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아버지가 死地로 떠나는 줄도 모르고 태극기 흔들며 신나게 전송가 불렀던.

namsarang 2010. 4. 28. 22:09

[나와 6·25]

아버지가 死地로 떠나는 줄도 모르고 태극기 흔들며 신나게 전송가 불렀던 나…

 

[27] 김희자씨 '軍 자원입대한 아버지와 철없던 딸'

김희자(67·서울 성북구)


아버지가 날 껴안았지만 난 기차 떠날 때까지 태극기만 흔들어대
내 둘째 아들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음향감독된 것도 필연인가

김희자(67·서울 성북구)
1950년 7월 8일, 경남 구포읍 구명국민학교 운동장. 전쟁통이라 교실은 군인들 몫이었고,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을 때였다. 우리 1학년 서해진 담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른 뒤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 아저씨들 힘내라고 전송가를 불러주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누런 종이에 크레용으로 그려 만든 태극기를 하나씩 받았다. 조그맣고 가벼운 태극기. 구포역까지 500여m 길을 펄럭펄럭 흔들며 신나게 걸었다.

시골역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우린 맨 앞에 일렬로 섰다. 드디어 늠름한 국군 아저씨들이 나왔다. 우린 목소리를 한껏 높여 '승리의 노래'라는 전송가를 불렀다. 목청 좋다고 어른들 귀여움을 받았던 나는 특히 크게 불렀다.

저만치 우리 아버지가 보였다. 너무 신이 나서, 목에 더 힘을 줬다. 아버지가 돌아보더니 "자야, 자야, 희자야"하며 달려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헌병이 달려와 아버지를 떼어낸 뒤 기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차가 움직였다. 나는 끝까지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군에 지원했고, 일주일 훈련을 받고 그날 전쟁터로 떠나셨다. 철없던 나는 그날의 의미를 몰랐다.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없게 될 줄도 몰랐다.

피란민들의 어머니, 내 어머니

얼마 후 어머니와 나, 4살 아래 여동생은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집에 있던 물건은 다 빼앗기고 우리에게는 밥그릇 3개, 국그릇 3개, 수저 3벌, 냄비 2개와 이불 1개만 남았다. 밥을 얻어먹으러 할머니댁에 찾아가니,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남편 잡아먹은 년", 나와 동생에겐 "애비 잡아먹은 새끼"라며 문을 잠가 버렸다.

어머니는 부산 아미동 판잣집에 둥지를 틀고 국제시장에서 빈대떡 장사를 했다. 장사는 잘됐고, 우리 집은 좀 살 만해졌다. 매일 해질 무렵 피란민 아이들 수십 명이 깡통을 들고 우리 가게를 찾아왔다. 어머니는 큰 솥에다 국밥을 끓여 차례로 떠 주셨다. 밥이 모자라면 장작을 지펴 밥을 지어 먹였다.

1953년 시장에 큰불이 났다. 우리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그 아이들이 달려와 가구며 옷가지를 재빨리 끄집어냈다. 그들 덕에 우리는 숟가락 하나 잃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후에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내가 숙명여대 국문과에 입학하자마자 자궁암을 앓기 시작했다. 암을 선고받은 1961년 그해 어머니가 아버지 사망신고를 했다는 걸 난 나중에 호적등본을 떼어보고서야 알았다.

대학 3학년 때인 1963년 1월 어머니는 4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난 조흥은행 행장 비서로 취직해 악착같이 살았다. 내겐 뒷바라지할 여동생이 있었다.

10년 후에 들은 아버지 전사 소식

어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매 끼니 때면 밥 한 그릇을 따로 퍼 놓았다. "너희 아버지가 밤에 오면 배고파서 어쩌냐"고 했다. 고교 1학년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조용히 불러 앉혔다. "네 할머니가 말씀해주셨는데…"라고 말문을 떼시더니 "네 아버지가 1950년 9월 8일에 안강 전투에서 전사하셨단다"고 말했다.

벼락을 맞은 듯했다. "왜 이제야 말씀해 주시는 거죠"라며 어머니께 대들기도 하고 원망도 많이 했다. 철없던 나는 어머니 맘 같은 건 몰랐다. 아버지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수십년이 흘렀다. 2004년 1월 한 노인이 내가 지회장으로 일하는 성북구 보훈회 사무실에 찾아왔다. 한동네에 살던 작은아버지(아버지의 막내 동생)라고 했다. 6·25 전쟁 이후 우리 가족은 큰집 식구와 발을 끊고 살았기에 나는 작은아버지를 처음 봤다. 팔순을 바라보던 작은아버지 말에 나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네 아버지 죽은 뒤 전사통지서와 유해가 함께 집으로 왔다. 너희 가족에겐 얘기 안했다. 너희 외갓집 선산 큰 돌 밑에 네 아버지를 묻었다. 미안하다. 나 죽기 전에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당장 달려가 돌을 들어냈더니….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또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대부분 다 썩어버리고 남은 아주 작은 아버지의 누런 뼛조각들.그렇게 돌아온 아버지를 대전국립현충원에 모셨다.

내 맘속에 태극기 휘날리고

동생은 끼가 많았고 특히 노래를 잘했다. 생전에 노래를 잘하셨다는 아버지를 닮아서다. 동생은 한 방송국 노래자랑에서 1등을 했고, 그걸 본 음반사 사장에게 발탁돼 가수가 됐다. 본명은 김숙자인데, '옥금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웬일인가요' '아리랑처녀' '그 임에게 바치리' 등으로 1960년대에 꽤 유명한 가수였다. 동생은 평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언제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사무친다"고 했다. 그러더니 1968년 자진해서 월남에 군 위문 공연을 갔다. 국군장병들 앞에서 군가와 전송가를 씩씩하게 부르고 왔다고 했다. 예전에 내가 아버지를 향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전속가수가 된 동생과 함께 1966년부터 서울에 살았다. 그때 동생에게 곡을 써주던 작곡가 선생님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철혁·76·한국영화음악작곡가협회장)이다.

둘째 아들 태규가 그 재능을 이어받았는지 영화음향감독이 됐다. 2003년 아들이 영화 대본 하나를 갖고 왔다. 아들 작품 원고는 다 읽었지만 그 작품은6·25 전쟁 영화라고 해서 들춰보지도 않았다.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이 영화는 1000만명 관객을 돌파했고 아들은 대종상 영화제 음향기술상을 받았다. 2004년 3월 경복궁 앞뜰에서 1000만명 돌파 기념 시사회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솟구치는지. 강제규 감독이 나를 앞으로 불러냈다. 3만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 사연을 짧게 이야기했다. 그 마이크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내 맘 속에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버지….

 


[미니 戰史] [11]

 

北, 8·9월 2차례 총공세… 한때 다부동 등 방어선 돌파… 美8군, 예비대 투입…

인천상륙 작전과 함께 총반격 나서

  •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낙동강 전선까지 쳐들어온 북한군은 1950년 8월과 9월 2차에 걸쳐 총공세를 폈다. 8월 공세 때 북한군은 부산에 이르는 지름길인 대구 방면에 주공을 배치했다. 동시에 전 전선의 모든 접근로에서 공격을 전개해 아군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어느 축선에서든 돌파구가 생기면 이를 확대해 후방 깊숙이 진출, 전쟁을 종결하고자 했다. 북한군은 13개 사단 가운데 11개 사단을 투입했다.

한미연합군은 최초 낙동강 연안(X선)에서 적 공격을 막아내다 8월 12일 축소된 방어선이자 최후의 저항선인 'Y'선으로 철수하여 북한군과 결전을 벌였다. 미 제8군은 적 주공이 지향된 대구 북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다부동 일대의 국군 제1사단 방어지대에 미군 2개 연대를 긴급 투입했다.

유엔군은 또 낙동강 대안에 집결된 북한군 병력 및 물자를 파괴하기 위해 대규모 융단폭격을 펼쳐 북한군에 심리적 타격을 주면서 그들이 전투력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없도록 했다. 이에 따라 8월 공세가 종반전에는 마산과 다부동 정면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북한군은 8월 20일부터 9월 공세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한미연합군은 병력 충원과 미 본토의 증원부대, 영국 제27여단의 도착으로 작전운용에 융통성을 갖게 되었다. 미 제8군은 8월 공세 때 상주-다부동-대구 축선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미 제1기병사단의 방어지역을 다부동 동쪽 가산산성 일대까지 확대시켰다. 8월 한 달 동안 다부동 일대를 끝까지 지켜 대구를 사수한 국군 제1사단은 인접 팔공산 북서쪽의 제6사단 방어지역의 일부를 인수, 국군 전체의 방어정면이 20㎞ 정도 축소됐다. 미 제8군은 영국 제27여단을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하여 미 제1기병사단의 확장된 방어책임을 보완하여 주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러한 상태에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9월 공세 때 북한군은 새로 편성 중인 사단을 제외하고 13개 사단 모두를 5개 공격집단으로 편성, 대구·영천·경주·창녕·마산 정면으로 각개돌파를 감행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의 주요 지점인 다부동, 마산, 낙동강 돌출부, 영천, 포항 지역이 점령되거나 돌파됨으로써 한때 위기를 맞이했으나, 막강한 유엔 해·공군 지원 아래 미 제8군의 과감한 예비대 투입과 역습으로 적을 격퇴하고,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총반격작전에 나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