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 〈특별취재팀〉
-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 김강한 기자 kimstrong@chosun.com
- 송원형 기자 swhyung@chosun.com
- 신수연 기자 syshin@chosun.com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 60년간 내 생일은 1년 두번
[12] 포로수용소 탈출 성공한 윤정식씨
윤정식(83세·경남 양산시)
평안도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 포위돼 우리 부대 거의 전멸
통신장교 신분 발각돼 처형 직전 수용소 탈출… 5개월 야간산행 끝 귀환
교관의 한마디 한마디가 못이 박히듯 뇌리에 꽂혔다. "귀관들은 적의 탱크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는다. 먼저 탱크 15m 안에 접근해라. 그러고 나서 TNT폭탄 30파운드를 탱크를 향해 던짐과 동시에 3바퀴를 구른 후 엎드려 입을 벌려라." 우리는 '자살특공대'가 됐다.
1차 특공대로 편성된 약 40명의 생도가 작전에 투입됐다. 하지만 한강을 건너기도 전에 적에게 발각돼 몰살을 당했다. 우리는 전의가 불탔다. 하지만 육군본부는 "너무 무모한 시도였다"며 작전을 취소했다.
◆ 목숨 건졌지만 포로수용소 끌려가
8월 중순 7사단 5연대 1대대 통신장교로 임관, 경북 영천 인근 안강전투에 투입됐다. 전장(戰場)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머리 날아간 시체, 허리가 잘려 나간 시체….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부대는 평안도로 진격했다. 하지만 11월 묘향산에서 새까맣게 깔린 중공군한테 포위돼 2개 대대가 전멸하다시피 했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부하 5명과 함께 눈 내리는 산악지대를 헤맸다.
- ▲ 6·25 전쟁 때 평남 덕천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윤정식(가운데)씨가 자신의 경험담을 손자 태경(14·왼쪽)군, 며느리 김현정(39)씨, 이웃에 사는 박진희(32·오른쪽)씨에게 들려주고 있다(사진 위). 사진 아래는 윤씨가 59년째 보관하고 있는 실종통지서. /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평남 덕천군 임하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 사는 노인이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분은 마을 뒷산에 있던 폭 2m, 길이 3m 정도 크기의 토굴에 우리를 숨겨줬다. 1950년의 마지막 날. 그 노인 집에 내려가 고춧가루를 띄운 간장에 옥수수밥을 얻어먹다 불쑥 집에 들어선 북한 자위대원을 쏴 죽였다. 시체를 눈 속에 던져버리고 토굴에 숨었지만 결국 적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를 그 영감님에게 데려가 "이 간나들이 우리 동무 죽인 놈들 아니메?"라고 물었다. 그 영감님은 시치미 딱 떼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목숨을 건졌지만 평남 덕천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 포로수용소에서 장교 신분 들통나 처형 위기
포로수용소에선 장교 신분이 드러나면 곧바로 처형당했다. 배운 것도 없고 계급은 이등병이라고 속였다. 그곳엔 포로가 300여명 정도가 있었다. 25명씩 좁은 내무반에서 몸을 포개고 잤다. 겨울이었지만 덮을 이불 하나 없었다. 자다 보면 어느새 온기를 쫓아 몸이 뒤엉켜 있었다.
식사는 삶은 옥수수 알갱이를 90~110개씩 아침 저녁으로 두번 배급받는 게 전부였다. 옥수수를 손으로 던지면 옷으로 받아야 했다. 제대로 못 받으면 굶을 수밖에…. 한번은 고양이가 지나가는 것을 누군가 칼로 잡았다. 껍질을 벗겨 감시 몰래 불에 구워먹으려 했지만 제대로 구워지지도 않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점을 얻어먹으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간신히 한입 얻어먹을 수 있었던 나는 본능의 극한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낮에는 도로를 뚫는 작업에 투입됐다. 도로 좌우측의 도랑을 파야 했다. 기온은 영하 20도 안팎. 땅이 얼어붙어 곡괭이를 내려쳐도 퍼런 불꽃이 나며 튕겨나왔다. 밤에는 김일성 사상을 공부하고, '빨치산의 노래' 등 군가를 배웠다.
1951년 4월 초 내무서원이 나를 불렀다. 내가 국군 7사단 5연대 통신장교였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미 한 배신자의 밀고로 신분을 숨겼던 장교 6명이 총살을 당했다.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태연하게 거짓말이 나왔다. "나는 남쪽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하다. 지난 3개월간 김일성 장군께 충성을 다했는데도 죄인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그 내무서원은 "상부에 잘 보고해 줄 테니 일단 가서 쉬라"고 했다.
잠깐 시간만 벌었을 뿐, 결국 죽게 될 처지였다. 의기투합한 5명과 탈출을 결심했다. D―데이는 4월 8일. 집결지는 뒷산 산봉우리. 화장실 뒤 6가닥 철조망을 끊었다. 철조망을 밀고 몸이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온몸의 살이 찢겼지만 그대로 뛰쳐나갔다. 10m를 가자 총소리가 울렸다.
◆ 탈출해 집에 와보니 실종통지서가 도착해 있어
5개월간 낮엔 낙엽 깔고 자고 밤엔 산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자꾸 길을 잘못 들었다. 대동강만 3번 건넜다. 누비옷은 갈가리 찢겼고 신발이 없어 끈으로 발을 칭칭 동여맸다. 영락없이 짐승꼴이었다. 9월 16일 강원도 철원에서 미군 3사단 전차 부대를 만나 극적으로 귀환했다. 20일 넘게 샅샅이 조사를 받은 뒤에야 부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휴가를 받아 고향집에 돌아가니 부모님이 놀라서 말을 못했다. 집에는 내 실종통지서가 배달돼 있었다. 부모님은 소·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이후 나는 태어난 생일과 살아 돌아온 9월 16일까지 생일잔치를 두번 열고 있다.
금성천의 기적
지홍운(86세·경남 마산시)
전날까지 서로 총 쏘아대던 국군·유엔군과 인민군·중공군이 휴전당일 강에서 함께 목욕을…
7월 27일 0시. 뜨거웠던 전선(戰線)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매일, 그리고 하루 종일 총을 쏘던 관성에 못 이겨 실수로 한 발이라도 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
당시 육군 8사단 특무대에서 정보문관(지금의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휴전 첫날 금성천으로 달려갔다. 아군과 적군 양쪽의 군인들이 몰려있다는 정보가 입수됐기 때문이었다. 휴전이 되자마자 무슨 사고가 날까 걱정이 돼 부리나케 달려갔다. 오전 11시쯤 도착한 금성천에는 삼복더위에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던 약 200여명의 군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전쟁의 때를 씻고 있었다. 미군은 강가에 천막을 쳐놓고 음식을 차렸다.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였다.
놀라운 광경이 거기에서 벌어졌다. 금성천에는 국군과 유엔군뿐만 아니라, 인민군과 중공군들도 모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란 피부, 흰 피부,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벌거숭이로 물에 들어가 맘껏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목숨 걸고 싸웠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연합군 천막에서는 같이 한잔 하자며 인민군과 중공군을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그들은 몇 사람만 눈치를 보다 차려놓은 음식 일부를 가져갔다. 아군측은 그들을 위해 캔맥주도 건네줬다.
서로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무장 해제한 상대방을 기습해서 쏴 죽였으리라. 전쟁터에서 만나 서로에게 총을 들이댔지만 이 순간만큼은 평범한 청년들로 보였다. 누가 이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몰았단 말인가.
- ▲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6·25 전쟁때 유엔군 각 부대엔 한국 꼬마들이 부대‘마스코트’로 활약했다.
사진은 1951년 3월 25일‘전방 복귀’ 명령을 기다리던 미 제24보병사단
5연대 병사들이 한국 마스코트로부터 한글을 배우는 모습.
[미니 戰史] [5] 초기 전투 남북의 성공과 실패
국군 6사단, 춘천서 北 2사단 격퇴… 후방 침투 막아
북한군 의도는 처음부터 뒤틀렸다. 우선 포천-의정부 축선. 북한군은 1950년 6월 26일 오후 1시 의정부를 점령한 뒤 창동을 거쳐 28일 오전 1시에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16㎞를 남하하는 데 36시간이 걸린 것이다.
도로와 교통문제였다. 북한군 3사단은 80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포천-의정부 축선으로 공격했다. 이 중 전차 40대와 일부 병력이 서울 동쪽을 우회 공격하기 위해 서파-비석거리-퇴계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서파 지역에서 전차들이 멈춰 섰다. 도로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포천으로 역행군, 26일 늦게야 의정부에 합류했다.
의정부에서는 '교통 체증'이 벌어졌다. 서파 쪽에서 되돌아온 전차와 병력이 합쳐지고, 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온 북한군 4사단과 전차 13대가 한꺼번에 몰렸다. 2개 사단 병력과 93대의 전차가 뒤엉키면서 북한군은 발목이 잡혔다.
여기에 용맹한 국군이 있었다. 한 무명용사가 의정부 남쪽 백석천을 넘으려는 전차를 공격했고, 이 때문에 백석교가 무너졌다. 북한군 서울 진입은 늦춰졌다.
서부전선에선 개성 남쪽에서 한강을 넘어 김포-영등포 방향으로 공격해오던 북한 6사단이 한강에 막혔다. 이 부대는 전 병력이 중국에서 온 '조선의용대'로 구성된 북한군 최강 부대였다. 하지만 소련에서 받은 1개 중대 분량 도하 장비로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한강 하류를 쉽게 넘을 수 없었다. 당시 김포 쪽에는 국군 방어 병력이 거의 없었는데도 북한군은 이곳에서 3일을 지체했고, 육본이 긴급 편성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선전을 거두면서 북한군은 7월 3일에야 영등포에 진출했다.
춘천지역 방어전투는 전쟁 초기 국군의 최대 성공 스토리다. 국군 6사단은 춘천지역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2사단을 격퇴했다. 당일 춘천을 점령한 뒤 수원으로 진출, 국군 후방을 치겠다는 북한군 작전이 헝클어진 것이다. 다급해진 북한군은 인제-홍천 쪽으로 잘 나가던 12사단 2개 연대를 되돌려 춘천지역에 보냈다. 만약 북한군이 춘천 후방에서 포위 공격했다면 국군 6사단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김일성은 제2군단장과 2·12사단장 모두를 해임해버렸다.
초기 전투에서 선전한 국군은 철수해오는 병력으로 한강방어선을 쳤고, 유엔군 참전과 반격을 위한 시간과 전투력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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