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19]구절구절이 내 사연…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노래들

namsarang 2010. 4. 9. 22:49

[나와 6·25]

[19]구절구절이 내 사연…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노래들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딸·아내를 北에 두고온 새아버지의 그 노래 어찌나 구슬펐던지…

이군자(67·경남 거제시)

꿈에 본 내 고향

7살에 고향 황해도 봉산군에서 6·25를 맞았다. B29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이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폭격을 맞은 마을은 아비규환이 됐고, 부모님 손을 잡고 남쪽을 향해 떠났다.

               이군자(67·경남 거제시)
임진강에 살짝 못 미쳐 큰아버지 동네 사람을 만났다. 그분은 큰아버지댁에 계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미처 떠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부모님을 모셔 오겠다"며 황급히 되돌아갔다. 아버지와는 그렇게 영영 헤어졌다.

어머니와 나는 천신만고 끝에 부산에 내려왔다. 어머니는 여자 혼자 몸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이웃엔 평안도에서 내려온 아저씨 한 분이 살았다. 그분은 나만한 딸과 아내를 이북에 두고 홀몸으로 내려온 처지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어머니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인 그 아저씨와 새 가정을 꾸렸다. 나는 갑자기 성(姓)이 장씨에서 이씨로 바뀌었고, 엄마와 새아버지 사이에서 5명의 동생이 생겼다.

사춘기에 난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새아버지는 고향의 딸을 생각하며 나를 감싸안으려고 했지만, 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동시에 모녀를 사지(死地)에 남기고 떠나버린 생부(生父)가 한없이 미웠다.

새아버지는 자그마한 양복점을 했고, 엄마는 누비 이불을 만드는 게 생업이었다. 노래를 곧잘 했던 나는 성악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상 꿈을 접어야 했다. 좌절에 빠져 지내던 어느날 새아버지가 부산MBC 성우(聲優) 모집 공고를 내밀고 "요거라도 해보라우"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성악 공부를 못 시켜준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든 대안을 찾아주려 애썼던 것이다. 새아버지 덕분에 젊은 시절 성우로 활동했고, 안정을 찾았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보니 그제서야 새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거제시 여성합창단 단장이 되어 뒤늦게나마 노래의 꿈을 이룬 것도 새아버지가 친딸처럼 키워준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1999년, 2002년 저세상 사람이 됐다. 생부는 생사를 모르지만 살아계실 것 같지 않다. 새아버지는 술을 거나하게 드시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라며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곤 하셨다. 생전에 이 노래를 구슬피 부르던 새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새아버지도 생부도 모두 나의 아버지다.
 
 

철사줄로 꼭꼭 묶여 끌려가신 작은 외할아버지

  • 김자영(34·서울 강서구)
             김자영(34·서울 강서구)
단장의 미아리고개

올해 아흔넷인 외할머니는 6·25 때 돌아가신 작은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또 한다. "똑똑한 시동생이었어. 학생회장이었고 학도호국단장도 했어. 그래서 인민군 놈들은 가만히 둘 수 없다고 했어." 인민군은 철사로 작은 외할아버지의 손을 묶어 끌고가 대전형무소에 가뒀고, 나중에 형무소 안 우물에서 시신이 발견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나는 TV에서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나오면 귀가 번쩍 뜨인다.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노랫말이 작은 외할아버지 이야기와 어쩜 그리 똑같을까.

언젠가 '단장(斷腸)'의 뜻이 궁금해 어머니한테 물어봤다. 창자가 끊어지도록 괴로운 것이라고 답하셨다. 나는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자란 세대지만, 우리 가족이 바로 '단장의 미아리고개'와 같은 비극을 겪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론 어른들의 삶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나는 노래방에 가면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르며 가슴 저릿하게 노랫말의 의미를 되짚는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친구들은 내가 웃기려고 부르는 줄 알고 웃어대서 참 안타깝다.
 
 
 

예비신랑 戰場 보내고 시댁서 부르던 노래…

 

문경옥(80·경남 사천시)

 

 

 

             문경옥(80·경남 사천시)

진주라 천리길

전쟁이 터진 이듬해 한 국군 부대가 우리 마을(강원도 양양군 내곡리) 뒷산에 주둔했다. 그 부대의 강 중위라는 수색대장이 언제부터인가 나를 색시감으로 점찍어 놓고 우리집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를 거부했다. 그러나 읍내에서 식당을 하던 이모가 강 중위와 친해지더니 만나볼 것을 적극 권유했다. 우리 둘은 백년가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우린 헤어져야 했다. 남편 부대가 갑자기 다른 전선으로 이동했고, 나는 홀로 경남 사천의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고향에서 천리(千里)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 시집살이는 고됐다. 2~3달에 한통씩 오는 남편의 편지로 타향살이의 설움을 모두 떨칠 수는 없었다.

나는 양양이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든고…"하며 노래를 불렀다. 넷째 도련님이 하모니카로 반주를 붙여주면 가락은 더 구슬프게 울려퍼졌다. 우리 부부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일흔이 넘도록 내 곁을 지켜준 내 남편 '강 중위'는 5년 전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대동강아 잘 있느냐" 부엌에서 우시던 어머니

김대식(57·경북 포항시)

 

 

        김대식(57·경북 포항시)
한 많은 대동강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동네 아낙들이 찾아오면 구수한 황해도 사투리로 고향 사리원에서 피란 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손님들이 돌아가면 어머니는 멍하게 북쪽 하늘을 한참 쳐다봤다. 그러고선 나한테 노래를 시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대식아, 그거 한번 불러 보라우. 한 많은 대동강." 그때(1950년대 후반) 유행하던 노래였다.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내가 곡조를 읊조리는 사이 어머니는 아궁이불에 장작 대신 청솔가지를 넣었다. 노래가 끝날 때쯤 청솔가지가 타면서 매캐한 연기가 났고, 부엌에서 나온 어머니 눈가는 붉게 젖었다. 어머니는 고향이 그리워 흘린 눈물을 마치 매운 연기 때문에 나오는 것처럼 감추려 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위장술'을 나는 어른이 된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노래방에 가서 '한 많은 대동강'을 틀어놓기만 하고 곡이 끝날 때까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생전의 어머니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심정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직접 부르게 해드리고 싶었다. 반주가 끝나고 정적이 찾아들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