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안희수 명예교수 '목숨 두번 구해준 아버지의 태극기'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전투기가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가
개성서 우익 단체에 뭇매 맞을때도 짐 속의 태극기 덕분에 풀려나
고향인 평남 안주에서 나는 부모님과 누나, 두 동생까지 여섯이서 살았다. 1948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집 형편이 급격히 기울었고, 아버지는 밥이라도 얻어 먹이려 두 동생을 친척집에 맡겼다. 1·4 후퇴에 따라 다들 고향을 등지던 1951년 1월 아버지, 누나와 셋이서만 평양까지 내려왔다.
피란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대동강 다리를 일주일 넘게 못 건너고 있던 중, 갑자기 인파에 떠밀려 아버지와 나만 다리를 건너게 됐다. 평양에 남은 누나와 생이별을 하게 됐고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아버지와 단둘이 황해도 사리원 근교의 눈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고요하게 눈이 내려 잠시 전쟁의 시름을 잊은 듯했지만 널찍한 벌판 한가운데를 걷다 보니 불안감이 밀려왔다. 공격을 받으면 숨을 곳이 없어서였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멀리 능선 너머로 미군 전투기 네 대가 나타났다. 동체에 달린 기관총이 우리를 향해 불을 뿜었다. 총격 소리가 귀를 찢는 순간 우리 부자(父子)는 길옆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다급하게 머리를 눈바닥에 틀어박았다. 당시엔 인민군들이 피란민 복장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미군 전투기들은 피란민들을 자주 공격했다.
- ▲ 안희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서울 대학동(옛 신림9동) 자택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온
- 태극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기관총 소리가 잦아들기에 살며시 고개를 드는 순간, 전투기 한 대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총알이 땅에 박히며 일어나는 눈가루가 팍팍팍 흩날렸다. '이젠 더 못 버티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는 방금 전 총격을 받은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순간 아버지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생각났다는 듯이, 그리고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더니 륙색(rucksack·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태극기였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잘 보이도록 태극기를 펼쳐놓고 내 손목을 억세게 잡아당겼다. 아버지는 "뒤돌아보지 마라"며 성큼성큼 나를 끌고 당당하게 걸었다. 그때 전투기 한 대가 바로 뒤에서 우리 쪽으로 급강하하고 있었다. 조종사가 나를 조준하고 있다는 느낌이 온몸으로 전달됐다. 길고 두려운 순간,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투기는 기관총을 쏘지 않고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앞으로 사라졌다.
멍했지만 살았다는 환희를 느꼈다. 그 전투기가 왜 그냥 지나쳤는지 알 수는 없다. 태극기를 발견해서일까, 총알이 다 떨어져서일까. 아버지와 나는 태극기가 우리 목숨을 구했다고 믿는다. 아버지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기약 없이 집을 떠나면서도 태극기를 챙겼다는 사실이 지금도 놀랍다.
큰 고비를 넘긴 후 개성 근처까지 내려왔다. 작은 빈방을 얻어 오랜만에 불도 때고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횃불을 든 장정 여럿이 방문을 와락 열고 다짜고짜 아버지를 끌어냈다. 대한청년단이라는 단체 소속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은 아버지를 구둣발로 차고 몽둥이와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개성은 해방 후 38선 이남 지역이었고, 우리 부자는 이북에서 피란 왔으니 의심받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무조건 살려달라고 사정했고, 나는 아버지한테 매달려 울부짖었다. 그들은 내가 쓴 인민군 모자가 "어디서 났는지 대라"며 내 뺨을 후려쳤다.
어디론가 끌려가 총살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륙색을 탈탈 털어 내용물을 꺼내보다가 밑바닥에 곱게 접어둔 태극기를 발견했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아버지와 나를 놓아주고 돌아갔다. 태극기가 우리 부자를 또 한 번 살려준 것이다.
이후로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가는 길 내내 아버지는 태극기를 고이 간직하셨다.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화물트럭 짐짝 위에서 태극기를 나뭇가지에 매어 휘날리며 부자가 통쾌하게 웃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일흔이 다 되도록 나는 태극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찡하다. 국경일이면 도로 곳곳에 내걸린 태극기를 젊은이들이 무심코 지나치지만, 나는 생사의 기로에서 목숨을 구해준 태극기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더불어 1977년 회갑의 나이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피란길에서 칭얼대는 나를 꼭 끌어안아 주시던 아버지의 품이 그립다.
아버지는 설날이며 추석에 차례를 지낼 때마다, 누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며 울곤 하셨다. 하루빨리 이북의 누나와 동생들을 만나 아버지의 한(恨)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리고 싶다. 그래야 태극기가 연장시켜 준 내 인생을 뜻깊게 마무리할 수 있다.
● 그때 그 장면
대나무창 든 여학생 戰士들
- ▲ 6·25 전쟁이 터지자 학생들도 전선에 뛰어들었다. 사진은 전쟁 발발 직후, 나라를 지키겠다고
- 모여든 여학생들이 대나무창을 들고 비장하게 서 있는 모습. / 유엔한국참전국협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