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중대원 60%를 잃은 적근산 전투,넋 잃고 멍하니 총구를 내 가슴에 댄 순간

namsarang 2010. 3. 27. 23:36

[나와 6·25]

중대원 60%를 잃은 적근산 전투… 넋을 잃고 멍하니 총구를 내 가슴에 댄 순간…

  • 이공록(80세·서울 서대문구)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김강한 기자 kimstrong@chosun.cm

송원형 기자 swhyung@chosun.com

신수연 기자 syshin@chosun.com

⑮이공록씨 '중대장의 고뇌'


휴전 직전 고지 뺏기 처절, 적 포탄에 직격당한 부중대장은 형체도 없이…
장교 신분도 잊은채 그 자리서 울음 터뜨려

평북 강계가 고향인 나는 1947년 혼자 월남했다. 아버지는 "장남인 너만이라도 꼭 남쪽으로 가라"며 내 등을 떠미셨다. 그때가 부모님과 여동생을 본 마지막이었다.

1950년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 정규과정으로 바뀌면서 생도를 모집했다. 장교가 될 수 있다면…. 상상만 해도 멋졌다. 6월 1일, 2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을 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입교한 지 24일만에 전쟁이 터졌다. 그날로 경기도 포천 전투에 투입됐다. 사람들은 생도들로만 구성된 우리 대대를 '육사생도대대'라고 불렀다. 포천 지역은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집중 배치해 쳐들어왔다. 우리는 남쪽으로 계속 밀렸다. 태릉·광나루·수원·포항 전투…. 전투가 계속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해 8월 살아남은 생도들이 부산 동래에 모였다. 이미 86명이 전사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우리는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됐고, 9주 훈련을 마친 뒤 다시 전선에 투입됐다.

1953년 휴전 직후에 찍은 이공록씨 모습. / 이공록씨 제공
1953년 7월. 내 생애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 회담이 막바지에 이르자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나는 보병 제11사단 20연대 제9중대장으로, 중부전선 금성지구 격전지 적근산 전투에 투입됐다.

13시간 철야 행군 끝에 도착하니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주먹밥 하나로 허기를 달래고 밤잠을 청했으나 포성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목표는 중공군이 장악한 602고지였다. 한여름 폭염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앞에도 뒤에도 용맹한 부하들은 거침없이 내달렸다. 적이 던지는 수류탄을 되집어 던지며 돌격했다.

하지만 완강한 적의 저항에 아군 피해만 늘었다. 적 포탄 한 발에 우리 병사 2~3명씩 쓰러졌다. 내 눈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지는 부하들을 보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 병사의 왼쪽 어깨를 관통한 총알이 오른쪽 겨드랑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 병사가 몸을 질질 끌고 와 내 앞에서 휙 쓰러졌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헬리콥터가 있으니 조금만 참아라"고 거짓말했다. 그게 그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줄 수 있기 바라며….

1차 공격에 실패한 뒤, 야간 공격을 하기로 했다. 남은 중대원을 세보니 장교는 나와 부중대장인 이순택 중위뿐이고, 병사는 90명에 불과했다. 소대장 4명을 포함해 7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이다.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소리쳤다. "이제 우리 중대는 중대장 없이 제1소대는 내가, 제2소대는 이 중위가 지휘한다. 기필코 602고지를 점령하자."

또다시 피 튀기는 전투가 시작됐다. 나와 부중대장은 각각 단독으로 공격해 정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 돌격대가 1시간 만에 목표를 점령했다. 대대장에게 목표 점령을 보고하고 증원 부대를 요청했다. 그런데 목표를 점령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이 중위가 보이지 않았다. 무전기로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수소문했더니, 공격 도중 적 포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나는 넋을 잃었다. 장교 신분도 잊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남은 대원은 60명이었다. 중대 병력의 3분의 2가 희생됐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모두 얼빠진 사람처럼 축 늘어져 산 송장 같았다. 이렇게 많은 부하를 희생시키고 혼자 살아남았다니…. 차라리 적의 포탄이 내 몸에 덮쳐 주었으면 좋겠다.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욕심도 없어졌다.

나는 총을 집어 들었다. 총구를 왼쪽 가슴에 대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그 순간, 지쳐 늘어져 있던 병사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을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생사를 함께 하자고 약속한 내 전우들 아닌가. 벌떡 일어났다. 그 병사 어깨에 손을 얹고 "잘 싸웠다! 어디 다친 데는 없나?" 하고 말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그도 나와 거의 같은 또래다. 내 나이 스물셋. 병사들 중엔 나와 나이가 같거나 2~3살 위인 사람도 많았다.

27일 아침, 예측할 수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됐다. 오늘도 죽고 죽이는 포격전이 계속되겠지. 그때 통신병이 전화라며 달려왔다. 새로운 명령일 거라 생각했는데 부드러운 대대장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10시를 기해 모든 사격을 중지하라는 상부의 지시다." 휴전이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전쟁 직후 나는 금성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삶과 죽음을 같이했던 내 부하, 내 전우들 때문이었을까.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는데도 난 군복을 벗을 수 없었다. 1969년 월남전에 파병돼 1년 2개월간 싸운 뒤, 귀국과 함께 중령으로 예편했다. 우리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전쟁 때 육사를 제대로 마치지 못해 40년 넘게 졸업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6년 입교 46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포천에는 전쟁 때 죽은 동기생 86명의 참전비가 있다. 죽은 그들과 살아남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행복했던 생도 시절이 있었다. 단 24일뿐이었던.
 
 
 

피란 떠났던 막내 오빠가 왜 다시 집에 돌아왔는지…

  • 이명애(72세ㆍ경기도 고양시)

날아든 총알에 오빠 잃은 이명애씨

6·25 때 우리 집은 서울 원효로 2가에 있었다. 난 교동국민학교 6학년생이었고 어머니, 세 오빠와 살았다.

1950년 12월 중순쯤 숨어 살던 큰오빠와 작은오빠가 먼저 부산으로 갔고, 이듬해 1월 초 어머니, 나, 막내 오빠는 영등포역에서 화물기차 위에 올라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기차는 오래가지 못했다. 연료가 없는지 고장이 났는지 기차는 안양에서 멈췄다. 우리는 근처 빈집에 잠시 묵기로 했다. 그 집엔 김치와 깍두기 등이 남아 있었다. 우리에 이어 서울에서 혼자 온 아줌마와 기차에서 떨어져 다친 여자, 북한에서 내려왔다는 가족 등이 방 2개짜리 집에서 함께 살았다.

남자 4명은 왼쪽부터 차례로 둘째 오빠, 막내 오빠, 작은어머니의 남동생, 큰 오빠. 가운데 짧은 머리 소녀가 이명애씨. / 이명애씨 제공
집 앞을 지나가던 군인들은 곧 중공군이 올 테니 빨리 떠나라고 했다. 어머니는 막내 오빠에게 "먼저 부산에 가서 형을 찾아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해가 질 무렵 막내 오빠가 다시 돌아왔다. 어머니와 나를 두고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고 했다.

얼마 후 유엔군과 중공군이 대단하게 전투를 벌였다. 집안으로도 총알이 파고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총알이 이마를 스쳐 피가 났다. 그런데 어머니와 막내 오빠가 안 보였다. 잠시 후, 어머니가 배꼽 바로 아래 총을 맞은 오빠를 방에서 끌고 나오셨다. 우리는 오빠를 수레에 싣고 바깥으로 나갔다. 유엔군을 만났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다음날 어머니는 혼자 수레를 끌고 수원방향으로 갔다. 밤늦게 돌아온 어머니는 "국군 병원을 찾았지만 군인 환자들이 넘쳐 돌봐줄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그사이 수레 위에 있던 오빠는 싸늘한 주검이 됐다. 어머니는 밤새 주무시지 못했다. 나는 오빠 곁에 누웠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같이 있던 피란민들이 방에 오빠를 누이고 흰 천으로 덮었다. 관을 구할 수 없어 폭격으로 부서진 집 대문을 뜯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일꾼들은 땅이 얼어 파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어머니는 삽을 들고 직접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내 손을 잡고 오빠 무덤에 가서 통곡하셨다. 봄이 오자 우린 부산으로 내려갔고 수소문 끝에 두 오빠를 만났다. 잘생긴 막내 오빠는 용산중학교 축구선수였다. 그날 왜 오빠가 다시 돌아왔는지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오빠가 처음 묻혔던 자리엔 지금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 그때 그 장면 상이용사 위한 모금활동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1952년 1월 28일 경북 지역의 한국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이 전투에서 부상한 국군 장병들을 위해 모금활동을 벌이는 모습.
 
 
 

[미니 戰史] [7] 유엔군의 참전

  •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전쟁 발발 채 하루도 안돼 유례없이 빠르게 안보리 소집… 27일 군사지원 결의문 채택

1950년 6월 25일 오전 11시 26분(한국시각) 미 국무부 러스크 차관보 책상 위에는 한국에서 발송된 전화통지문 한 통이 올라왔다. 무초 주한 미 대사가 보낸 긴급 보고서였다. 보고서엔 '오전 4시 북한이 남한을 기습 공격. 양상으로 볼 때 전면공격임에 틀림없음. 이미 개성은 점령됐음'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미국과 유엔 지도자들의 신속한 대응은 지금까지도 거의 유례를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채 두 시간도 안 돼 주말 휴가 중이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미국은 유엔대사를 통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했다. 이어 전쟁 발발 20여시간 만에 안보리는 북한에 '침략행위 즉각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해 모였다. 현지시각 일요일 오후 2시였다.

북한군 남침 행위가 멈추지 않자, 안보리는 27일 유엔 회원국가들에게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권고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당시 59개 유엔 회원국가 중 이 결의문을 지지한 나라는 53개국이었다.

국제사회의 발 빠른 대응은 국제환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당시 유엔 안보리는 5개 상임이사국과 6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돼 있었다. 상임이사국은 미국과 영국·프랑스·소련·자유중국(지금의 대만) 등이었는데, 소련은 그해 1월부터 자유중국 대신 중공을 상임이사국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보리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이 때문에 안보리는 소련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미국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선 해군과 공군에 '38도선 이남 지역 군사목표에 대해 작전'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문산과 의정부 등 서울 이북지역에 대한 폭격이 시작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또 30일에는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 보고서를 토대로 미 지상군 작전을 명령했고, 38도선 이북 지역에 대한 해·공군 작전도 허락했다.

미국이 적극적인 한반도 방어에 나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한국은 유엔의 지원과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로 북한의 불법 남침은 유엔의 권위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세계 평화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둘째는 당시 소련 공산세력의 엄청난 확장으로 국제사회 불안정성이 크게 훼손돼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다른 유엔 회원국들의 참전 제의가 잇따랐다.

7월 1일 미 제24사단 예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한반도에 도착해 5일에는 오산 전선에 투입됐다. 7월 8일에는 유엔군사령부 설치가 유엔에서 결의됐고 초대 사령관에 맥아더 원수가 임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