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재식(78·서울 강동구)
아끼던 이 하사가 고꾸라졌다
난 홀로 적진으로 돌격했다, 적 1명 하고 마주쳤다…
우린 거의 동시에 총을 쐈고 적이 쓰러지는 동시에 나도…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춘천중(현 춘천고) 5학년이던 나는 학도의용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이듬해 3월 사병으로 정식 입대했으며, 1952년 11월에는 시험을 통해 장교로 임관했다. 3년간 강원도 철원, 평안도 희천 등지에서 치른 숱한 전투에서 나는 용케 살아남았다. 하지만 휴전을 불과 일주일 앞둔 1953년 7월 20일. 나는 인생에서 가장 큰 고비를 맞았다. 그때 나는 8사단 21연대 수색중대장으로서 강원도 화천군에서 중공군과 막바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휴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중공군은 높이가 406m라는 이유로 406고지로 불리는 산 정상에서 따발총을 쏘아댔다. 406고지는 적의 보급로를 감시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다. 우리는 그보다 20여m 아래에 있는 둔덕에 진을 치고 고지 탈환을 노렸다. 7월 19일 오후부터 우리는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찜통더위 속 전투는 쉽지 않았다.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며 치열한 전투가 20일 새벽이 될 때까지 6차례 이어졌다. 한 번 격전을 치를 때마다 수십명의 부하들이 죽었다.
여기저기서 '꽝꽝' 터지며 굴러 내려오는 수류탄에 맞아 죽은 동료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부상당한 병사들의 신음소리는 처절했다. 부상병을 부축한다는 핑계로 산 아래로 도망간 부하도 30명쯤 됐다. 결국 167명이던 우리 중대는 실질 병력이 7명만 남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연대장은 산 중턱까지 올라와 "이 새끼! 부하들 다 죽이고 너만 살아?"라며 나를 양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얘기 나누던 이 하사, 갑자기 조용
20일 오전에는 가장 아끼던 부하인 이수복 하사가 죽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수 만든 속옷을 내게 선뜻 건넬 정도로 나를 따랐다. 우리 둘은 함께 턱을 괴고 누워 적의 동태를 살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하사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기가 막혔다. 이 하사는 머리가 땅에 떨어진 채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속옷을 만들어주신 그의 어머님께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독기가 잔뜩 오른 나는 죽음을 각오했다. 혼자 총을 쏘아대며 중공군 20여명이 딱콩총을 쏘는 적진으로 돌격했다. 총이나 수류탄을 던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뛰어들었다. 겁먹은 중공군은 도망하기 시작했고 상급자로 보이는 한 명이 남았다.
그와 나는 고지 위에서 일대일로 마주쳤다. 둘이 거의 동시에 총을 쐈다. 적이 "악"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동시에 나도 총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밑에서 지켜보던 부하들이 나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후송했다. 당시 내 입에선 피가 계속 솟구쳐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됐고, 속옷까지 온통 피에 젖었다고 한다.
- ▲ 유재식씨가 2009년 8월 서울 둔촌동 서울보훈병원에서 가슴 부위를 찍은 X-선 필름. 점선 안이 1953년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유씨 심장 주변에 박힌 총알이다. / 유재식씨 제공
전신에 깁스를 한 채 피를 뱉는 내게 군의관은 "가망 없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고통 없이 가라는 뜻에서 통상 3분의 1만 놔주는 모르핀을 한 통 다 놓아주었다. 그래도 목숨이 질겼는지 난 죽지 않았다.
군의관은 가망 없다 했으나 살아
그 사이 전쟁은 끝났고, 군 병원에서는 탄환을 제거한다며 두 차례 수술했다. 하지만 그때 의료수준으로는 총알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입원 6개월이 지난 후에도 통증도, 후유증도 없었다. 그때 군의관은 "이런 일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기현상이다"라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의 군생활은 무리라며 제대를 종용했다. 하지만 나는 병원장에게 쫓아가 계속 군대에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결국 복귀했고, 이후 28년간 계속 복무한 후 대령으로 전역했다. 나는 끝까지 군인으로 남고 싶어 전역 후에 연금으로 살아가며 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다.
나는 심장에 총알을 걸친 채 57년을 살았다. 비록 6·25 때 훈장은 받지 못했지만 심장에 박힌 따발총 실탄을 최고의 전리품이자 이 세상 그 누구도 받지 못한 '1등 훈장'이라 여긴다.
[미니 戰史]
[10] 고수 아니면 죽음… 낙동강 방어선 형성과 배치
국군 5개사단이 중동부·동부전선 128㎞ 맡고
美 4개사단·해병여단이 중부·서부 112㎞ 담당
1950년 7월 말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낙동강을 따라 연결된 지역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결정하고, 전 부대에 8월 1일자로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7월 한 달 동안 계속된 지연전을 끝내고 4일간 천연 장애물인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워커 장군은 예하부대에 "전사할 각오를 하고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강경한 훈령을 전달했다. 워커 장군의 '비장한 결의'는 뉴욕타임스에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북한군은 7월 말 현재 한반도의 90%를 장악했고, 마지막 남은 경상도 지역을 압박하고 있었다. 호남 지역을 우회한 적 6사단은 하동-진주 방향에서, 적 4사단은 소백산맥을 넘어 대구 측방 거창-고령까지, 적 1·13·15사단은 문경-상주 방향으로, 적 8·12사단은 죽령을 돌파해 영주-안동으로, 적 2·3사단은 김천 외곽으로 진출했다. 동해안 쪽에서는 적 5사단이 포항 북쪽의 영덕을 위협했다.
북한군은 4개의 공격축선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그들의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고자 했다. 즉, ▲경부도로를 따라 왜관-대구방향 공격 ▲포항-경주 방향 공격 ▲창녕 서쪽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 병참선 차단 ▲마산-부산 방향 공격 등이었다.
최초 형성된 낙동강 방어선(X선)은 동서 길이 90㎞, 남북 길이 150㎞로 총 240㎞였다. 이 중 국군 5개 사단(1·3·6·8·수도사단)이 중동부 및 동부의 128㎞를 담당했고, 미군 4개 사단(1기병·2·24·25사단) 및 1해병여단이 중부 및 서부 방면의 112㎞를 담당했다.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낙동강을 돌파할 계획이었지만, 철수하는 아군을 따라잡지 못했다. 초기 전쟁을 주도했던 전차의 80% 이상이 파괴됐고, 일선부대 전투력은 50~60% 수준으로 감소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북한군은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 낮에는 모든 부대의 행동이 큰 제약을 받았고, 병참선이 300여㎞로 길게 늘어나 병력과 물자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하지만 적은 그때까지 계속해 온 공격기세를 유지하며 여전히 전장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있었고, 정면 공격을 통한 부산 점령을 위해 8월과 9월에 걸쳐 대공세를 펼치게 된다.
● 그때 그 장면
고무신 신고, 목총 들고 훈련받는 신병들
- ▲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고무신을 신은 신병들이 훈련소에서 목총(木銃)을 들고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