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1학년은 박 부잣집 대청마루, 6학년은 정자나무 밑에서 수업

namsarang 2010. 4. 22. 20:12

[나와 6·25]

1학년은 박 부잣집 대청마루, 6학년은 정자나무 밑에서 수업

 

[25] 노주원씨 '유랑교실에서 보낸 국민학교 시절'

노주원(67·부산 북구)

칠판 하나와 분필이 전부… 비바람 몰아치면 옷 젖어
짚·풀로 덮고 가마니 깔고 나중에 임시 학교 지어

         노주원(67·부산 북구)

내 고향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경남 산청군 단계면.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단계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온 동네 사람들이 피란을 간다고 야단이었다. 우리 가족도 40리 정도 떨어진 고모댁으로 가 뒷산 대밭에 굴을 파고 피란살이를 시작했다. 굴 속에서는 바깥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숨을 죽이고 바닥에 엎드려 있기만 했다. 우리는 훈련이 잘돼 있었다. 그러나 세 살배기 여동생은 밤낮으로 울기 일쑤였고, 정말 난감했다. 어머니는 여동생 입을 틀어막고, 우리는 굴 입구를 가마니로 가렸다.

두 달 정도 굴 속 생활을 하는데 외할아버지가 찾아와 "인민군이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은 잡아가지 않으니 아이들은 집으로 오라"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16살 누나는 굴 속에 남고 형과 나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우리는 마당에 2평 남짓한 방공호를 만들어 무슨 소리만 나면 무조건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또래 친구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인민군도 빨치산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총과 실탄·수류탄 등 무기를 주워서 모으는 것을 재밌다고 생각했다. 폭격이나 총소리가 나면 일단 숨었다가 기관총 소리가 많이 났던 곳에 잽싸게 달려가 기관총 탄피와 실탄 연결고리를 주웠다. 비행기 폭격 소리에도 익숙해졌고, 뛰고 엎드리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는 요령도 군인 못지않게 터득해 갔다. 총소리만 듣고도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동네가 인민군 치하에 놓인 지 3개월 정도 흐른 어느 날 온 동네가 시끌시끌해졌다. 인민군이 후퇴하고 경찰이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동네 어른들과 형들이 다시 활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학교도 다시 다니게 됐다. 하지만 학교 건물은 이미 불타 버리고 없었다. 아이들은 잿더미 속에서 타다 남은 못과 유리창이 녹아 구슬처럼 된 유리알을 주워서 '못치기'와 '구슬치기'를 하면서 놀았다.

학교 선생님들까지 동네로 돌아오고, 학교 수업을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학교가 불에 타버린 상황에서 동네에서 부자(富者)였던 몇몇 어른들이 자신들의 집을 흔쾌히 교실로 제공했다. 우리는 학년별로 공부할 장소를 나눴다. 학년이 낮을수록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학년은 박 부잣집 대청마루, 2학년은 권 부잣집 대청마루, 3학년은 정 부잣집 대청마루, 6학년은 북단 하천 둑에 있는 정자나무 밑에서 공부를 했다. 우리는 이 교실을 '유랑교실(流浪敎室)'이라고 불렀다. 유랑교실에는 칠판 하나와 선생님이 가져 온 분필이 전부였다. 여름에 비바람이 몰아치면 바깥쪽에 앉은 아이들은 옷이 젖었다. 겨울철에는 차가운 마룻바닥 때문에 엉덩이가 시려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쉬는 시간엔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에 벽을 등지고 옹기종기 모여서 손을 비비며 몸을 녹였다. 밤이면 같은 반 아이들끼리 모여 등잔불 밑에서 같이 숙제를 하기도 했다.

1953년 3월에 찍은 단계국민학교 3학년 수료 기념사진. 가운데 둥근 원 안에 있는 소년이 노주원씨, 사진 오른쪽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 초가 지붕과 흙벽으로 된 가교사(假校舍)의 모습. /노주원씨 제공

교실 없이 떠도는 자식들이 안쓰러웠던지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옛 학교 자리에 '가교사(假校舍)'를 짓기 시작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기둥을 세우고, 벽은 대나무를 엮어 흙으로 바르고, 지붕에는 짚과 풀로 덮은 임시 학교였다.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출입구와 창문은 거적때기로 적당히 가렸다. 우리는 교실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비가 오면 지붕에서 물이 흘러 칠판이 젖고, 공책도 젖어 찢어지기 일쑤였다.

우리 동네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빨치산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로 가는 길목 담벼락에는 늘 빨치산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혀 있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매일 같이 벽보 앞을 지나다니면서 아직 토벌하지 못한 빨치산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고 다녔다. 구구단은 못 외워도 빨치산 이름을 못 외우는 아이들은 없었다. 경찰서 앞을 지날 때는 공비들 시체를 거적때기로 적당히 덮어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유랑교실과 가교사를 전전했다. 정부에서 시멘트가 조금 나왔지만 학교를 짓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이 끝나고 매일 하교시간이 될 무렵이면 학교를 짓기 위해 전교생이 냇가에서 모래와 자갈을 퍼다 날랐다.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시멘트 벽돌'을 틀에 넣어 찍어내고, 시멘트 기왓장도 선생님 통솔하에 어린 우리들이 직접 만들었다. 새로 지은 학교가 완성되기 전에 나는 졸업했지만 전쟁 때 불타 버린 학교를 다시 세워 지금까지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럽다. 나는 당시 유랑교실 시절 받은 학업우수상, 개근상, 정근상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다. 이미 빛바랜 것들이지만 내겐 보물보다 더 소중하다.

나는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후 부산동아대에서 강의를 했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손녀 보는 재미에 살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녀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면 그저 웃기만 할 뿐 믿으려 하지 않는다. 유랑교실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과 두 달에 한 번 부산에서 모임을 갖는다. 일흔을 앞둔 친구들과 모여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우린 어느새 수십년 전 유랑교실 시절로 돌아간다.

 

 

 남로당원과의 오월동주

  • 백태용(79·경기도 평택시)

 광주전투서 살아남은 3人 민간복 입고 순천 향해 걷다
남로당원 만나 동행 그의 도움으로 인민군 통과

육군 제5사단 공병대대 '전차 폭파 특공대' 10명 중 1950년 7월 23일 새벽 광주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는 나(당시 하사)와 박 하사, 김 일병이 전부였다. 우리는 빈집을 뒤져 농부 옷으로 갈아입고 감자·보리쌀을 주머니에 넣은 뒤 남쪽으로 향했다.

순천 방향 언덕길에서 까까머리에 푸른 옷을 입은 사내가 보따리를 짊어진 채 걷고 있었다. 한눈에 형무소 출감자로 보였다. 호기심 많은 김 일병이 장난스레 다가가 같이 가자고 했다. 그는 우리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자신은 남로당원이며 여순사건에 가담했다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인민군 도움으로 나왔다고 했다. 김 일병은 "우리도 광주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남로당 비밀당원"이라고 둘러댔다. 인민군이 사방에 깔린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그와 동행키로 했다. 평소 "빨갱이는 벌레보다도 못한 놈들"이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박 하사가 뒤에서 머리통만한 돌을 집어들려 했지만 겨우 말렸다.

산을 하나 넘으니 학교 앞에 가로수가 많았다. 따가운 햇볕 때문에 잎이 축 늘어져 있는 줄 알았더니 아뿔싸, 나뭇가지로 위장해놓은 인민군 작전 차들이었다. 장총을 멘 인민군 초병이 서 있었다.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앞서가던 남로당원에게 바싹 붙어 "형무소에서 같이 나온 걸로 하자"고 했고 그도 동의했다. 초병이 총을 들이대며 "누구냐"고 묻자, 그는 "우리는 모두 남로당원으로 여순사건에 가담한 죄로 잡혀 광주형무소에 있다가 나오는 길이랑게요" 하더니 보따리를 풀어 냄비와 숟가락 등 형무소에서 쓰던 잡동사니를 줄줄이 꺼내놓았다. 초병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가라고 했다. 멋진 즉흥 쇼를 보여 준 남로당원은 밥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만 남기고 길을 재촉했다. 조금 전 박 하사가 이 남로당원을 죽여버렸다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남로당원과의 '오월동주(吳越同舟)'는 그렇게 끝났다.
 
 

 입대한 삼촌 소식 끊기자 치매 걸린 할머니… 지나가는 군인만 보면 "우리 호야 못 봤는교"

  • 박정애(65·경북 경산시)
       ▲ 박정애(65·경북 경산시)
우리 할머니는 딸 셋을 모두 홍진(홍역)으로 잃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아버지와 마흔이 넘어 뒤늦게 낳은 삼촌을 살얼음판 건너듯 키우셨다고 한다. 그런 삼촌이 전쟁이 터지자마자 자원입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때 삼촌 나이는 열아홉. 입대하는 날까지 가족들이 말렸다. 영장이 나올 때까지라도 기다려 보라고. 하지만 삼촌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며 극구 뿌리치고 입대했다고 한다.

삼촌이 떠난 후 할머니는 아침마다 세수를 정갈하게 하시고 머리를 곱게 빗었다. 그러고는 장독대 위에 물이 담긴 하얀 대접을 놓고 동쪽 해를 향해 두 손 모아 빌었다. 작은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천지신명께 빈 것이다. 아침에 소를 끌고 뒷산에 갈 때면 아이들이 할머니의 그 모습을 흉내 냈다. "너거 할매는 와 만날 빌어쌌노." 그때마다 그 아이들이 미웠지만 한편으론 할머니가 창피했다.

군대에 간 삼촌은 소식이 없었다. 다른 동네 청년들은 돌아왔지만 삼촌은 어디서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1960년대 후반 삼촌이 전쟁 중 실종자로 인정돼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할머니는 "그 돈 받기 싫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솔직히 어려운 시절 가계에 도움이 됐다. 그때 자다 깨어보면 할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귀한 아들의 목숨 값이라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그때쯤부터 할머니는 치매가 왔다. "호야 못 봤는교, 우리 호야 봤는교." 삼촌 이름이 박영호였다. 할머니는 지나가는 군인을 보면 열에 열 번 "호야가"라고 물었다.

1971년 아버지가 51세 나이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셨다. 3남매 중 둘째인 나는 위로 오빠가,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다. 치매가 깊어진 할머니는 상주복을 입은 당신의 손자(내 오빠)를 보고 "인물 좋은 젊은이가 부모상을 당했나요"라고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초점 잃은 눈으로 상복을 입고 통곡하는 우리 3남매를 바라봤고, 문상객들은 그런 할머니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 호야 봤는교"라며 당신의 작은아들을 찾았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석 달 만에 세상을 뜨셨다.

몇해 전 친정에서 족보를 간행했다기에 한 권 가져 왔다. 외손인 내 아이까지 얹혀 있는데, 삼촌 이름은 빠져 있었다. 왜 그렇게 섭섭하던지…. 할머니는 저 세상에서 '우리 호야'를 만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