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군번.총도 없던 우리… 근데 정말 열심히 싸웠어"

namsarang 2010. 3. 23. 18:37

[나와 6·25]

"군번.총도 없던 우리… 근데 정말 열심히 싸웠어"

 

[11]'다시모인 학도병' 춘천농공고 38·39회

개교 100주 맞아 참전기념비 새겨진 자기이름 만지며 눈물
"우리가 포거리 계산하면서 포 정확도 훨씬 높아졌지"

"야, 반갑다. 넌 졸업 이후 처음 보는 것 같다."

지난 19일 강원도 춘천시 춘천농공고등학교(옛 춘천농업학교) 교정. 서울에서 온 승합차에서 여든 안팎 노신사 5명이 내리자 그 주위를 10명의 동창들이 둘러쌌다. 얼싸안고 등 두드리고 악수하며 떠들썩하게 안부를 묻는 이들은 6·25전쟁 때 5·6학년이었던 이 학교 38·39회 졸업생들.

춘천농공고는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아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선배들의 이름을 모두 새겨넣은 기념비를 세웠다. 이 학교에선 38회 107명, 39회 49명, 40·41회 각 12명, 42·43회 각 1명 등 모두 182명이 참전했다. 이 중 살아 있는 사람은 60명 안팎. 이날 학교를 찾은 15명은 모두 기념비 뒷면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노병들의 눈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혀졌다.

19일 강원도 춘천시 춘천농공고(옛 춘천농업학교) 교정에 세워진 6㌈전쟁 참전기념비 앞에서 학도병으로 싸웠던 이 학교 38㌈«회 졸업생들이 옛일을 회상하고 있다. /이재호 기자 superjh@chosun.com

선생님들 죽었다는 소식에 비분강개

학교는 38선과 불과 10여㎞ 떨어져 있었다. 전쟁 이전에도 좌익들이 교사(校舍)를 불태우는가 하면(1947년), 무장 공비들이 인근 농가에 침투해 식량을 약탈하곤 했다. 학생들은 학교에 참호를 파고 보초를 서는 등 반공(反共)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전쟁이 터지면서 슬픈 소식들이 잇따랐다. 서울에서 열린 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 다녀오던 이규영 교장과 학무과 직원 등 11명이 경기도 마석고개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총살됐다고 했다. 또 교사 여러 명이 학교를 지키다 죽었다는 말도 들렸다. 인민군들은 학교를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했다. 학생들 가슴속에는 싸우겠다는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해 10월 춘천이 수복되자 뿔뿔이 흩어졌던 학생들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당시 체육교사 정봉득씨가 "북괴가 퇴각 중이다. 학도병으로 나가 싸우고 싶은 학생만 손들어봐"라고 했다. 한두명씩 손을 들더니 학교에 남아 있던 100명 남짓한 6학년생 대부분이 자원했다. 노병들은 "무서운 줄 몰랐지. 오로지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라고 말했다.

1951년 11월 10일 대구 육상 경기장에서 학도병들이 나무로 만든 총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전사한 친구 소식 차마 못 전해

학도병들은 교복 차림으로 전투에 나섰다. 군번도, 총기도 받지 못했지만 포탄, 주먹밥을 나르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았다. 6사단 포병부대에 배치된 황환민(80)씨는 온정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당했을 때를 떠올렸다. "학도병이라 총이 없어 참호 안에 엎드려 있는데 중공군 한 명이 대검으로 찌르는 거예요. 맨손으로 대검을 잡아 총을 빼앗아 던졌죠. 둘이 주먹질로 싸웠는데 그놈이 먼저 도망갔어요." 황씨는 2주간 혼자 이동해 부대 집결지인 평양에 도착했다. 부대에서는 학도병이 혼자 살아 돌아왔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군번을 부여받았고 충무무공훈장도 받았다.

다부동 전투에 참가한 이창기(80)씨는 "겨우 통성명한 학도병 친구들이 배치된 지 하루 이틀 만에 죽어나갔다"며 "옆에서 싸우는 동료 얼굴이 매일 바뀌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동오(79)씨는 60년 된 '마음의 빚'을 털어놨다. 그는 강원도 안변군 안변경찰서를 경비하고 있던 중 중공군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학도병 동료 20여명과 함께 출동했다. "그때 춘천중에 다니던 김유원이란 친구가 '내가 잡겠다'며 맨 앞에 나섰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어요. 춘천에 돌아와 유원이 어머니를 만났는데 차마 죽었다고 말을 못했어요. 군번을 못 받고 죽어서 지금도 그 가족들은 생사를 모를 거예요." 순간 김씨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죽기 전에 꼭 유원이 후손들을 만나 마지막 소식이라도 알려주고 싶은데…."

박성재(81)씨는 나중에 군대를 또 갔다. 대구에 피란갔다 배고픔을 면하려고 학도병에 자원했던 박씨는 2년간 9사단 수색중대에서 싸우고 1952년 6월에 춘천에 돌아왔다. 하지만 바로 다음달 징집영장이 나왔다. 박씨는 "그땐 그런 일이 적지 않았다"며 "두번째 입대했을 때는 간부 후보 시험에 응시해 18년간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전역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 유용하게 써먹어

국군엔 문맹(文盲)이거나 학교를 다니지 못한 병사가 많았다. 학도병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빛을 발휘했다. "새로 나온 무전기 설명서가 영어로 적혀 있어 쓰지도 못하고 있는 거야. 학도병이 가서 사용법을 알려줬지.(송대식·81)"

포병부대 출신들은 포탄 거리를 학도병이 계산하면서 정확도가 훨씬 높아졌다고 자랑했다. 반면 글을 못 읽던 국군 병사들이 "알면 얼마나 아냐"고 때리고 뭘 모르면 "배웠다는 놈들이 그것도 모르냐"고 때리기도 해 설움도 겪어야 했다.

노병들은 막국수와 막걸리로 점심식사를 하며 60년 전 무용담을 늘어놓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모임을 주선한 송진원(79) 예비역 준장(6·25참전유공자협회 사무총장)은 "6·25를 잘 모르는 후배들에겐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산 교육"이라며 "오래오래 살아 또 만나자"고 말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교 음악교사 출신 김광석(79)씨가 친구들로부터 가곡 '비목'을 불러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노래 가사 중 '이름 모를 비목'은 6·25 때 무명용사를 의미한다고 했다. 김씨는 "학도병 전사자들은 군번이 없어 대부분 '비목'이 됐다"고 말했다. 김씨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이라며 천천히 노래를 부르자 어느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당시 신의주 고교생의 사연

  • 이천호(80세·서울 강북구)

"北이 끌고간 내 동창 낙동강 전선서 다죽어"

 
전쟁이 나던 해 나는 북한 신의주의 한 고등학교에 다녔다. 학교측은 한 사람씩 교무실로 불러 입대를 권했는데, 한 사람도 희망자가 없었다. 강제 조치가 시작됐다. 전교생을 강당에 모이게 하더니 '입대지원서'를 쓰라고 했다. 글을 쓰기도 전에 밖에서 요란한 차 소리가 났다.

강당 문이 열리고 "빨리 차에 타라"는 고함이 들렸다. 차에 타면 전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나는 화장실로 잽싸게 도망갔다. 그 자리에서 많은 친구들이 강제로 끌려갔다. 얼마 후 나도 결국 인민군에 끌려가게 됐고, 중공군이 몰려오기 직전 포로가 됐다.

1953년 늦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한 동창을 만났다. 낙동강에서 배에 총상을 입은 그 친구는 정신을 잃고 하류로 떠내려가다 미군에게 구조됐다고 했다. 그를 통해 고등학교 동창들의 최후를 알게 됐다.

그때 끌려갔던 동창들은 모두 한 부대로 들어가 같은 대대로 편성됐다. 대대장, 중대장도 학생들 가운데서 뽑았다. 괴뢰군은 우리 학교 학생들을 낙동강 도하 작전에 선봉으로 세웠다. 동창들은 흐르는 낙동강에 깡그리 수장됐고 낙동강 물은 내 친구들 피로 물들었다. 이 비극을 내 고향, 내 학교 후배들은 알고 있을까.

 

 

 

故 손원일 제독 부인 홍은혜씨

  • 홍은혜(93세·서울 영등포구)·고 손원일 제독의 부인

 

 

부상병 치료돕고 모금도… 지금도 해군노래 읊조려

1950년 9월 12일 늦은 밤. 경남 진해 해군관사에 불쑥 남편이 나타났다. 얼룩무늬 전투복에 철모를 눌러쓴 차림. "여보,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며칠 못 들어올지 몰라. 아이들 데리고 잘 지내고 있어요." 미국에 전함을 구매하러 간 지 여러 달 만에, 그리고 6·25전쟁이 터진 이후 처음으로 집에 온 남편은 이 말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3일 후 남편은 연합군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인천 앞바다에 있었다.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故) 손원일 제독. 그가 바로 내 남편이다. 전쟁 중엔 남편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어쩌다 배 수리를 하러 부산에 올 때 새벽에 잠깐 들른 게 전부다. 하지만 군인의 아내로 살면서 각오했던 일이다. 남편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쳤고, 나는 그런 남편을 존경했다.

홍은혜씨가 서울 영등포구 자택에서 남편 손원일 제독과 자신의 옛 사진을 보여주며 전쟁 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나는 남편을 돕고 싶었다. 군인의 아내로서 뭘 할 수 있을까. "해군들이 전쟁터에서 직접 싸운다면, 우리 부인들은 전쟁에서 다친 이들을 도우면 되겠구나."

매주 수요일마다 해군병원을 찾아가 아픈 병사들의 이불·베개·옷 등을 빨고 중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았다. 병원은 부상자들로 넘쳐났다. 전쟁에서 팔을 잃은 사람, 눈 하나를 잃은 사람, 다리를 잃은 사람….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병원은 만원이고, 의사도 간호사도 없는 형편이었다. 환자의 썩어들어가는 다리에서 구더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해군부인회 회장이었던 나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돕기 위해 해군 부인들과 함께 모금활동도 벌였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쟁에서 상처 입은 환자를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늘 몸뻬(허드레 바지)만 입고 돌아다니는 내게 이승만 대통령은 '몸뻬 부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모두 어려운 피란민 처지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100원, 200원 정도 모으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아이디어를 냈다. 해군 부인들이 삯바느질을 해서 해군의 작업복을 만들겠다고 제안하니 남편도 흔쾌히 찬성했다. 남편의 지원으로 공장을 짓고 재봉틀 50대를 들여왔다. 해군부인회원들은 이 수입으로 장애를 가진 군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0년이 됐다. 내 나이 아흔셋. 요즘도 나는 울적해지면 해군 노래를 부른다. 특히 남편이 작사하고 내가 작곡한 '바다로 가자'는 우리 부부가 제일 좋아하는 군가다.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