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두 형님은 유골로 돌아오고 막내인 난 만신창이가 된채…

namsarang 2010. 4. 16. 22:04

[나와 6·25]

두 형님은 유골로 돌아오고 막내인 난 만신창이가 된채…

 

[22] 정흥렬씨 '우리 집안 삼형제의 6·25'

정흥렬(79·경남 하동군)


적 초소 앞에서 '꽝' 터져 팔·엉덩이에서 피가 철철…
산 아래로 몸 굴려 내려가던 중 발목 잃은 미군병사가 날 끌고 아군 초소로 데려와

           정흥렬(79·경남 하동군)
1952년 6월 26일, 육군본부에서 보낸 소포 하나가 집에 도착했다. 나는 강원도 양구 전투에 나갔다 부상하고 제대해 경남 하동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두 형님 소식만을 기다렸던 어머니와 나는 소포가 형님으로부터 온 선물인 줄 알고 손뼉을 쳤다. 소포를 열어보니 나무판자로 짠 허름한 상자 두 개가 나왔다. 전쟁 통에 급하게 만들어낸 듯 조잡하고 허름한 유골함이었다. 어머니는 꿈에 그리던 두 아들이 한꺼번에 재가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셨다. 넋이 나간 듯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남자답게 울지 않으려 했지만, 솟구치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두 형님이 언제 죽었는지 우린 몰랐다. 우린 유골함 받기 전날을 제삿날로 정했다. 그날은 6월 25일이다.

담배 세 갑 주고 큰형 '도둑면회'

1950년 8월, 북한군이 경남 함안 일대에 쳐들어왔다고 했다. 국군은 초비상이었다. 우리 동네 건강한 장병들은 영장도 없이 군대에 끌려갔다. 우리 삼형제 중 막내인 내가 제일 먼저 입대, 제주도 훈련소로 갔다. 1950년 가을이었다.

제주도 훈련소에서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다. 나는 7연대 136중대 소속이었는데, 그가 나를 알아보면서 "느이 형님이 8연대에 있다"고 말해 줬다. 얼른 형님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형님에게 바로 달려갈 수 없었다. 병사들에게 5일마다 하나씩 배급되는 화랑담배를 아끼고 아껴 꼬박 세 갑을 모았다. 보초병에게 담배를 주고 큰형님과 몰래 '도둑면회'를 했다. 내가 입대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두 형님도 나란히 군대에 끌려왔다고 했다. 큰형님도 작은형 소식은 모른다 했다.

훈련은 1년이나 걸렸다. 경남 각지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오니까 훈련병들이 많아 출전 시기가 밀렸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7연대만 해도 병사가 수천명이나 됐다. 우리는 훈련소에서 천막 짓는 작업만 6개월을 했고, 다음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다. 우리 부대가 훈련을 마친 1951년 7월, 건빵 봉지들이 가득 담긴 박스가 도착했다. 건빵 두 봉지를 받은 사람은 배를 타고 강원도로, 한 봉지를 받은 사람은 부산으로 향했다.

1951년 정흥렬씨가 울산 23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당시 어머니가 면회 와서 함께 찍은 사진.

구사일생한 병사, 고향에 돌아가다

나는 건빵 두 봉지를 받았고 강원도 양구 부근의 접전지로 갔다. 육군 미45사단 산하 부대에 배치돼 산에 파둔 방공호에 들어갔다. 당시에 북한군은 국군을 회유하려는 대남방송을 했다. "이승만 군대 전병들이여, 무시무시한 형국에 얼마나 수고가 많습니까. 총을 거꾸로 메고 인민군에게 와서 암호 '트하'를 3번 외치면 환영해 주겠습니다."

대남방송은 시끄러웠다. 우리 연대장은 북한군 스피커를 떼어 오면, 포상금 1만5000원과 한 달 휴가를 주겠다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카빈소총과 실탄 10여 발을 지니고 전우 10명과 함께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곳곳에 지뢰밭과 철선 등 각종 장애물을 피하느라 정신을 곤두세워 산을 올랐다. 불과 30m쯤 앞에 북한군 전방초소에 붙어 있는 스피커가 보였다. 살금살금 숨을 죽여 기어갔는데…. 갑자기 오른쪽 팔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는 동시에 팔이 무거워지면서 피가 흘렀다. '꽝'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엉덩이와 배에서도 핏덩이가 쏟아졌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소총도 잃어버렸고, 피가 흘러 걷기 힘들었다. 적에게 당한 것이다. 살겠다는 일념으로 산 아래로 몸을 굴렸다. 얼마쯤 굴렀을까. 아군인 듯 보이는 사람이 중상을 입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그의 발목을 끌고 또 굴렀다. 한참을 구르던 도중에 사람이 너무 가볍다 싶어서 봤더니 그의 상반신은 없고 하반신만 있었다. 섬뜩한 마음에 손을 놓아버렸다.

곧이어 사람 소리가 났다. 북한군이 아군 시체를 툭툭 치며 산 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송장 무더기 속을 헤집고 들어가서 죽은 척을 했다. 다행히 북한군은 그냥 돌아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산 아래로 몸을 굴리던 중, 한 미국 병사를 만났다. 그는 발목이 끊어져 두 무릎으로 산 아래 아군 초소로 내려가고 있었다. 미군 병사는 나를 한쪽 어깨로 업고 무릎으로 질질 끌고 데려갔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고마운 일이다. 나는 미군병원에서 20일 정도 응급치료를 받은 뒤, 울산 23육군병원으로 이송됐다. 변변한 약도 없고 치료를 제대로 못해서 누워서 엉덩이를 훔치면 구더기가 한 움큼 나왔다. 1년여 동안 치료를 받고 1952년 제대해 집에 돌아간 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두 형님의 유골함을 받았다. 나중에 전해듣기로 큰형님은 1950년 11월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하셨다 하니, 아마도 거기서 돌아가신 것 같다.

전쟁은 내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지금도 오른쪽 엉덩이는 살 없이 움푹 파여 있고, 오른팔은 굽어 있다. 그래도 어머니는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니는 효도했다"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막내아들까지 없었다면 평생 얼마나 한이 되셨을까.

 

 

은혜 갚은 '다락방 손님' 박 중사

  • 박광석(72·서울 강동구)

 

박광석씨의 '돕고 도움받은' 사연
중공군 대대본부로 쓰던 우리 집에 국군 숨겨줬더니
"곧 전투 벌어진다"고 귀띔… 우리 가족 폭격 피하게해줘

1951년 1월 내 고향,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장지동을 중공군이 점령했다. 우리 집엔 서울에서 온 피란민 6명을 합쳐, 12명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와 큰형이 뒷산에 숨자마자, 중공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곳을 대대본부로 쓰겠다"며 사랑방과 건넌방을 차지했고, 우리는 안방으로 쫓겨났다.

어느 날 밤, 국군 한 명이 몰래 우리 집으로 숨어들었다. 자신을 박 중사라고 소개한 그는 "중공군이 있는 여기가 제일 안전할 것 같다"며 숨겨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했고, 서울서 피란 온 아주머니가 "다락방으로 올라가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음 날 국군 패잔병이 동네로 잠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중공군이 집집마다 이 쑤시듯 수색을 했다. 그러나 대대장이 있는 우리 집에는 오지 않았다. 박 중사는 이후에도 밖에 나오지 못하고 다락에 숨어만 있었다. 밥은 내가 올려다 주었다.

그가 어느 날 우리 어머니를 부르더니 2~3일 내에 동네가 전쟁터가 될 테니 빨리 떠나 있으라고 했다. 먼 곳에서 '쿵쿵'하는 포 소리가 가까워지고 저녁마다 정찰기가 돌아다니면서 조명탄을 떨어뜨리고 삐라를 뿌렸다. 박 중사는 "전투를 많이 해 본 내가 잘 안다. 나를 믿으라"며 우리 가족을 강하게 재촉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따랐다.

이틀 뒤 우리 동네는 새벽부터 쌕쌕이 제트기가 날아와 폭탄을 퍼붓더니, 미군 탱크 50여대가 밀고 들어와 전투가 벌어졌다. 나중에 돌아와 본 우리 집은 처참했다. 폭격으로 초가집은 무너져 내렸고, 집 안 구석에까지 포탄 파편이 수북했다. 만약 집을 떠나 있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지금도 "그때 다락방 손님이 우리 가족을 살렸다"고 말하곤 한다.
 

[미니 戰史]

 [9] '김일성의 비밀 병기' 북한군 6사단

  •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중국 내전 겪은 조선의용군으로 구성…
호남으로 우회해 부산 측면 공격 노리다
긴급 투입된 미군에 마산에서 저지당해

북한군 제6사단은 일종의 '비밀병기'였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킬 때 부산을 측면 공격해 단번에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기 위해 준비한 회심의 카드였다. 적6사단은 북한군 내에서도 정예부대로 통했다. 이 부대 병력은 전원 중공이 국공내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할 때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한,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들'이었다. 적6사단의 임무는 빠른 속도로 호남을 장악한 뒤, 진주와 마산을 거쳐 부산을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부대는 서울대전을 점령하고 경부축선을 따라 남하하는 적3ㆍ4사단 뒤를 따라오다 천안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적6사단은 1950년 7월 13일 충남 예산을 지나 2개 제대로 나뉘어 금강을 도하한 후 한쪽은 17일 강경을 점령하고 이리·전주로 남진했고, 또 한쪽(13연대)은 군산으로 우회해 호남지역을 파고들었다. 적13연대는 장항에서 금강을 건너 군산을 점령하고 다음 날 전주에서 강경에서 남진하는 부대와 합류했다. 이어 적들은 정읍남원광주 일대를 석권한 후, 광주에서 13연대는 목포로, 1연대는 보성으로, 15연대는 순천으로 진출했다. 이어 25일에는 순천에서 다시 합류해 하동방면으로 진격했다.

반면, 미군과 국군은 적6사단의 존재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이 경남에 들이닥치기 직전에야 미8군은 서남부전선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알았고, 24일 대전에서 패퇴한 뒤 부대를 재편하고 있던 미24사단을 진주-함양-거창 축선에 긴급 투입했다. 육군본부도 25일 채병덕 소장을 영남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채 소장의 휘하에는 예하 부대가 없었다.

적6사단이 하동을 점령한 뒤, 미 24사단 19연대에 배속돼 있던 '29연대 3대대'가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반격에 나섰지만 부대 병력의 60% 이상이 손실을 보는 등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이때 미군 부대를 안내하기 위해 동행했던 채 소장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적6사단은 29일 오전 부산 방면으로 정면공격을 감행했고, 미군은 적의 우세한 전력에 밀려 진주를 빼앗기고 마산방면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게 된다. 이후 미군은 당초 다부동 지역에 투입할 예정이었던 25사단과 미 본토에서 증원된 해병5연대를 서부전선에 긴급 투입해 적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게 된다.

적6사단이 마산방어선을 뚫고 부산으로 진격하는데 성공했다면, 김일성이 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