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인민군에서 국군장교로… 난 스스로 조국을 선택했다
북한서 농업대 재학중 인민군 장교로 차출됐다가 소대원 데리고 국군에 귀순
[나와 6·25] ⑧신군식씨 '난 인민군 소위였다'
군적 없이 수색대 배치… 동료에 빨갱이 취급받다…
실종 연대장 구출 나선뒤 국군 인정받고 소위로 임관
[나와 6·25] ⑧신군식씨 '난 인민군 소위였다'
군적 없이 수색대 배치… 동료에 빨갱이 취급받다…
실종 연대장 구출 나선뒤 국군 인정받고 소위로 임관
평북 의주에 살던 우리 가족은 1947년 느닷없이 추방당했다. 공산당은 우리 집 땅이 많다며 "유산계급은 재산을 다 내놓고 떠나라"고 했다. 전 재산을 빼앗긴 우리 가족은 황해도 해주로 쫓겨났다. 감수성이 예민할 때부터 나는 공산당에 대한 반감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내게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았다. 1950년 원산농업대 축산과 2학년이던 나는 전시 동원령에 따라 평양 근교 사동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러시아제(製) 중기관총 다루는 법을 배웠고, 볼셰비키 공산당사(史) 강의를 들었다. 1950년 9월 인민군 580부대 소대장으로 임관한 뒤 10월이 되자 강원도 화천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땐 이미 인민군 패잔병들이 삼삼오오 북으로 쫓겨 올라오는 시점이었다.
안 그래도 공산당이 싫었는데, 전황이 불리한 사지(死地)로 가라니 반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국군에 투항할 틈만 엿봤다. 1950년 10월 6일 화천에 내려왔을 때 기회를 잡았다. 나처럼 공산당을 싫어했던 소대원 12명을 데리고 남쪽을 향해 밤길을 10㎞쯤 걸었다. 저만치 국군 진지가 보였다.
- ▲ 1951년 1월 20일 신군식씨가 인민군에서 귀순한 지 105일 만에 육군 소위로 임관됐을 때 찍은 기념 사진. /신군식씨 제공
◆귀순했지만 여전히 인민군 취급
6사단 7연대장이었던 임부택 대령에게 끌려갔다. 그가 물었다. "민간인 될래, 전방에서 싸울래?" 무모했는지 모르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전방에서 공산당을 몰아내겠다"고 답했다. 임 대령이 수색대에 넣어줬다. 그러나 정식 군적(軍籍)은 받지 못했다. 싸우다 죽어도 전사자 처리도 안 될 판이었다.
이등병 정도만 "귀순 장교님"이라고 불렀고 고참 사병들은 "어이, 인민군 장교"라고 불렀다. 몇몇은 "저 새끼 빨갱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라며 수군거렸다. 거칠기로 소문난 최모 일병은 공공연하게 "인민군 따위는 쏴죽여도 아무 일 없다"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군화·양말 같은 보급품도 지급되지 않아 작업복을 입고 싸웠다.
국군에 합류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평남 양덕군 전투에서 총상(銃傷)을 입었다. 오른쪽 갈비뼈와 팔꿈치에 깊숙한 상처가 생겼다. 수색대장이 야전병원에 보내주려 했다. 하지만 김모 중사가 "지금 인민군 포로를 호송하라면 어쩌자는 겁니까! 더구나 (야전병원이 있는) 철원 정세도 뒤숭숭한데요"라고 말했다. '인민군 포로'라는 말이 서러웠다. 오기가 생겼다. 그대로 부대에 남았다.
◆원산농대 친구의 시신을 묻어주다
난 열심히, 그리고 용감하게 싸웠다. 하지만 가끔은 마음 한구석이 착잡했다. 내가 그랬듯 인민군 병사 중에는 억지로 끌려나온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한번은 인민군 시체를 조사하다 주머니에서 내가 다닌 원산농대 학생증을 발견했다. '홍문선'이라는 이름 석 자에 깜짝 놀랐다. 재학 시절 알고 지낸 친구였다. 시신을 묻어주면서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국군이 된 지 열흘 만에 같은 귀순장교 신분으로 수색대에 함께 있던 김유택(신의주동중 동창)이 인민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또 닷새 후 작전에 나간 수색대 동료 5명이 안경과 신발까지 벗겨진 알몸 시체가 된 처참한 광경을 봤을 때에는 인민군에 대한 분노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인민군을 상대로 싸운 기간은 채 한 달이 안 됐다. 내가 속한 부대는 10월 27일 오전 평북 초산군에 입성, 압록강변에 다다른 최초의 부대가 됐다. 이후로는 계속 중공군을 상대로 싸웠다. 마음의 부담도 덜했다.
◆드디어 국군이 된 날
압록강변에 닿은 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중공군에 밀려 전세가 역전됐다. 피눈물을 흘리며 패퇴했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국군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생겼다.
평남 순천군의 낙오병 집합소에 도착했을 때다. 부(副)연대장이 살아 돌아온 장병을 모았다. "우리의 아버지 격인 임부택 연대장께서 실종된 채 중공군 점령 지역에 계신다. 누가 구출해 올래?" 나는 손을 들었다. 다른 2명과 함께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연대장을 구출하러 적진에 침투했다. 하지만 도중에 미군을 만나 빨치산으로 몰려 총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미군 통역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돌아왔다.
다행스럽게도 연대장님은 스스로 적진을 탈출해 먼저 돌아와 있었다. 그날 밤잠에서 깨어보니 연대장께서 잠든 나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덮어주고 옆에서 자고 있었다. 사랑을 베풀어주는 마음이 고마워 감격스러웠고, 충성심이 불타올랐다. 연대장 구출작전에 뛰어든 일을 계기로 나는 전 부대원들로부터 국군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1951년 1월 20일 육군 소위로 임관됐다. 국군에 합류한 지 105일 만에 정식 대한민국 군인이 된 것이다. 1961년 소령 예편 후 한국전력공사에 들어가 24년간 근무했고, 정년 퇴임 이후엔 중앙경찰학교와 한전의 각 사업장에서 북한의 실상을 강의하는 외래강사를 했다. 국군으로 참전한 것은 내게 큰 영광이었다. 당연히 한 치의 후회도 없다.
총알받이로 내몰린 16~17살 '소년 인민군들' 도망 못가게 발목을 쇠사슬로 묶인채 총질만
김춘덕씨 아버지가 겪은 인민군
남은 식구만 고모집에 잠깐 몸을 피했다가 되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셨어요. 38선 부근에서 싸우다 탈출해서 되돌아왔다는 거예요. 훈련도 안 받은 사람들에게 총을 주면서 내몰았는데, 총알받이로 쓰려고 했던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38선에 가보니 군데군데 초소에 16살, 17살 정도로 보이는 인민군들이 총을 쏘고 있었대요. 자세히 보니 얼굴색이 계란 노른자 같더랍니다. 알고 봤더니, 발목에다 쇠사슬을 채워 도망 못 가게 해놓았다는 거예요.
그 '소년 인민군'들은 몸에 총을 몇 군데나 맞았는지 눈동자가 풀린 채 목표도 없이 마냥 총을 쏘고만 있더랍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도망쳤답니다.
인민군에 뽑혀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거의 귀가 먹었어요. 대포를 쏠 때에는 입을 벌리고 쏘아야 한다는데, 훈련을 안 받고 그냥 전쟁터로 내보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들었어요.
하루는 우리집에 들어온 인민군 장교가 엄마보고 그래요. "대세가 기운 것 같으니 꼭 숨어 있다가 남으로 내려가세요." 엄마는 우리를 떠보려고 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아니었나 봐요. 그 장교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만주 태생인데, 가족도 모두 잃고 이제 남으로 갈 수도 없으니 이대로 전쟁에서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장교가 두고두고 생각납니다. 그땐 어쩔 수 없이 동원된 인민군들이 많았나 봐요.
[●그때 그 장면]
총알이 떨어졌나… 돌 던지는 중공군
미니 전사(戰史) ④ 국군의 방어계획
北의 남침 징후 농후해지자 50년 1월에야 방어계획 마련
김일성과 박헌영은 일단 무력남침이 시작되면 남한 내 군과 민간의 남로당 세력과 그 동조자들이 일제히 봉기, 북한군을 도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오판으로 결론났다.
국군이 38선에 대해 독자적 방어에 나선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약 6개월 동안에 이뤄졌다. 미군은 1948년 9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 주한미군 1만6000여명 중 대부분을 철수시켰고, 이어 6월 말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제5연대전투단을 철수시켰다. 이후 남한엔 500여명의 군사고문단만 남았다.
육군본부는 1949년 12월 북한의 무력이 증강되고 남침 징후가 농후해지자 1950년 1월 말 처음으로 전군(全軍) 차원의 방어계획 시안을 마련했다. 그 전에는 지역 사단 차원의 방어계획만 있었다.
국군의 방어개념은 방어지대를 '경계지대' '주방어지대' '예비진지지대'로 구분했다. 1차로 경계지대에서 북한 공격을 저지하고, 주방어지대에서 결전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주방어지대 방어에 실패할 경우 예비진지지대를 확보해 그곳에 별도의 증원부대를 투입, 역습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이때 설정된 방어선은 주문진 남방~춘천 북방~마차산(587고지)~임진강 일대를 연결하는 선이었다. 육본은 이 내용을 1950년 3월 25일 작전명령 제38호로 각 부대에 하달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계획을 따라가지 못했다. 국군의 무장력은 북한에 비해 절대적 열세였다. 국군의 소총·권총 등 소화기는 10만정, 대포는 105㎜ 91문에 불과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 지시에 따라 1949년 9월 북한군을 막을 전차 189대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군측 군사고문단은 "한국의 지형과 도로, 교량 등에 비춰볼 때 전차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편집자에게]
6·25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 ▲ 경희대 명예교수 신용철
이처럼 뜻깊은 해에 보훈처가 전투병 파병 16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 등 21개국 정부에 '6·25 참전 감사합니다(Thank You, United Nations)'라는 감사의 액자를 보냈다. 거기에는 우리의 발전과 자유민주주의가 참전국의 기여와 희생의 덕택이며, 한국은 이를 영원히 기억하고 신뢰와 우정을 쌓아 갈 것이라고 썼다. 참전국에서조차도 한국전쟁 기념사업에 관심을 갖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늦은 우리의 자각이기도 하다.
그 참화의 땅에서 자란 아이가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고, 우리와 전혀 관계도 없던 평화로운 섬나라 뉴질랜드도 5350명의 '키위' 군대를 파견해 41명이 죽고 79명이 부상했으니, 이는 확실히 국제적이고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음 말해준다. 고대 유럽문명과 민주주의의 발원지였던 그리스의 의사당 앞에도 자유를 위해 한국전에 참가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새겨 놓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번영과 평화를 보면서 늙어가는 그 날의 외국 참전용사들이 보람을 느끼는 것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흐뭇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아프게 반성해야 할 시기이다. 전쟁 이후 60년간의 우리 현대사에 대한 평가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 ' 좌와 우'라는 극심한 갈등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대한민국을 세우고, 발전시키고,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지도자들과 영웅들을 소리내 찬양하지 못하는 현실도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웠던 그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의 출범이나, 처참했던 6·25전쟁을 이제 우리는 역사로서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전쟁이나 발전 등의 역사가 결코 치욕이 아니다. 세계가 참여하고 세계가 바라보는 가운데 전개되고 성취한 성공의 역사였다. '6·25 발발 60주년, 대한민국 발전의 60년'이란 자랑스러운 우리의 현대사를 회고하면서 이제 우리도 긍지를 갖자. 그 출발점이자 전환점에서 국가와 민족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죽어간 이들과 살아서 증언하는 백선엽 장군 같은 구국영웅들의 피와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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