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임스 그룬디
[17] '시신 처리팀'이었던 영국군 제임스 그룬디
전선에서 전사 소식 오면 한반도 어디든 달려가
시신 부산으로 모셔와… 온전한 시신 드물어…
특히 어린 아이 보면 너무 고통스러워…
저는 영국 맨체스터에 사는 제임스 그룬디라는 사람입니다. 올해 79세입니다. 지금부터 한국전쟁에서 '조금 특별한 임무'를 맡았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부모님을 일찍 여읜 저는 1949년 10월 군대에 갔습니다.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이듬해 정식 군인이 됐을 때였지요. 우리 부대에 한국전에 참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1951년 3월 초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무척 추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해 7월까지는 부산 일대를 순찰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았죠. 젖 먹이는 젊은 여성들과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습니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8월이 되어 부대에서 비밀리에 '시신 처리팀(Recovery Team)'을 가동한다고 했습니다. 원하는 병사는 손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저는 어떤 힘에 이끌렸는지 몰라도 손을 들었습니다. 그땐 동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신 처리팀'은 5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전선에서 영국군 병사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으면 한반도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전사자를 묻고 철모를 올려놓거나 작은 푯말을 꽂아 놓은 지점을 찾았습니다. 그 밑을 파내면 천에 둘둘 말아놓은 전우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더러는 미처 묻지도 못한 시신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천을 걷어내고 시신을 관에 담았습니다. 그러곤 기차에 싣고 부산으로 가져와서 UN기념공원에 묻었습니다. 그들을 옮기면서 어느 한 순간도 정성을 들이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 ▲ 1951년 5월 30일(미국 메모리얼 데이) UN군이 부산 대연동 UN기념공원에서 전사 자를 추모하고 있는 장면. UN군 사령부는 1951년 UN군 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해 UN기념공원을 조성했으며, 현재 11개국 2300여명이 안장돼 있다.
저의 슬픈 임무는 전쟁이 끝나갈 때인 1953년 6월까지 22개월간 매일 계속됐습니다. 하루도 끔찍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온전한 시신이 드물었습니다. 미군 전사자들은 본국으로 후송됐지만, 영국군 전사자들은 대부분 UN기념공원에 묻혔습니다.
영국군 시신을 추리다 보면 한국군 시신이나 민간인 시신도 함께 발견되게 마련입니다. 그런 시신은 근처 시·군청에 갖다줬습니다. 군인들이야 할 일을 하다 죽었다고 칩시다. 굶어죽은 시신이나, 특히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큰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시신 거두는 일을 했던 군인이 있다는 거 모르실 겁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절대 임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한국전이 끝난 이후 저는 일본에서 2년간 더 주둔했고, 영국에 돌아와 1961년 전역했습니다. 이후엔 경찰관을 했고, 차(茶) 제조업체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저의 기억은 대부분 한국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직도 고통에 시달립니다. 끔찍한 각 장면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렇습니다. 아마 전방에 나가 싸운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부산 UN기념공원에는 885명의 영국군 병사가 묻혀 있습니다. 그중 상당수를 제 손으로 묻었습니다. 저는 1988년부터 매해 UN데이(10월 24일)에 맞춰 부산에 날아가 UN기념공원을 둘러봅니다. 묻혀 있는 친구들에게 잘 있었느냐며 인사를 합니다. 묘비도 쓰다듬어 줍니다. 그러면 그들도 반갑다고 인사하는 것 같습니다. 저와 그들 사이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합니다.
저는 척추암을 얻어 오랜 기간 투병했습니다. 또 연금에 의지해 생활합니다. 부산에 오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의 가족이고 나의 친구인 전우들을 만나러 먼 길을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죽은 전우들은 20대였고, 결혼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죠. 누가 나서지 않으면 계속 무명용사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얼굴이라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참전용사 가족들이 보는 소식지에 광고를 내서 전우들 사진을 모으고 있지요. 그동안 130명 정도의 사진을 모아서 UN기념공원으로 보냈습니다. UN기념공원에서는 3년 전부터 제가 보낸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감사할 줄 알고 예의 바릅니다. 그들을 좋아합니다. 가끔 맨체스터 시내에서 쇼핑 나온 박지성 선수와 마주칩니다. 수줍어서 말을 걸어보진 못했지만 저는 그의 팬입니다. 사실 생활비만 해결된다면 부산에 와서 UN기념공원 근처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늘 전우들과 함께 할 수 있겠죠.
6·25전쟁이 6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한국에 두 번 갈 계획입니다. 6월 UN기념공원 내 영국군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매년 그랬던 것처럼 10월에 또 가려고 합니다.
제 아내는 2008년 세상을 떴습니다. 7명의 형제자매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가족이라곤 손녀 둘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부산에 수백 명의 전우 가족이 있어 마냥 외로운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더 하기 어렵네요. 떠올리기만 해도 숨쉬기조차 어려운 기억들입니다. 저를 이해해주시겠죠? 조금 특별한 일을 했지만,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제가 묻어준 전우들이 바로 영웅들입니다.
● 그때 그 장면
"중공군은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 미군의 경고 팻말
- ▲ 1951년 7월 27일, 중공군과 대치 중이던 미 보병 25사단 27연대 3대대 대원들이“
-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며 경고하는 내용의 팻말을 중국어와 영어로 세운 뒤
- 이를 바라보고 있다. /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