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주력은 경부 축선으로, 일부는 호남 통해 우회공격
北 퇴각 후에도 일부지역서 극심한 좌·우익 혼란 겪어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은 주력을 경부 축선으로 진격시키는 동시에 일부 병력을 호남지역을 통한 우회공격에 투입했다.북한군 제6사단은 1950년 7월 19일 금강을 넘어 익산에 진출한 데 이어, 20일 전주를 점령했다. 고창-영광-나주·목포와 남원-구례-순천-여수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31일에는 경남 진주에 다다랐다.
부산 점령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던 북한군은 호남지역에 군 병력을 주둔시키지는 않았다. 북한군은 8월초 낙동강 전선에까지 진출, 국군·유엔군 방어선 돌파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 호남지역은 민간 좌익세력이 완전 장악했고, 고창 등 일부 지역에선 엄청난 학살극이 자행됐다. 지주 등 재산이 많거나 대한청년단 등 우익활동을 한 사람, 면장·경찰· 군인 등 공직에 있었거나 마을 이장 등을 역임한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 이후 이 지역에선 경찰과 우익세력이 힘을 되찾았다. 우익세력은 대대적인 보복전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의 우세는 '낮'에 한정된 것이었고, 밤에는 여전히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 등이 활개를 쳤다.
국군은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차, 1951년 11월부터 5개월간에 걸친 2차 등 두차례에 걸쳐 소탕 작전을 벌였지만 이들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다. 인민군·빨치산 잔당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주민 학살과 테러 등을 일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