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부산 UN공원의 영국군 병사들… 그들의 시신을 내 손으로 묻었다

namsarang 2010. 4. 7. 22:47

[나와 6·25]

부산 UN공원의 영국군 병사들… 그들의 시신을 내 손으로 묻었다

 

 

             ▲ 제임스 그룬디

[17] '시신 처리팀'이었던 영국군 제임스 그룬디


전선에서 전사 소식 오면 한반도 어디든 달려가
시신 부산으로 모셔와… 온전한 시신 드물어…
특히 어린 아이 보면 너무 고통스러워…

저는 영국 맨체스터에 사는 제임스 그룬디라는 사람입니다. 올해 79세입니다. 지금부터 한국전쟁에서 '조금 특별한 임무'를 맡았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저는 1949년 10월 군대에 갔습니다.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이듬해 정식 군인이 됐을 때였지요. 우리 부대에 한국전에 참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1951년 3월 초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무척 추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해 7월까지는 부산 일대를 순찰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았죠. 젖 먹이는 젊은 여성들과 고아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습니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8월이 되어 부대에서 비밀리에 '시신 처리팀(Recovery Team)'을 가동한다고 했습니다. 원하는 병사는 손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저는 어떤 힘에 이끌렸는지 몰라도 손을 들었습니다. 그땐 동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신 처리팀'은 5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전선에서 영국군 병사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으면 한반도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전사자를 묻고 철모를 올려놓거나 작은 푯말을 꽂아 놓은 지점을 찾았습니다. 그 밑을 파내면 천에 둘둘 말아놓은 전우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더러는 미처 묻지도 못한 시신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천을 걷어내고 시신을 관에 담았습니다. 그러곤 기차에 싣고 부산으로 가져와서 UN기념공원에 묻었습니다. 그들을 옮기면서 어느 한 순간도 정성을 들이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1951년 5월 30일(미국 메모리얼 데이) UN군이 부산 대연동 UN기념공원에서 전사 자를 추모하고 있는 장면. UN군 사령부는 1951년 UN군 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해 UN기념공원을 조성했으며, 현재 11개국 2300여명이 안장돼 있다.

저의 슬픈 임무는 전쟁이 끝나갈 때인 1953년 6월까지 22개월간 매일 계속됐습니다. 하루도 끔찍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온전한 시신이 드물었습니다. 미군 전사자들은 본국으로 후송됐지만, 영국군 전사자들은 대부분 UN기념공원에 묻혔습니다.

영국군 시신을 추리다 보면 한국군 시신이나 민간인 시신도 함께 발견되게 마련입니다. 그런 시신은 근처 시·군청에 갖다줬습니다. 군인들이야 할 일을 하다 죽었다고 칩시다. 굶어죽은 시신이나, 특히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의 큰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시신 거두는 일을 했던 군인이 있다는 거 모르실 겁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절대 임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한국전이 끝난 이후 저는 일본에서 2년간 더 주둔했고, 영국에 돌아와 1961년 전역했습니다. 이후엔 경찰관을 했고, 차(茶) 제조업체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저의 기억은 대부분 한국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직도 고통에 시달립니다. 끔찍한 각 장면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렇습니다. 아마 전방에 나가 싸운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부산 UN기념공원에는 885명의 영국군 병사가 묻혀 있습니다. 그중 상당수를 제 손으로 묻었습니다. 저는 1988년부터 매해 UN데이(10월 24일)에 맞춰 부산에 날아가 UN기념공원을 둘러봅니다. 묻혀 있는 친구들에게 잘 있었느냐며 인사를 합니다. 묘비도 쓰다듬어 줍니다. 그러면 그들도 반갑다고 인사하는 것 같습니다. 저와 그들 사이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존재합니다.

저는 척추암을 얻어 오랜 기간 투병했습니다. 또 연금에 의지해 생활합니다. 부산에 오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의 가족이고 나의 친구인 전우들을 만나러 먼 길을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죽은 전우들은 20대였고, 결혼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죠. 누가 나서지 않으면 계속 무명용사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얼굴이라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참전용사 가족들이 보는 소식지에 광고를 내서 전우들 사진을 모으고 있지요. 그동안 130명 정도의 사진을 모아서 UN기념공원으로 보냈습니다. UN기념공원에서는 3년 전부터 제가 보낸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감사할 줄 알고 예의 바릅니다. 그들을 좋아합니다. 가끔 맨체스터 시내에서 쇼핑 나온 박지성 선수와 마주칩니다. 수줍어서 말을 걸어보진 못했지만 저는 그의 팬입니다. 사실 생활비만 해결된다면 부산에 와서 UN기념공원 근처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 늘 전우들과 함께 할 수 있겠죠.

6·25전쟁이 6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한국에 두 번 갈 계획입니다. 6월 UN기념공원 내 영국군 참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고, 매년 그랬던 것처럼 10월에 또 가려고 합니다.

제 아내는 2008년 세상을 떴습니다. 7명의 형제자매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가족이라곤 손녀 둘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부산에 수백 명의 전우 가족이 있어 마냥 외로운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더 하기 어렵네요. 떠올리기만 해도 숨쉬기조차 어려운 기억들입니다. 저를 이해해주시겠죠? 조금 특별한 일을 했지만,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제가 묻어준 전우들이 바로 영웅들입니다.

 

● 그때 그 장면
"중공군은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 미군의 경고 팻말

                   1951년 7월 27일, 중공군과 대치 중이던 미 보병 25사단 27연대 3대대 대원들이“
                        더 이상 넘어오지 말라”며 경고하는 내용의 팻말을 중국어와 영어로 세운 뒤
                        이를 바라보고 있다. /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집안 곳곳에 자식들 몰래 돈다발 숨겨놓으셨는데…

 

홍순옥씨 '구두쇠 내 아버지'

내가 야간대학 다닐 때 등록금도 안 대주시더니
돌아가시기 전에야 돈다발 얘기해줘…
北에 두고온 아들·딸 위해 악착같이 모았다고

시장 골목길에 순댓국을 끓이는 큰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면, 한 많던 친정아버지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연백입니다. 아버지는 아들, 딸을 두고 내 사촌오빠와 단둘이 월남했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할아버지는 아들인 우리 아버지와 장손인 사촌오빠만 잠깐 남쪽에 내려가 있으라고 했대요. 조용해지면 돌아오라고 하셨답니다. 그땐 이렇게 한 많은 세월이 될 줄 아무도 몰랐지요.

아버지는 남한에서 새 가정을 이뤄 딸만 넷 낳았습니다. 딸, 딸, 쌍둥이 딸…. 우리 어머니마저도 일찍 병으로 잃고 20년 동안 홀로 딸들을 키우셨지요. 술 한잔 기울일 때마다 아버지는 네 자매에게 노래를 시켰습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당신은 저의 노래를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곤 했습니다. 가끔 노래 부르기 싫어서 자는 척을 해도, 아버지는 기어이 깨워서 노래를 부르게 하셨어요.

명절이면 꼭 저만 데리고 판문점에 가셨습니다. 서울 신당동 집에서 버스를 여러 차례 갈아타야 했습니다. 판문점에서 아버지는 꼼짝도 하지 않고 북쪽 땅을 하염없이 쳐다보셨습니다. 철없던 저는 빨리 집에 가자고 졸랐습니다. 찬바람이 불어 얼굴이 딱딱해져도 눈물이 고인 채 판문점에 외로이 서 계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부지런하셨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구두쇠였습니다. 우리집 가훈은 '한푼에 웃으면, 한푼에 운다'입니다. '줄 돈은 최대한 늦게, 받을 돈은 최대한 빨리'가 아버지 철학이었어요. 돈을 쉽게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학교 등록금은 2기분을 내지 않았는데도 3기분이 나왔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항상 내 이름을 부르곤 했지요. 아르바이트하며 야간대학을 다닐 때도 등록금은커녕 차비 한 번 안 주셨습니다.

중환자실에 일곱 번 입원을 반복하시던 아버지가 세 번째 병원에 들어가셨을 때였어요. 당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재산을 정리하시겠다는 거예요. "숨겨둔 돈이 있다." 아버지 말을 듣고 방바닥 장판 밑을 뜯었습니다. 몇겹이고 신문지에 싸둔 지폐가 수두룩하게 나왔습니다. 화분 안에는 까만 비닐로 둘둘 만 금덩어리가 있더군요. "냉장고도 열어봐라. 냉동실 고깃덩어리에 칼집 내서 돈 넣어뒀다." 은행을 믿지 못한 아버지는 평생 그렇게 돈을 보관했습니다.

적지 않은 돈이 집안 구석구석에서 나왔습니다. 그 돈을 은행에 넣어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정신이 들면 "돈 가져오라"며 저를 부르시는 겁니다. 통장을 보여드려도, 수표를 끊어와도 못 믿겠다며 난리를 치셨습니다. 결국 청원경찰을 대동해서 현금 다발로 찾아와 병실에 차곡차곡 쌓아놓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돈다발을 쳐다보던 아버지의 그 모습…. 호스 대여섯 개를 꽂은 몸으로 눈물만 흘리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들한테 너무 야박했구나. 이북의 자식들을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그 아이들에게 속죄를 해야지, 그러려고 악착같이 모았는데…."

야채장사를 했던 아버지는 늘 빈 속으로 새벽시장에 나가셨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댓국 한 그릇만 먹으면 배가 볼록 일어날 것 같았답니다. 하지만 돈이 아까워 차가운 막걸리로 대신 배를 채우셨다고…. 병상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일흔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 따끈한 순댓국 한 그릇 드시지 그러셨어요. 아버지 산소에 세운 낮은 비석에는 우리 네 자매 이름과 이북의 오빠, 언니 이름을 함께 넣었습니다. 아버지! 통일되면 오빠, 언니 꼭 찾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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