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석씨의 '돕고 도움받은' 사연
중공군 대대본부로 쓰던 우리 집에 국군 숨겨줬더니
"곧 전투 벌어진다"고 귀띔… 우리 가족 폭격 피하게해줘
1951년 1월 내 고향,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장지동을 중공군이 점령했다. 우리 집엔 서울에서 온 피란민 6명을 합쳐, 12명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와 큰형이 뒷산에 숨자마자, 중공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곳을 대대본부로 쓰겠다"며 사랑방과 건넌방을 차지했고, 우리는 안방으로 쫓겨났다.어느 날 밤, 국군 한 명이 몰래 우리 집으로 숨어들었다. 자신을 박 중사라고 소개한 그는 "중공군이 있는 여기가 제일 안전할 것 같다"며 숨겨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벌벌 떨기만 했고, 서울서 피란 온 아주머니가 "다락방으로 올라가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음 날 국군 패잔병이 동네로 잠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중공군이 집집마다 이 쑤시듯 수색을 했다. 그러나 대대장이 있는 우리 집에는 오지 않았다. 박 중사는 이후에도 밖에 나오지 못하고 다락에 숨어만 있었다. 밥은 내가 올려다 주었다.
그가 어느 날 우리 어머니를 부르더니 2~3일 내에 동네가 전쟁터가 될 테니 빨리 떠나 있으라고 했다. 먼 곳에서 '쿵쿵'하는 포 소리가 가까워지고 저녁마다 정찰기가 돌아다니면서 조명탄을 떨어뜨리고 삐라를 뿌렸다. 박 중사는 "전투를 많이 해 본 내가 잘 안다. 나를 믿으라"며 우리 가족을 강하게 재촉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따랐다.
이틀 뒤 우리 동네는 새벽부터 쌕쌕이 제트기가 날아와 폭탄을 퍼붓더니, 미군 탱크 50여대가 밀고 들어와 전투가 벌어졌다. 나중에 돌아와 본 우리 집은 처참했다. 폭격으로 초가집은 무너져 내렸고, 집 안 구석에까지 포탄 파편이 수북했다. 만약 집을 떠나 있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지금도 "그때 다락방 손님이 우리 가족을 살렸다"고 말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