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20] 중공군 포로로 있던 영국군 병사 데릭 키니씨… 악몽의 2년 4개월

namsarang 2010. 4. 14. 21:27

[나와 6·25]

[20] 중공군 포로로 있던 영국군 병사 데릭 키니씨… 악몽의 2년 4개월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석남준 기자 namjun@chosun.com

안준용 기자 jahny@chosun.com

한수연 기자 sue@chosun.com 

중공군, 날 총검으로 찌르고 81일간 나무상자에 감금

데릭 키니(79)

 


형이 사리원서 전사하자 형과의 약속 지키려 참전
임진강 부근서 적에 포위… 격렬히 싸우다 퇴각중 생포
쥐 들끓는 동굴에서 알몸으로 한달 갇혀있기도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 4개국 참전 용사와 가족 200여명이 12일 방한했다. 이번 방한단은 19일까지 가평과 글로스터 밸리 등 영연방군 격전지를 방문해 추모 행사에 참석한다. 또 국립현충원과 전쟁기념관, 부산 유엔기념공원, 판문점 등을 방문할 계획이다. 본지는 이번에 방한한 참전 용사 중 영국인 데릭 키니와 윌리엄 스피크먼을 만나 그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어린 시절 우리 형제의 우애는 유별났다. 나보다 3살 많은 형은 아버지처럼 의젓했고, 나는 그런 형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형은 어릴 때부터 군인이 꿈이었다. 내가 열여섯 되던 해 우린 반지를 나눠 끼면서 약속했다. 형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되면 꼭 내가 나가서 대신 싸워주기로…. 그 철없는 약속은 오랫동안 날 아프게 했다. 불길한 그 약속 때문에 형이 죽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 10월 17일. 한국전에 참전했던 형이 황해도 사리원에서 전사했다는 연락이 왔다. 스물두살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던 우리 형…. 사망 소식을 듣는 순간 어린 시절의 약속이 떠올랐다. 또 형을 죽인 놈들에게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타올랐다. 나는 한국전 참전을 자원했고, 1951년 1월 일본을 거쳐 부산항에 도착했다. 낡은 부두에서 비쩍 마른 아이들이 몰려와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 먹을 것을 주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어 마음이 아팠다. 내 나이 스무살. 젊었기 때문에 두려움도 없었다. 빨리 중공군을 격퇴하고 사리원까지 밀고 올라가 형의 시신을 찾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951년 4월 22일 데릭 키니씨가 속한 왕립 노섬벌랜드 퓨질리어스 연대가 임진강 인근 방어 진지로 이동하는 모습. / 영국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4월 22일 내가 속한 영국 제29보병여단 왕립 노섬벌랜드 퓨질리어스 연대가 경기도 임진강 근처 방어 진지로 이동했다. 연합군은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속절없이 후퇴를 거듭했다. 우리의 임무는 임진강으로 향하는 길목을 사수해 중공군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날 밤 중공군의 공격은 거셌다. 중공군 병력은 후방 257고지를 맡고 있던 Z중대와 152고지를 담당하던 X중대를 공격했다. 격렬한 전투가 80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이들 고지가 중공군에 점령당하자 우리 Y중대에도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25일 부상병들을 엠뷸런스에 실어 나르는데 문득 내 배낭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지 위에 두고 온 것이다. 칠면조 고기를 넣은 샌드위치가 그 안에 있는데…. 가방을 가지러 갔다 왔더니 모두 철수하고 없었다. 나는 쏟아지는 적 포탄을 피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의정부로 가는 길목에서 중공군에게 생포됐다.

수용소 생활은 끔찍했다. 나는 두 번이나 탈출했지만 곧 다시 붙잡혔고 그때마다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중공군들은 내 태도가 거만하다며 마구 때리고 수갑을 채운 채 천장에 매달았다. 총검으로 찌르고 벨트를 휘두르고 발로 차기도 했다. 반중(反中) 감정을 가진 포로를 밀고하라고 심문을 하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24시간 올가미를 씌워놓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온 몸을 순식간에 조이는 고문 기구였다.

1952년 7월 27일 두 번째 탈출했다가 붙잡혔을 때는 81일 동안 나무 상자에 감금돼 있었다. 몸 하나 겨우 들어가는 상자였는데, 아침저녁으로 통조림 하나와 소금, 물만 넣어줬다. 한 번은 중공군 지휘관이 개머리판으로 나를 때리다 소총이 발사돼 그 자리에서 숨진 일도 있었다. 이 일로 나는 중공군들에게 끌려 다니면서 매를 맞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쥐들이 들끓는 동굴에서 한 달 동안 갇혀 있었다. 끔찍한 고문은 1953년 8월 10일 판문점에서 포로 교환으로 송환되는 날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2년4개월의 포로 기간 동안 7개의 감금시설을 오가면서도 한 번도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포로 교환으로 풀려난 직후 일본에 가서 탈장 수술을 받았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후유증 때문에 여러 번 재발해 10년 동안 6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1954년에는 영국 왕실에서 주는 조지 십자 훈장을 받았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영국에 돌아간 후 세탁기 임대사업을 하면서 아내를 만났고 캐나다에서 결혼했다. 전쟁의 참상은 어느덧 잊힌 듯했다. 하지만 마흔살 때 용접일을 하다 학교 건물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과거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수용소에서의 고문이 떠올랐고, 좁은 상자에 갇힌 일들이 생각나 불안감에 몸을 떨기도 했다. 정신병원에 6주 동안 입원했고, 퇴원 후에도 한동안 통원 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누군가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리면 깜짝깜짝 놀란다. 어두운 건물에 들어가면 악취가 나는 느낌이 들고,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중국 식당에 들어가면 무언가 다가오는 것 같아 무섭다. 가끔 정신이 멍해질 때도 있다. 그러면 사랑하는 아내가 면도도 해주고 밥 수발도 들어준다. 지금 우리 부부는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살고 있다. 딸과 아들, 4명의 손자·손녀들은 내가 한국전 참전 용사라는 사실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이번에 한국에 함께 온 두 손자들은 "할아버지처럼 멋진 군인이 되는 게 소원"이란다. 피터(16)는 전투기 조종사가, 데릭(18)은 해군이 되는 게 꿈이다.

10년 전 전쟁이 끝나고 처음 한국 땅을 밟은 후 두 번째로 한국에 왔다. 올 때마다 눈부시게 발전을 해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한국이 우리의 참전을 통해서, 우리 형의 죽음을 거름으로 해서 이만큼 성장을 이뤘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한국은 내게 제2의 조국이다.

빛나는 젊음 한때를 바친 전쟁이지만, 한 번도 참전을 후회한 적이 없다. 귀국해서도 한동안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중공군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용서하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만 여전히 형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마음이 아플 뿐…. 10년 전 방한 때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가서 형의 이름이 적힌 위령탑을 봤다. 이제라도 형의 시신을 찾을 수 있다면, 형이 묻혀 있는 사리원 땅이라도 밟을 수 있다면…. 그 생각을 하니 또 눈물이 고인다.

 

 

중공군에 포위된 217고지서 수류탄 던지며 지켜내다 어깨·다리에 포탄 맞아

내게 6·25전쟁은 특별한 전쟁이다. 군인이 되고 참여한 첫 전쟁이었고, 이 전쟁으로 영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께 직접 받았다. 영국 정부는 내 이름을 따서 맨체스터시의 건물과 다리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평생 가슴 속에 남아있던 이곳을 60년이 지난 이제야 다시 찾았다. 이렇게 훌륭하게 재건되다니…. 참전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 한국에 깊이 감사한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모두 군인 집안이다. 어릴 때부터 '군인' 외에 다른 직업을 택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18살이던 1945년 8월에 군에 입대했고, 6년 뒤인 1951년 왕립 스코틀랜드연대 제1대대 소속 이등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우리 부대는 8월쯤 부산항에 도착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한반도는 참혹했다. 녹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통 파괴돼 있었다. 여기저기 총탄 파편이 떨어져 있었고 불에 탄 시체가 나뒹굴었다. 중공군은 어른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어린아이들까지 마구 쏴죽였다. 선량한 남한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11월 4일 임진강에서 싸우던 우리 부대는 1000여명의 중공군에게 수적으로 밀려 포위당했다. 적은 계속해서 폭격과 수류탄 공격을 퍼부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217'이라 불리던 산이었다. 적군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고, 수많은 전우들이 죽어나갔다. 아수라장 속에서 장교들의 지휘체계도 무너졌다. 하지만 이대로 공산당에 당해 죽을 순 없었다. 주변에 있는 6명의 전우들을 불러 최대한 많은 수류탄을 긁어모았다.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적들도 자동소총에 박격포까지 쏘아가며 맞대응했다.

격렬한 전투는 4시간 동안 10~12차례 일어났다. 나는 그 과정에서 왼쪽 어깨와 왼쪽 다리에 포탄을 맞았다. 순간적으로 뼈를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지만 부상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다친 다리를 감싸안고 계속 수류탄 공격을 독려했다. 피를 흘리면서도 공격을 주도하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상관이 "빨리 치료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급하게 부상 부위를 붕대로 감고는 다시 수류탄을 던지며 고지를 지켰다. 우리가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사이 사단 병력은 방어선을 유지하면서 후퇴할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 직후 나는 일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고, 두달간 치료를 받았다. 이후 다시 복귀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참전했고, 곧바로 공군특수부대(SAS·Special Air Services)원으로 말레이시아 내전에 참가했다.

인도네시아·아덴 등 여러 지역 전쟁에 나갔지만 한국을 가장 잊지 못했다. 착하고 예의 바른 한국 사람들이 좋았다. 서로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217' 산에 있을 때 지게에 먹을거리를 한가득 지고 올라와 우리에게 줬던 노무부대 5~6명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한국의 꽃' 무궁화도 한국인을 닮아 정말 아름답다. 영국 체셔(Cheshire)의 집으로 돌아가기 전 셔츠 주머니에 무궁화 한 송이를 꼭 꽂고 가련다.
 

영국군 참전 5만8000명

참전국 중 두번째 규모

영국은 유엔 참전국 중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병력을 파병했다. 주한 영국대사관은 "5만8000명이 참전해 1109명이 전사했고 2674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말했다. 포로가 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도 1060명에 이른다. 영국군에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를 모두 합치면 9만4000여명이 참전해 1750명이 전사했다. 현재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는 885명 의 영국군이 잠들어 있다.

영국이 전쟁 기간 중 파병한 지상군은 2개 여단 규모였다. 이 중 제27여단은 1950년 8월 28일 부산에 도착해 낙동강 방어작전에 참전했으며, 제29여단은 1950년 11월 18일 부산에 도착했다.

영국군은 1950년 10월 29~30일 정주전투, 1950년 11월 4~6일 박천전투, 1951년 1월 2~3일 고양전투, 1951년 4월 22~25일 적성(설마리)전투, 1951년 4월 23~24일 가평전투 등에서 싸웠다.

제29여단이 임진강에서 치른 적성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 때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 맞서 사흘간 방어전을 치러 유엔군이 무사히 후퇴하도록 도왔고, 이후 유엔군은 서울 사수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투를 치르는 동안 29여단 병력의 4분의 1이 희생됐다. 이 전투를 기념해 1957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영국군 참전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