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잊을 수 없는 그 사람, 그 순간
한정수(79·경기도 의왕시)
15만원이면 쌀 30가마 돈 본국으로 돌아갈때 후임자에 신신당부해 등록금 지원 계속
그의 베푸는 삶 배워 나도 어려운 가정에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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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정수(79·경기도 의왕시)
1951년 8월 나는 수원농과대학(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농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전쟁으로 입학이 늦어지면서 한 학기가 면제돼 총 7학기제가 됐지만 내겐 무엇보다 학비가 큰 걱정이었다. 첫 학기는 형님이 농사를 지어 대줬고, 두번째 학기는
수원 미군비행장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해 등록금을 벌었다. 세번째 학기를 앞둔 1952년 6월 중순 다시 수원 미군비행장을 찾아가 일자리를 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미 다른 사람이 채용돼 있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렇게 내 학업이 중단되는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방에서 나오려는데 누가 뒤에서 "보이(Boy)상(
일본식 호칭)"이라고 불렀다. 미군 한 분이 미소를 띠면서 손짓했다. 그는 자신을 윙거 중위라고 소개했다. 그는 사정을 듣더니 내 이름과 학교 위치를 묻고 "너무 실망하지 마라"며 어깨를 토닥였다.
이튿날 학교 친구들이 "교무과장 김 교수님이 오라고 하시더라"고 전해줬다. 교수님 댁에 찾아갔더니 윙거 중위가 지프를 타고 학교에 찾아왔다고 하셨다. 그는 등록금 15만원을 주고 갔다고 했다. 당시 쌀 30가마 정도 하는 큰돈이었다. 그는 내 인생을 환하게 밝혀줄 등불 같은 존재로 등장했다. 그는 왜 내 등록금을 대주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넉넉한 미소만 지었다.
그해 말 크리스마스 때 윙거 중위는 나를 파티에 초대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대학생 미스터 한"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술을 한 잔 줬고, 벨트와 미국산 담배도 줬다. 나는 답례로 동양적인 모양의 수가 놓인 머플러를 건넸다. 사람들이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쳤다. 그는 이듬해 봄에도 선뜻 내 등록금을 내놓았다.
1953년 6월쯤인가 윙거 중위를 만나러 부대에 갔더니 그는 이미 본국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후임자는 "윙거 중위가 미스터 한의 등록금을 꼭 챙겨서 대주라고 신신당부하며 떠났다"고 말했다. 그들의 등록금 선행은 휴전 이후에도 계속됐고 난 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1955년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가서 육군본부 인사부서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그때 윙거 중위를 찾아봤지만 실패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주소를 적어 놓거나 고향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며 크게 후회하고 있다.
학비가 없어 쩔쩔매던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농림부 사무관으로 들어가 농협대학 교수까지 지내고 퇴직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윙거 중위와 그 후임들 덕분이다. 나는 정년퇴직하기 전에 남편 없이 장애인 아들 둘을 기르는 어떤 엄마에게 3년 동안 매달 5만원씩 보내줬다. 나는 윙거 중위로부터 베푸는 삶의 기쁨을 배우게 됐다.
검문중 우리 짐 속의 태극기 보고도 인민군 눈 피해 통과시켜준 좌익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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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68·경기도 파주시)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경기도 파주에 사는 국민학교 2학년생이었다. 부모님, 누나까지 우리 식구 넷이서 부천의 친척집에 피했다가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한 작은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 팔에 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피란민들을 막아섰다. 좌익 단체인 '민청(북조선민주청년동맹)' 소속인 그들은 피란민들의 짐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옆에선 따발총을 든 인민군이 사방을 감시했다.
우리 식구는 사색이 됐다. 짐보따리 속에 태극기와 도민증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각되면 총살감이었다. 도민증은 요즘으로 따지면 주민등록증인데, 당시엔 좌·우익 사상을 구별하는 기준이 됐다. 분명 "왜 남쪽 도민증을 아직 안 버렸느냐"고 추궁할 게 뻔했다. 하물며 태극기가 발견되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리 가족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다행히 도민증은 이불솜 속에 넣고 실로 꿰매 가져온 터라 들키지 않았다. 안도하는 순간 옷 갈피 속에서 태극기가 나왔다. '이제 죽은 목숨이구나'. 그런데 분명히 태극기를 본 민청 소속 청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태극기를 덮더니 "얼른 가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지옥에서 살아난 기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겁지겁 짐을 챙겨 발걸음을 뗐다. 급히 산기슭을 올라가며 자리를 피하려는데, 아까 그 민청 청년이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여기서 죽나 싶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 선 그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태극기를 갖고 다녀요. 아까 태극기 나왔을 때 (인민군한테) 들킬까봐 나도 진땀이 났네." 그는 "산 너머 마을에서도 짐을 조사 중이니 태극기를 버리고 가라"고 말하고는 도망치듯 가버렸다.
우리는 태극기를 땅속에 묻었고,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60년 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생명의 은인. 그가 무슨 이유로 민청이 된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양심에 맞지 않는 이념과 체제하에서 훗날 고통을 겪지 않았을까 언제나 걱정이 됐다. 그분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지금도 간절하다
마을에 걸린 인공기를 발기발기 찢고 국군에 "들어오라" 신호보낸 주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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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복(70·경기도 수원시)
내 고향은
충남 서산시 고북면. 유엔군이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직후 우리 마을에도 국군이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러 진격해 왔다. 하지만 국군 탱크는 면 소재지 남쪽 언덕에 머무른 채 공포(空砲)만 쏘아대고 있었다. 마을에 인공기가 걸려 있는 탓에 아직 북한군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섣불리 내려오지 못한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9월 30일이었던 것 같다. 새벽녘에 "팡"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밖에 나가보니 6척 장신(長身)의 스님 한 분이 오른손에 사제(私製) 권총을 들고 늠름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인근 고찰(古刹)인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의 주지였다. 스님은 면사무소에 걸린 북한 면당위원회 간판을 주먹으로 일격(一擊)해서 떼어낸 후 우물에 처박아버렸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영웅호걸의 무공을 보는 듯했다. 이어 스님은 바로 옆 주재소(경찰지서) 국기게양대에 걸린 인공기를 내려 발기발기 찢어버린 뒤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 최대한 높게 게양했다. '신호'가 올라가자 그제야 국군 탱크는 마을로 내려왔다.
국군을 본 마을 사람들은 통곡을 했다. "하루만 먼저 오지 그랬소. 그러면 우리 아들이, 우리 남편이 죽지 않았을 텐데…."
바로 전날 밤 북한군은 임시 감옥으로 사용하던 소방대 창고에 불을 질러 가둬두었던 공무원과 지주(地主)들을 죽였다. 태극기가 하루만 더 일찍 올라갔더라도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스님에게 왜 그런 활약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소방대 창고에서 죽어가는 사람 목숨을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다들 생각했다. 커서 교사가 된 나는 학생들에게 스님과 태극기 이야기를 수십년간 해왔다. 60년이 지났지만 스님의 통쾌한 몸동작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게 돼지감자 쥐어준 석이… 독이 올라 다음날 싸늘한 시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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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호(67·대구시 수성구)
1950년 나는
경북 상주군 상영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7월 어느 날 인민군이 상주 근처까지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담임선생님은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피란길에서 부모님 손을 꼭 잡고 다니라고 당부했다.
음력으로 칠석날 밤이었던가. 낙동강으로 가는 길에서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
서울에서 내려오던 석이라는 아이였다. 석이는 매끄러운 서울 말투를 쓰고 모양 좋은 운동화를 신었다. 견장이 달린 고운 양복을 입은 석이를 보며 촌뜨기였던 나는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석이는 서울에서 먹던 흰 쌀밥 이야기를 하며 서울을 그리워했다.
계속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피란민들은 옥성면(지금의
구미시 옥성면)의 한 골짜기로 피신했다. 총포 소리가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했지만 석이와 나는 함께 있었다. 그 북새통 속에서도 헤어지지 않은 게 지금도 신기하다. 나뭇잎도 씹어먹고 개구리도 잡아먹었지만 허기를 달래지는 못했다. 그래도 옆에 석이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8월의 어느 풀 향기 상큼한 밤에 석이와 나는 은하수를 말없이 보며 여느 때처럼 배고픔을 달래고 있었다. 그날따라 몹시 창백한 얼굴을 한 석이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배고프지"하더니 내 손에 뭔가를 쥐어줬다. 파란 색깔의 못 생긴 감자, 돼지감자였다.
그 이튿날 밤하늘에 은하수가 찬란한 가운데 석이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석이 어머니는 돼지감자를 손에 쥔 채 누워 있는 석이 옆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석이는 싹이 난 돼지감자를 캐서 먹고 독이 올라 죽었다 했다. 오랜 굶주림에 지치고 병든 몸이 감자 독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석이 아버지는 아들 주머니에서 나온 몇 개의 감자와 함께 석이를 골짜기에 묻었다.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1995년 초여름 석이가 묻힌 골짜기에 가봤다. 그가 묻힌 곳은 흔적도 없었고 돼지감자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