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인민군 "걷기 힘든 사람 모이라우"하더니 갑자기 총질을…

namsarang 2010. 4. 6. 19:44

[나와 6·25]

인민군 "걷기 힘든 사람 모이라우"하더니 갑자기 총질을…

 

[16] 박명자씨 '지옥으로 끌려가던 의사와 간호사들'

  • 박명자(78세·서울 도봉구)
 ▲ 박명자(78세·서울 도봉구)

걸어서 이천 지날때 날 구해주려던 신부·수녀님 인민군에 발각돼 총살당해
압록강 수수밭에서 목숨 건 탈출 겨우 성공

그해, 난 서울대 의과대학 부설 간호학교(현 서울대 간호학과) 학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있는데 밖이 시끄러웠다. 전쟁이 났다 했다. 바로 그날 밤부터 서울대병원에 차로 실려온 부상병을 돌보기 시작했다. 밀려든 환자들로 병실은 물론 복도와 바닥까지 가득찼다.

사흘쯤 지났을까. 인민군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병원 경비를 서던 국군들은 몰살됐다고 했다. 그들은 모든 병실을 샅샅이 뒤지며 국군 환자들을 찾아 쏴 죽였다. 내가 돌보던 강동원 대위는 복부 총상으로 수술을 받았고 위독한 상태였다. 그냥 놔둬도 죽을 강 대위를 인민군은 '탕, 탕' 두 발 쐈다. 강 대위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죽는 걸 봤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인민군은 지하실이나 침대 밑에 숨은 국군을 모두 찾아내 병원 모퉁이로 끌고가 총살시켰다. 인민군들은 의사며 간호사들이 밖에 못 나가도록 병원을 빙 둘러 보초를 세웠다. 친구 한 명은 탈출하려고 담을 뛰어넘다 척추를 다쳐 결국 죽었다.

날 구해주려던 수녀님도 총살당해

7월 들어 인민군은 후방에 36육군병원이라는 군 병원을 만든다고 했다. 의사와 간호사 수십명을 북으로 끌고 간다고 했고, 나도 포함됐다. 청량리역에서 탄 기차는 북으로 달렸다. 열차 몇 칸에는 인민군 부상병이 가득찼다. 철원까지 왔을 때 미군의 집중폭격을 받아 인민군 환자들은 대부분 폭사했다.

철원부터 걸어야 했다. 강원도 이천군에 갔을 때다. 민가에서 밥을 얻어먹었다. 38선 넘어가서 처음 보는 밥에 너무 좋아 성호를 그었다. 그 장면을 본 수녀님 한 분이 나를 밖으로 불렀다. "천주교 신자 맞지. 강제로 끌려왔구나. 서울로 보내줄게."

수녀님은 나만 몰래 데리고 어떤 기와집으로 데려갔다. 거긴 신부님도 한 분 계셨다. 하지만 우리의 뒤를 밟은 인민군 병사가 있었다. 신부님과 수녀님은 끌려나와 총살당했다. 사람의 목숨이란 게 이렇게 허무한 것일까. 나는 의료인력이라는 이유로 총살을 면했지만, 심경애라는 언니와 손이 묶인 채 걸어가야 했다.

1956년 육군 간호장교(중위)에서 전역하고 서울대병원 간호사가 된 박명자씨(오른쪽) 모습. /박명자씨 제공

평안도 어디쯤 걷던 중이었다. 대장 격인 인민군이 외쳤다. "걷기가 어려워서 더 이상 못가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이쪽으로 모여 보라우. 달구지에 태워주갔어." 지팡이 짚은 노교수, 다쳐서 몸이 불편한 의사와 간호사들이 한편에 섰다. 그러자 인민군은 갑자기 그 무리를 향해 총질을 해댔고 순식간에 10명 넘게 몰살당했다. 알고보니 식량이 부족하다며 입을 줄이려고 저지른 만행이었다. 중간에 제대로 못 걸으면 쏴 죽였다. 우린 언제나 굶주려 있었다. 운좋게 길가의 배추를 발견하면 뿌리째 뽑아 먹었다. 인민군들은 소가 보이면 머리에 총을 쐈고, 피가 질질 흐르는 고기를 주며 먹으라고 했다.

탈출해서 집에 왔더니 이번엔 아버지가…

9월이었던 것 같다.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근접했다. 깜깜한 그믐날 밤 수수밭을 지나가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볼 일 보고 와도 좋다고 하자, 심경애 언니한테 "따라가도 죽고 도망가도 죽는데 그냥 도망가자"고 했다. 무조건 뛰었다. 방향도 몰랐다. 눈에 보이는 수수밭을 헤치고 중간에 숨었다.

인민군들이 우리를 찾으려고 대검으로 여기저기를 찔러대기 시작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대검은 나와 심경애 언니를 살짝 피해갔다. 숨도 안 쉬고 몇십분을 버텼다. "손이 묶인 것들이라 멀리 못 갔을 거다. 그냥 가자."

남쪽 방향으로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바로 다음날이었다.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인민군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뛰어오는 걸 봤다. 황급히 근처 민가에 들어가서 아궁이 안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 집 아궁이는 사람이 들어가고 남을 정도로 컸다. 인민군은 집안 구석구석을 칼로 찔러보더니 아궁이에 불을 질렀다. 뜨거운 연기가 올라와 얼굴이 익는 듯 했지만 참아야 했다. 인민군은 돌아갔지만, 얼굴이 부은 나는 눈이 붙어버려 한동안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었다.

평양 가까이 내려왔을 때였던가. 길에 널려 있는 인민군 시체를 뒤져 포도당 가루라는 비상 식량을 꺼내 먹었다. 고픈 배 때문에 허겁지겁 가루를 먹으니 뻑뻑해서 숨이 막혔다. 죽을 것 같아 주변에 있는 액체를 떠 마셨다. 찬찬히 보니 그건 옆에 있는 시신에서 흘러나온 핏물이었다.

평양에 내려와서 국군 군악대 행렬을 만났다. 현 소령님이라고 명동성당에서 합창단 지휘하던 분이 보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반가워 쫓아갔다. 현 소령님이 도와줘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죽은 줄 알았던 딸이 나타났다며 나를 껴안았다. 하지만 이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너희 아버지가, 아버지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납북된 지 얼마 안돼 아버지마저도 인민군이 끌고가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딸이 납북됐다가 살아 돌아오니 아버지가 납북된 것이다. 세이코 시계를 수입하는 아버지는 금전 여유가 있었는데 그것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 증세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와 함께 끌려가다 탈출했다는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분은 아버지가 굶다가 길에서 객사하셨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식으로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에는 꼭 살아계시겠지.

집에 돌아온 이후의 나머지 삶은 덤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간호학교를 그만두고 육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해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했다. 군에서 나온 뒤 젊은 시절엔 나병환자촌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고, 1980년대 이후엔 임종환자 돕는 일을 했다. 1991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수여하는 나이팅게일 기장(記章)을 받아 간호사로선 큰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전쟁은 나의 정신세계를 더없는 황폐감으로 얼룩지게 했다. 그리고 따뜻한 손길로 나를 쓰다듬어주시던 아버지를 빼앗아갔다. 그 끔찍한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됐는데도 내 꿈속에 그날들이 가끔씩 되살아온다.

 

 

"어차피 다 죽는 판이니 이쯤해서 편히 가게 하세요" 삼촌이 갓 태어난 나를 버리라고 하자 어머니는…

  • 신현호(59세·서울 노원구)

 

신현호씨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던 나는…'
열차 피란길에 부모들이 피눈물 머금고 아기들을 낙동강 철교서 버렸다고…

사랑하는 딸들아. 아빠가 태어날 때 이야기를 해보마.

1951년 1·4후퇴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었어.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는 부산에 출장 가 있었고, 스무살이던 큰형은 군대에 갔어.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나머지 자식 다섯과 시동생네 두 가족을 데리고 피란길을 떠났지.

1월 15일 운 좋게 수원역에서 열차에 올랐어.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 1월 21일 대전역에 도착했대. 진통이 시작된 우리 어머니. "부산 가서 몸을 풀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당황하신 거야. 장남 노릇을 하던 둘째 형(당시 17세)이 역 근처 허름한 빈집을 발견했고, 어머니는 한밤중에 그곳에서 나를 낳았어.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쏟아질 무렵, 확성기에서 열차가 곧 다시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울려퍼졌대. 어머니는 몸조리는커녕 갓 태어난 나를 안고 역으로 걸어야 했어. 그때 어머니는 온몸이 부어서 신발이 안 들어가니까 신발 등쪽을 가위로 째서 신은 다음에 새끼줄로 발을 칭칭 감고 걸었대.

며칠 후 낙동강 철교를 건너는데, 열차 안 여기저기서 뭔가 강으로 휙휙 떨어지더래. 그게 뭔지 아니? 어린아이들이었대. 어른도 죽을 판이니까 정들기 전에 이쯤 해서 너도 편안히 가거라, 이런 식이었던 거야. 열살 전후의 제법 큰 아이들도 떨어뜨렸고, 어떤 아이들은 안 떨어지려고 바동대는데도 마구 밀어버리더란다. 광란은 몇 분간 이어졌어.

그때 막내 작은아버지도 나를 빼앗아 던지려 했단다. "이놈 버려요! 형수부터 살아야 할 것 아니에요!" 산후중독으로 몸이 퉁퉁 붓고 머리카락이 다 빠진 어머니는 "죽어도 함께 죽을 거야"라고 소리쳤대. 그러다 열차는 철교를 건넜고, 부산에 도착했지.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가 나를 보고 "이놈은 누구냐" 하시더래. 그러니까 어머니가 "당신 막내자식이오. 죽은 놈 살아온 줄 아시오"라고 했다나. 그때 이미 마흔살이었던 어머니는 이후로 1월만 되면 출산중독 비슷한 증상에 시달리다 1968년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재수복한 다음에야 출생신고를 했어. 내 호적에는 이렇게 쓰여 있단다. '1951년 1월 22일생. 대전시 소제동 번지미상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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