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어찌 잊으랴, 처형직전 탈출하다 먹은 메밀밭 조선무의 맛을…
- ▲ 이종암(83세·서울 성북구)
⑩내 생애 최고의 '진수성찬'
◆생사기로의 끝에서…
팔뚝 반 만한 조선무, 무청 뽑고 한 입 무니…
전쟁이 터지기 전 나는 수도사단 보병 제18연대 소속 이등중사였다. 1950년 6월 19일 옹진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의 유골을 전달하라는 명령과 함께 20일 휴가를 받았다. 경기도 옹진군 봉구면 집에 도착한 것이 6월 24일. 전쟁이 터졌고, 바다를 건너 후퇴하고 있는 부대를 찾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 사이 마을은 인민군이 장악했다. 9월 28일 옹진비행장 지하 벙커에 끌려갔다. 내가 군인이라는 게 이유였던 것 같다. 교실 두 개만한 벙커에 빽빽이 들어찬 주민 400여명은 한 끼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셨다. 심지어 소변도 받아 마셨다. 하지만 목은 더 타들어갔다. 인민군은 잠도 못 자게 했다. 잠깐 졸라치면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일주일 뒤 인민군 두 명이 "오늘은 자도 좋다"고 했다. 모두 금세 곯아떨어졌다. 자다가 몇 사람씩 끌려나갈 때마다 총성이 울린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처형이었다. 분노가 치밀어올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내 차례가 다가오자 돌멩이를 들고 나갔다. 인민군 뒤를 쏜살같이 따라가 돌멩이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다른 인민군이 나를 쳐다보자 이번엔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 지하 통로 끝에서 인민군 둘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나는 숨어서 총알이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기어서 나갔다. 인민군들은 총을 집어던지고 내 허리를 부여잡았다. 한 명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다른 한 명의 코를 물어뜯었다. "아이쿠, 이 간나새끼!" 그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벙커를 빠져나와 정신없이 달렸다.
얼마나 뛰었을까. 메밀밭이 하얗게 펼쳐졌다. 발바닥에 무언가 밟혔다. 팔뚝 절반만한 조선무였다. 한손에 뽑아들어 무청을 비틀어버리고 껍질을 벗겨 한입을 베어 물었다. 우적우적 한 개를 다 먹고 나니 허기가 싹 가셨다.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생명수 같았던 그 맛을 어찌 잊으랴.
적에 쫓기다 얻어먹은 '명태 된장찌개' 살살 녹아
◆잊을 수 없는 산나물 된장찌개
- ▲ 손종문(78세·울산시 동구)
중공군 공세가 계속되던 1951년 5월 오대산 부근 11사단 후방에 있던 우리 10중대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저만치 아군 선진(先陣)이 무너지는 게 보였다. 목적지도 모르는데 무전이 끊겼다. 다급하게 호출을 하는데 적이 따발총으로 기습해왔다. 배낭을 버리고 총과 실탄만 갖고 뛰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절(寺)로 들어가는 길목에 집결하니 낙오자는 없었다. 대대와는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린 지도를 보면서 동쪽 강릉으로 걷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었다. 모두들 지쳐 언덕 위 밤나무 숲에서 밤을 새우기로 했다. 각자 배낭에서 요깃거리를 꺼내는데 배낭을 버린 나는 먹을 게 없었다.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텅 빈 마을인가 했는데 뜻밖에 누군가 있었다. 어느 집 부엌에서 30대 아주머니가 자식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대문 앞에 서성이는 나를 발견한 부인이 "같이 먹어요"라고 했다. "괜찮다" 하면서도 어느새 밥상 앞으로 다가가는 나를 발견했다. 배가 너무 고팠다.
음식은 씹기도 전에 입 안에서 녹았다. 쌀을 조금 섞은 감자밥에 반찬이라곤 명태 머리와 명태 껍질, 산나물을 넣은 된장찌개뿐이었지만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왜 여태 피란을 안 갔느냐"고 물었더니 부인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혼자서 어린 자식 다섯 데리고 어디를 갑니까…." 가다가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매한가지이니, 삶과 죽음을 운명에 맡기겠다고 했다. 남편은 국군인지 인민군인지도 모르는 군인들이 끌고 갔다고 했다.
목이 막혀 더 먹을 수 없었다. 귀한 아이들 밥을 축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떠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들은 살았을까. 남편은 돌아왔을까. 지금도 된장찌개를 먹으면 그날이 되살아난다.
- ▲ 1952년 3월 3일 전쟁터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국군 취사병의 모습. /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뉴시스
- ▲ 6·25전쟁 당시 국군에게 보낼 주먹밥을 만들고 있는 여성들(왼쪽)과 낙동강 전선에서 주먹밥을 먹고 있는 병사들 모습(오른쪽). / 유엔한국참전국협회 제공
- ▲ 최광규(80세·경기도 양평군)
소금·고춧가루만 넣은 동탯국… 최전방 참호에서 맛본 천하별미
◆고지 위의 동탯국
대대 본부 행정병이었던 내가 전방 고지로 걸어가는 데는 1시간쯤 걸렸다. 산을 올라 500m가 넘는 고지에 도착하니 가장 친한 군대 친구 둘이 "오늘은 동태 없느냐"고 기대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11사단 11중대와 12중대 행정병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영하 20도 추위와 바람을 피해 참호에 자리 잡았다. 최전방 참호가 동탯국을 끓여 먹는 우리의 아지트였다. 동태는 어쩌다 속초에서 가끔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지의 전우들을 위해 꼭 한 마리를 따로 챙겼다.
1952년 겨울 일진일퇴 싸움이 계속되던 강원도 건봉산 고지에서 속초산 동태 파티가 벌어졌다. 간 맞출 조미료도 없었지만 간을 맞출 필요도 없었다. 동태를 3~4조각 숭숭 썰어 눈 녹인 물에 풍덩 담가 소금과 고춧가루를 대충 부었다. 국이 끓을 때쯤이면 영하 20도 추위는 온데간데 없었다. 다른 반찬도 필요 없었다. 대충 지은 밥과 동탯국 한 그릇이면 천하 진미가 따로 없었다.
가끔 그 맛이 생각나 자식들에게 소금과 고춧가루만 넣고 동탯국을 끓여보라고 한 적이 있다. 쓰기만 할 뿐 옛 맛이 나지 않았다. 요즘도 그 두 친구와 가끔 만나 동탯국에 소주 한 잔 기울이지만 그 맛은 아니다. 셋의 우정은 그대로인데, 입맛은 변하는 모양이다.
- ▲ 이상국(73세·경기도 수원시)
부역중 파만 넣은 된장국 맛 아직 혀끝에
◆13세 소년의 부역대 노정
1950년 9월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녹전리. 인민군에게 보급할 쌀을 지고 갈 부역대에 15살 누님이 차출됐다. 남자는 50㎏, 여자는 30㎏의 쌀부대를 경북 안동까지 옮겨야 했다. 당시 13살이었던 나는 나이가 어려 차출을 면했지만 가녀린 누님 혼자 무거운 쌀을 짊어지고 가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누님 몫의 쌀 30㎏ 중 절반을 나눠 지고 행렬에 동참했다.
3박4일 행군이 시작됐다. 수천명의 남녀가 10여명씩 새끼줄로 엮여서 쌀부대를 지고 이고 걸었다. 감시하는 인민군들이 장총 끝에 칼을 꽂아 메고 함께 행군했다. 낮에는 줄 폭격을 퍼붓는 비행기들 때문에 나무 밑에 숨었다가 밤이 되면 행군을 시작했다. 줄을 따라 걷다가 총소리와 함께 "항공!" 구령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모두 엎드려 숨을 죽였다.
이틀째였나. 밤새 고개를 넘어 경북 영주에 도달했을 무렵 서서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50~60m 길이 터널 앞에 당도해 쉬려는데, 갑자기 쌕쌕이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혼비백산한 부역대 수백명이 터널 속으로 달음질쳤다. 뛸 기력조차 없던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제트기 8대가 다시 나타나 터널을 향해 기관포와 포탄을 쏴댔다.
포연이 걷히면서 생존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아비규환이었다. 부축을 받으며 끌려가던 한 여성 옆구리에서 비어져 나온 창자 꾸러미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친다. 요즘도 기차를 타고 영주나 안동을 지날 때면 그 터널에 유난히 눈길이 오래 머문다.
고된 여정 속에서도 낙이 있었다. 조별로 솥단지에 밥을 지어 먹는 식사시간이다. 반찬이라곤 각자 집에서 갖고 간 된장과 소금이 전부.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두려움과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그날 점심도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이고 있었다. 농가 뒤에서 파가 자라고 있기에 몇 뿌리 뽑아 된장국에 넣었더니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다른 조 사람들도 몰려들어 잔칫집 같았다. 아, 그 냄새…. 그날 먹었던 국물 맛이 지금도 혀끝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맛있는 국은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다. 그 뒤로 나는 유난히 파를 좋아하게 됐다.
인민군 창고서 훔친 고사리를 무쳐 먹으니…
- ▲ 이경옥(71세·경기도 파주시)
◆어머니의 고사리 무침
11살 되던 해 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은 우리 집을 사무실로 쓴다며 우리 가족을 내쫓았다. 우리 집 소작을 하던 아저씨가 피란을 갔는데 그 초가집에 어머니와 우리 7남매가 들어가 살았다. 인민군은 땅에 묻어 놓은 쌀까지 파내갔다. 먹을 게 없어 며칠씩 굶기 일쑤였다. 그래도 바깥이 폭격으로 쿵쿵거리니까 무서워 "배고프다"고 보채지를 못했다.
1950년 8월 여름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며 어머니가 행주치마 가득 담아온 고사리를 쏟아 냈다. 하얗게 질려 있던 어머니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우리 집 창고에는 인민군이 식량으로 쓰기 위한 고사리가 30가마쯤 쌓여 있었다.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그걸 훔쳐온 것이다. 고사리를 삶아 간장에 조물조물 무쳐 먹는데 어찌나 맛이 좋던지! 어머니는 수줍음이 많아 남의 집에서 양식을 얻어 오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다. 배고파도 겁에 질려 아무 말 못 하는 우리를 보시곤 어찌어찌 결심을 하셨으리라. 음식이 넘쳐나는 시대가 왔지만 우리 가족 모두는 아직 고사리나물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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