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터지고 특히 1·4 후퇴 때 수많은 연백 주민들이 작은 목선을 타고 월남, 강화에 정착했다. 지금도 교동도 주민 중에는 고향이 황해도인 경우가 적지 않다. 교동도에서 연백까지의 거리는 약 4㎞에 불과하다. 교동도 최북단에선 날씨가 좋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연백 땅이 보인다.
[나와 6·25]
식량 얻으러 가다 지뢰 밟아 돌아가신 아! 어머니… 어머니…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김강한 기자 kimstrong@chosun.com
송원형 기자 swhyung@chosun.com
신수연 기자 syshin@chosun.com
[13] 오운기씨 '내 고향 황해도 연백… 바다 건너 바로 저기가 어머니 묘소인데…'
51년 혼자 피란갔다가 집 뒷간 방공호에 숨어있던 아내와 두 아들 기적적으로 수원서 재회
지금은 북녘땅에 있을두 동생들 끌어안고 목놓아 울고 싶은데…
우리 일행은 고생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돈을 넉넉히 가져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밥은 굶기 일쑤였다. 자갈치 시장에서 삶은 물오징어 한 마리와 막걸리 한 대접으로 요기하면 그 값이 10전. 그렇게 먹으면 운 좋은 날이었다. 해운대에서 하루종일 화물을 나르고 밤에는 모래사장에 천막을 치고 잤다. 추워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나서 잘 수 없었고, 그렇다고 불을 안 피울 수도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면 또 일을 하러 나갔다.
석달간의 부산 생활을 끝내고 수원으로 피란처를 옮겼을 때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1952년 8월 어느 날, 꿈에 그리던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아부지…." 6살 큰아들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봤고, 3살짜리 둘째 아들은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아내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 ▲ 오운기씨가 경기도 용인 집에서 한장뿐인 어머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아내는 내륙으로 이주하면 나를 찾아가는 것이 힘들 거라는 판단에 이주 당일, 뒷간에 미리 파놓은 비밀 방공호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물 한 대접과 신문지 한 장을 들여보내 주고 이주민 대열에 합류해 떠났다. 아내는 비좁은 방공호에서 둘째를 안아 젖을 물리고 큰아들은 옆에 낀 채 일주일을 버텼다. 일주일 동안 세 식구가 먹은 것은 물 한 대접과 오이 2개뿐이었다. 둘째는 벽의 흙을 긁어먹고 신문지를 뜯어먹었다고 한다. 빈사 상태에서 기진맥진해졌을 무렵, 내륙으로 옮겨갔던 이주민들이 식량을 가지러 돌아왔다. 이때 돌아온 어머니는 방공호부터 찾았고, 아내와 아이들을 구한 후 서둘러 점심을 지어먹고 다시 떠났다. 방공호에서 탈출한 아내는 천신만고 끝에 교동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고, 수소문해서 내가 있는 수원으로 찾아온 것이다. 당시 교동도를 징검다리로 해서 많은 고향 사람이 강화·김포·인천·수원에 내려와 있었기 때문에 물어물어 내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수원 인계동에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피란 살림을 꾸렸다. 어느 날 19살 여동생이 5살 막내 남동생을 데리고 찾아왔다. 만남의 기쁨은 곧 생활고로 이어졌다. 좁은 단칸방은 여섯 식구가 지내기엔 너무 작았고 먹을 식량도 없었다. 고된 생활이 계속되자 동생들은 말도 없이 떠났다. 오빠에게 짐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 몰래 떠난 것이다. 동생들이 떠난 빈 공간을 보자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 아내는 펑펑 눈물을 쏟았고, 내 눈에서도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 ▲ 오운기씨 어머니
이후 집으로 돌아간 동생 남매는 부모님과 함께 교동도에 모여 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량을 가지러 연백 집에 다시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 어머니가 지뢰를 밟아 다리 하나가 잘린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간병했으나,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고생하시다 한달 만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교동도에 남아 있던 동생 둘도 고향에 돌아갔는데, 막내가 어머니에게 가자고 하도 울어서 남매가 매일 어머니 묘소를 찾았다고 한다. 동생들은 맨손으로 갈 수 없어 조약돌을 치마폭에 싸가지고 가서 "어머니, 돌떡을 가지고 와서 미안합니다. 나중에 쌀떡 갖고 다시 올게요" 하며 절을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나는 매일 밤 울었다. 통일이 되면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 묘소에 찾아가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빌고 싶었는데…. 이제 내 나이 구순(九旬)을 바라보게 됐으니 죽기 전에 그 희망을 이룰 수 있을지. 지금도 강화 교동도에 가면 어머니 묘지가 있는 황해도 연백 땅이 저 앞에 보이는데….
전쟁이 끝나고 연백은 북쪽 땅이 됐다. 동생들과 아버지 소식도 끊겼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겠지만, 동생들은 살아 있겠지. 그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 불효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때 어떻게 해서든 두 분을 모시고 나왔어야 했다. 금방 다시 만날 줄 알았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언젠가 동생들을 만나게 되면 그 옛날 함께 굶어 죽지 못한 내 죄를 빌고 싶다. 그리고 우리 삼남매 서로 끌어안고 목놓아 한번 울고 싶다.
연백, 강화와 하루 생활권… 6·25 이전엔 남한 땅
전쟁이 터지고 특히 1·4 후퇴 때 수많은 연백 주민들이 작은 목선을 타고 월남, 강화에 정착했다. 지금도 교동도 주민 중에는 고향이 황해도인 경우가 적지 않다. 교동도에서 연백까지의 거리는 약 4㎞에 불과하다. 교동도 최북단에선 날씨가 좋은 날이면 육안으로도 연백 땅이 보인다.
인도 야전병원 장병들
[미니 戰史]
[6] 북한군 최대 미스터리… 서울 점령 후 3일간 공세 멈춰
국군 전열 재정비 시간 벌어
북한군의 최대 '미스터리'는 이때 발생했다. 당시 소련 군사고문단장으로 있었던 라주바예프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한강 남쪽 강변을 강화할 기회를 주었다."
북한군은 왜 3일 동안 공세를 멈췄을까. 그 이유에 대한 해답은 완전하지 않다. 그동안 ▲서울 점령 북한군 3·4사단에 한강을 넘을 도하장비가 없었다 ▲춘천쪽에서 오는 2·12사단을 기다렸다 ▲일단 서울을 장악하면 남한 전체에서 인민 봉기가 일어나 스스로 붕괴할 것으로 예상했다 등의 분석이 있었다. 이런 요소들은 북한군 '3일 지체'의 진짜 원인의 전체일 수도 있고 부분일 수도 있다.
어쨌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우세를 확신했고 승리감에 도취해 우쭐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북한군 전차와 병력은 28일 오전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등 자신감을 내보였다. 여기에 북한군도 전쟁경험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이 주춤한 사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흩어진 병력은 삼삼오오 한강을 건너왔고, 주력부대들이 흩어진 지 10여 시간 만에 3개 사단으로 재편성됐다. 육군본부는 29일에는 양화대교에서 지금의 신사동 지역에 이르는 지역을 지키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홍일 소장)를 편성했다.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선 것은 서울을 점령한 지 6일 후인 7월 3일이었다. 서울 함락과 한강방어선 전투를 거치면서 국군은 전쟁방어개념을 '38선고수'에서 '지연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미군 지상군 선발대는 7월 1일 부산에 첫 상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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