만 42명이 목숨을 잃었다. 막내 작은아버지 가족은 전원이 몰살돼 대(代)가 끊겼다.
'곡괭이 학살' 소식은 육상선수 출신인 마을 청년 한 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와 전했다. 동네 뒷산에 가보니 벌써 방공호 앞에는 유족들이 오열하며 주저앉아 있었다. 굴 속에서 시신을 하나씩 끌어냈다. 노인, 젊은이,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피투성이였다. 뒤통수가 완전히 부서진 아버지와 동생, 조카들 시신을 마주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어머니는 그날 밤 같은 마을 친구분 집에서 자다가 화를 면했다. 그때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데리고 갔다가 "너는 집에 가서 자라"며 돌려보냈고, 어린 막내는 불귀의 길로 가버렸다. 어머니는 평생을 "막내라도 살릴 수 있었는디…"라며 가슴을 치며 한탄하셨다. 94세까지 사셨던 어머니는 "일찍 간 남편과 자식 목숨까지 내가 가져와서 모질게도 오래 사나 보다"라고 늘상 말하셨다.
내겐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총성은 멎었지만 내겐 6·25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다. 금산·월성·중앙·장금·효자·삼천·평화 등 전북의 초등학교에서 42년간 평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항상 반공교육에 신경을 썼다.
또 내가 큰 아픔을 겪었던 만큼 다른 사람의 아픔을 달래주는 데도 힘을 쏟았다. 독학으로 침술을 배운 뒤 시간 날 때마다 무의촌에 봉사활동을 다녔다. 사람들은 나를 '침쟁이 선생'이라고 불렀고, 그 덕에 한 언론사가 주는 교육자 대상도 받았다. 정년 퇴임한 후에는 요양원에서 호스피스로 자원봉사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지만 아직도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의 한(恨)은 내 맘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보지도, 듣지도, 냄새 맡지도 못했던 우리 할아버지
-
- ▲ 이순기(56·충남 계룡시)
휴전직후 길가에서 수류탄 발견
가족이 다칠까봐 작대기로 치우다 온 몸이 피범벅이 된 채…
우리 할아버지는 다른 할아버지와 생김새가 달랐다. 눈이 없고, 그 자리는 움푹 들어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할아버지 주위를 빙빙 돌며 '괴물 할아버지'라고 놀려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을 쫓아가 때려 주었다.
할아버지가 '괴물'이 된 사연은 휴전 이듬해에 태어난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쯤 할머니가 들려줬다. 전쟁의 총소리가 멈춘 지 3개월이 지날 무렵인 1953년 10월, 밭에 가던 할아버지는 길가에 있는 수류탄 2개를 발견했다. 할아버지는 일을 도우러 온다는 고모와 아버지가 수류탄을 건드릴까 봐 지겟작대기로 휙 치우려 했다. 순간 수류탄이 굉음과 함께 폭발을 했고, 할아버지는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수많은 파편이 할아버지의 몸에 박혀 있었고, 할아버지의 두 눈에선 엄청난 피가 흘렀다고 한다. 우리 집은 시골 중에서도 아주 깡시골이었기 때문에 병원에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할머니는 며칠 밤을 새워 할아버지 몸에 박힌 파편을 손수 빼냈다고 했다. 생명은 건졌지만 할아버지는 이때부터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게 됐다.
할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냈다. 방에 앉아서 팥과 강낭콩도 까고, 새끼줄을 꼬아 멍석, 삼태기 등을 만들어 이웃집에 나눠 주기도 했다. 초가집 이엉을 직접 엮는 것도 할아버지 몫이었다.
-
- ▲ 이순기씨 할아버지의 사고 당하기 전 모습.
할아버지는 나를 유난히 예뻐했다. 할아버지는 9남매를 뒀지만, 두 아들은 전쟁 중에 폭격으로 죽었고 휴전 이후에는 4남매를 병으로 잃었다. 큰아들인 우리 아버지가 낳은 첫딸이 나였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품에 나를 꼬옥 안은 채 "순기야, 순기야"하며 얼굴을 비비곤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벗어 놓은 옷에서 이를 모두 잡아 다시 입혀 드리곤 했다. 마루 한쪽에는 나를 주려고 할아버지가 까놓은 밤이 떨어진 날이 없었다. 사랑하는 손녀의 모습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던 할아버지는 가끔씩 약주를 드시며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곤 했다.
무서운 전쟁은 그 자체로서 끝이 아니었다. 총포 소리는 멎었지만 그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전쟁 때문에 불행해졌는가. 사랑하는 나의 할아버지처럼…. 어느덧 나도 할아버지가 사고를 당했던 나이와 같은 나이가 됐다. 내가 열 여섯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