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딸·아내를 北에 두고온 새아버지의 그 노래 어찌나 구슬펐던지…
이군자(67·경남 거제시)
◆꿈에 본 내 고향7살에 고향 황해도 봉산군에서 6·25를 맞았다. B29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이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폭격을 맞은 마을은 아비규환이 됐고, 부모님 손을 잡고 남쪽을 향해 떠났다.
- 이군자(67·경남 거제시)
어머니와 나는 천신만고 끝에 부산에 내려왔다. 어머니는 여자 혼자 몸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이웃엔 평안도에서 내려온 아저씨 한 분이 살았다. 그분은 나만한 딸과 아내를 이북에 두고 홀몸으로 내려온 처지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어머니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인 그 아저씨와 새 가정을 꾸렸다. 나는 갑자기 성(姓)이 장씨에서 이씨로 바뀌었고, 엄마와 새아버지 사이에서 5명의 동생이 생겼다.
사춘기에 난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새아버지는 고향의 딸을 생각하며 나를 감싸안으려고 했지만, 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동시에 모녀를 사지(死地)에 남기고 떠나버린 생부(生父)가 한없이 미웠다.
새아버지는 자그마한 양복점을 했고, 엄마는 누비 이불을 만드는 게 생업이었다. 노래를 곧잘 했던 나는 성악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상 꿈을 접어야 했다. 좌절에 빠져 지내던 어느날 새아버지가 부산MBC 성우(聲優) 모집 공고를 내밀고 "요거라도 해보라우"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성악 공부를 못 시켜준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든 대안을 찾아주려 애썼던 것이다. 새아버지 덕분에 젊은 시절 성우로 활동했고, 안정을 찾았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보니 그제서야 새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거제시 여성합창단 단장이 되어 뒤늦게나마 노래의 꿈을 이룬 것도 새아버지가 친딸처럼 키워준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1999년, 2002년 저세상 사람이 됐다. 생부는 생사를 모르지만 살아계실 것 같지 않다. 새아버지는 술을 거나하게 드시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며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곤 하셨다. 생전에 이 노래를 구슬피 부르던 새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새아버지도 생부도 모두 나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