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정애(65·경북 경산시)
삼촌이 떠난 후 할머니는 아침마다 세수를 정갈하게 하시고 머리를 곱게 빗었다. 그러고는 장독대 위에 물이 담긴 하얀 대접을 놓고 동쪽 해를 향해 두 손 모아 빌었다. 작은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천지신명께 빈 것이다. 아침에 소를 끌고 뒷산에 갈 때면 아이들이 할머니의 그 모습을 흉내 냈다. "너거 할매는 와 만날 빌어쌌노." 그때마다 그 아이들이 미웠지만 한편으론 할머니가 창피했다.
군대에 간 삼촌은 소식이 없었다. 다른 동네 청년들은 돌아왔지만 삼촌은 어디서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1960년대 후반 삼촌이 전쟁 중 실종자로 인정돼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할머니는 "그 돈 받기 싫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솔직히 어려운 시절 가계에 도움이 됐다. 그때 자다 깨어보면 할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귀한 아들의 목숨 값이라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그때쯤부터 할머니는 치매가 왔다. "호야 못 봤는교, 우리 호야 봤는교." 삼촌 이름이 박영호였다. 할머니는 지나가는 군인을 보면 열에 열 번 "호야가"라고 물었다.
1971년 아버지가 51세 나이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셨다. 3남매 중 둘째인 나는 위로 오빠가,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다. 치매가 깊어진 할머니는 상주복을 입은 당신의 손자(내 오빠)를 보고 "인물 좋은 젊은이가 부모상을 당했나요"라고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초점 잃은 눈으로 상복을 입고 통곡하는 우리 3남매를 바라봤고, 문상객들은 그런 할머니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도 "우리 호야 봤는교"라며 당신의 작은아들을 찾았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석 달 만에 세상을 뜨셨다.
몇해 전 친정에서 족보를 간행했다기에 한 권 가져 왔다. 외손인 내 아이까지 얹혀 있는데, 삼촌 이름은 빠져 있었다. 왜 그렇게 섭섭하던지…. 할머니는 저 세상에서 '우리 호야'를 만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