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치열한 전투 속 불난 외삼촌 집 도우러 갔던 누나 서울 수복 하루전 포탄에

namsarang 2010. 4. 20. 22:51

[나와 6·25]

치열한 전투 속 불난 외삼촌 집 도우러 갔던 누나 서울 수복 하루 전 포탄 파편 맞고…

 [23] 조이성씨 '결혼 직전 하늘나라로 간 누나'

  조이성(서울 강북구)

 

나는 6남 2녀 중 일곱째로 1950년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서울 명동에 살던 우리 가족은 3부자(父子)가 군인으로, 동네에서 '3부자 국군(國軍) 집'으로 소문났다. 아버지는 대위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했고, 둘째 형님은 소위로 옹진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셋째 형님도 해군 부사관으로 경남 진해 해군기지에서 복무했다. 그런 우리 집에 국군이 한 명 더 늘어날 예정이었다. 집안에서 셋째이자 하나뿐인 누나가 존경하는 아버지처럼 군인인 양모 중위와 1년간 교제 끝에 1950년 7월 20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스물다섯살이던 누나는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현 연세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 의무실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다. 누나는 165㎝ 정도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외모로 호텔에 머물던 교포들로부터 "결혼해 하와이로 함께 가자"는 권유를 받을 정도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누나는 상당한 엘리트였지만, 내겐 그저 동생들을 끔찍이 챙기던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만삭인 형수를 돌보는 어머니를 대신해 바쁜 와중에도 동생들 숙제를 도와주고, 밥을 챙겨주는 것은 늘 누나였다. 6·25전쟁이 발발해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놓이자, 우리 집은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특히 아버지와 형들이 국군이라는 이유로 누나가 인민군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하루는 정치보위부원과 내무서원들이 집에 찾아와 누나를 방송국으로 끌고 갔다. 정치보위부원은 "전선에 인민군 간호병으로 차출해 보내겠다"는 등 협박을 했다. 그에 못 이겨 누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서울 가족은 김일성 장군님의 보살핌으로 잘살고 있으니 아버지, 오빠, 동생도 조선 인민군에 귀순해서 함께 행복하게 살아요"라는 귀순 권유방송을 두 차례나 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9월 28일은 서울이 국군에 수복(收復)된 기쁜 날이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게는 지금까지 슬픈 날로 기억되고 있다. 서울 수복 하루 전 시내에서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외삼촌이 살고 있던 서울 오장동 중부시장에 큰불이 났다. 화마(火魔)와 전장(戰場)의 공포 속에서 세간을 하나라도 더 끌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외삼촌을 돕기 위해 어머니와 누나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다가오는 불길과 포탄을 피해 정신없이 일을 하던 누나가 어느 순간 움직이지 않았다. 외삼촌이 아무리 불러도 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나의 가슴에는 손바닥만 한 파편이 박혔고, 그 속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사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당시 국군 대위였던 조씨의 아버지와 소위였던 둘째 형, 해군 부사관이었던 셋째 형의 모습. /조이성씨 제공
교전이 한창인 그때 어머니와 외삼촌은 누나의 시신을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 우리 가족은 주위가 잠잠해진 틈에 누나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도착한 그곳에서 우리는 누나의 시신이 불타는 모습을 봤다. 2층 목조 건물이 불에 타 무너지면서 건물더미가 누나의 시신을 덮쳐 버린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결국 우리 가족은 누나의 시신을 옮기지 못한 채 불타고 있는 누나의 시신 위에 나무판자 등을 올려놓고 누나를 화장(火葬)했다. 화장 후 남은 누나의 뼈를 하나하나 손으로 닦아서 단지에 고이 담았다.

누나는 불이 난 외삼촌 집으로 달려가기 전에 어머니에게 갑자기 "허리가 시큰하다"고 했다. 이때 누나가 임신 6개월이라는 사실은 어머니와 누나, 누나와 결혼하기로 했던 양 중위만 알고 있었다. 결혼식이 예정돼 있던 7월이 지나고 누나의 배도 불러왔지만, 어린 나와 형제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10월 초 북진(北進)하고 있던 양 중위는 특별휴가를 받아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이때까지 양 중위는 자신의 아내가 될 줄 알고 있던 누나가 하늘로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누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양 중위는 한걸음에 서울로 왔다고 했다. 하지만 누나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양 중위는 넋이 나가 버린 것 같았고, 비통함에 젖어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다시 전선(戰線)으로 돌아가는 양 중위에게 어머니는 누나의 뼈가 담긴 단지와 누나가 입었던 피에 물든 옷을 안겨 주었다. "여보게, 이 단지 속에는 자네를 애타게 기다리던 내 딸과 뱃속에 들어 있던 자네 아기의 영혼이 들어 있다네. 딸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 어미로서 자네에게 한없이 미안하다네." 양 중위는 시간이 흐른 후 중령으로 진급해 고맙게도 한 번 더 우리 집에 들러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날 또 한 번 우리 집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때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감정이 복받쳐 올랐고, 슬픔은 커져만 갔다. 결혼한 뒤 아내가 첫째와 둘째 아들을 낳자, 임신한 채로 생을 마감한 누나 생각에 가슴이 너무나 저렸다. 매년 누나가 죽은 추석 무렵이 다가오면 일흔이 된 지금도 눈물이 솟아난다.

어른이 된 나는 군인인 아버지와 형님들처럼 사회에 봉사하고, 혼란스러운 사회 질서를 바로잡겠다며 1962년 경찰에 투신해 36년간 근무하고 경위를 끝으로 정년퇴임 했다. 전쟁의 참상을 알지 못하는 후배 경찰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처참했던 전쟁 상황을 얘기했고, 의외로 신세대 부하들은 금세 숙연해졌다. 그럴 땐 "누나, 누나의 죽음은 헛된 게 아니네요"라고 맘 속으로 외치곤 했다. 누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평생 노력했고, 지난 1995년에는 청룡봉사상을 받는 영광도 누렸다.
 

내가 숨쉬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 

육군 52사단 현역 장병들 '나와 6·25' 주인공들에게 감사편지
"내 자신이 부끄러워"… "분대원 모두에 읽어줘"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본지가 연재 중인 '나와 6·25' 기사를 읽고 육군 제52사단 장병들이 사연의 주인공들 앞으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썼다. 신세대 장병들은 "내가 발 딛고 숨 쉬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다"며 "선배님들의 숭고한 피와 땀이 있었기에 저와 제 가족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감사와 경의를 표했다.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님께〈3월 11일자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난 날'〉

"이 글을 읽지 못했다면 저는 전역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는 평범한 군인으로 남았을 겁니다. 17살에 나이를 속여 가면서까지 적과 싸우기 위해 입대하신 당신의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군생활을 해야 할지 몸소 보여주신 장관님께 보답하기 위해 군인다운 군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12연대 본부중대 일병 김윤송)

김은숙 할머니께〈3월 10일자 '1·4후퇴 때 낳은 아들, 결국 급성폐렴으로…'〉

"할머니의 글을 저희 분대원 모두에게 읽어줬습니다.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전쟁·피란·희생·총소리…. 그 숙연함의 정체는 아마도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이었을 겁니다. 군인의 임무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지만 막상 전쟁을 떠올리면 저와는 무관한 일인 듯 느껴집니다. 실제로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병사의 무지와 오만,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무책임한 기대와 편견 때문이겠지요. 감사합니다. 가슴 아픈 사연을 적어주신 할머니의 용기는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저희 철없는 병사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정비근무대 병장 한광섭)

신군식 선배님께〈3월 17일자 '난 인민군 소위였다'〉

"선배님의 글을 읽고 제 군생활을 돌아보고 반성하게 됐습니다. 남한으로 귀순한 후 민간인으로 살 수도 있었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전방에서 공산당을 몰아내겠다'고 쓰신 부분을 읽고 현재 군 복무 중인 우리 장병들에게도 이런 의지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보다 강한 국방력을 지닌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목숨 바쳐 지켜내신 대한민국을 철통같이 지키겠습니다. 충성!" (215연대 병장 김종원)

영원한 전우 코트니씨께〈3월 9일자 '캐나다 병사 코트니씨의 참전기'〉

"당신이 지켜낸 대한민국은 전쟁의 상흔을 단기간 내에 극복했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 만나보지도 못한 이들'의 자유를 수호해주고자 참전한 당신의 희생과 용기가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라 확신합니다. '내일 당장 한국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58년 전의 선택을 반복할 것'이라는 당신의 고결한 의지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210연대 대위 최성배)

김차순 할머니께〈3월 15일자 '그때 내 고향 무장은 살인 지옥이었다'〉

"'나와 6·25'를 애독하고 있는 장병입니다. 특히 할머니의 사연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봤던 충격…. 그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과 할머니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공산당의 무자비함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습니다. 그 아픈 역사가 있었기에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는 것이겠지요. 6·25전쟁 때 선배 전우들과 우리 국민들이 흘린 피와 땀이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기동대대 일병 정원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