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할머니·어머니·동생 5명 제삿날이 같은 '기구한 우리 집'

namsarang 2010. 3. 18. 18:49

[나와 6·25]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김형원 기자 won@chosun.com

                                                                                              양모듬 기자 modyssey@chosun.com

                                                                                              양승식 기자 yangsshik@chosun.com

                                                                                              사진=오진규 인턴기자  

 

할머니·어머니·동생 5명 제삿날이 같은 '기구한 우리 집'

 

김차순

 

⑥김차순씨 "그때 내 고향 茂長은 살인지옥이었다"
地主여서, 남로당 아니라고 아버지·큰아버지는 총살당해
할머니·어머니·동생 5명은같이 끌려가 한꺼번에 죽어…
평생 자식에게도 안한 얘기 이제야 겨우 털어놓는다…

남편은 나와 같은 전북 고창군 무장면 사람으로 서울 효창국민학교 교사였다. 효창동 신접살림은 행복했다. 내 나이 스물. 100일도 안 된 딸 보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전쟁이 터졌다. 총소리가 날 때마다 이불 뒤집어쓰고 옆집 텃밭에 숨어 덜덜 떨었다. 남편이 공산당에 끌려갔다 가까스로 탈출했다. 집 천장을 톱으로 썰어 남편을 숨겼다. 열흘쯤 지났을까. "죽어도 고향에서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15일을 밤낮으로 걸어 무장에 도착했다.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나는 친정, 남편은 본가에 머물기로 했다. 저 멀리 고향이 보이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아픔의 시작이었다. 무장은 인민군 세상이었다.

어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밤에도 잠을 못 자며 불안에 떨었다. 내가 도착하기 직전 8월 15일 아버지와 두 분 큰아버지가 모두 총살을 당했다고 했다. 공산당은 아버지를 '반동분자'라고 불렀다. 남로당이 아니어서, 지주(地主)여서 죽였다고 했다.

어느 찌는 듯 더웠던 날. 공산당이 모든 사람을 무장국민학교에 모이라고 했다. 작은 동산 위 나무에 한 남자가 묶여 있었다. 죽창을 들고 있던 사람이 소리쳤다. "저 남자는 공음면에 사는 자로 미군 스파이다. 도저히 살려둘 수 없다." 탕탕 소리가 나더니 그 사람이 앞으로 쓰러졌다. 누군가 발로 건드리니 움찔움찔 살아 있었다. 다시 "탕, 타당." 하얗게 질린 어머니가 숨넘어가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너희 아버지가 저렇게 죽었어. 우리도 다 죽게 생겼어야…."


70년대 김차순씨 가족… 1970년대 초반 가족여행을 간 김차순씨 가족이 변산반도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둘째딸, 김차순씨, 막내아들, 남편. / 김차순씨 제공
국군이 평양까지 치고 올라갔다는 10월에도 무장의 밤은 남로당이 지배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2남5녀인 우리 대가족을 이끌고 외가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시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시댁귀신'이 되자고 결심했다. 시아버지 시선은 불안했다. 평소 우리 아버지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였지만 아버지가 총살당했다고 하니 혹시 피해가 있지 않을까 걱정하신 것 같다. 그때 무장에서 우리 친정집 사람들은 살아 있는 귀신 취급을 당했다.

어느 날 밤, 남로당 사람이 날 불러냈다. 대뜸 "너희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아느냐"고 묻더니 죽창을 주며 "어머니를 찾아가 찔러 죽여라"고 했다. 눈앞이 콱 막혔다. 못하겠다고 버티자 "그럼 앞 동네 사촌오빠를 죽이라"고 했다. 절대 못한다고 했더니 다시 조사할 테니 들어가라며 보내줬다. 나중에 알게 됐다. 그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는 걸.

지옥 같은 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큰언니가 그 끔찍했던 순간을 전해줬다. 나를 뺀 우리 가족이 외가인 향교마을에 갔을 때였다. 어느 날 밤 남로당 사람이 할머니에게 "인민회의가 있으니 다 나오라"고 소리쳤다. 할머니가 안 간다고 하자 식구 모두를 새끼줄로 줄줄이 묶었다. 어머니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큰언니더러 "너희 남편 정서방은 영광 어디서 좌익활동 한다더니 지금은 뭘 한다냐"고 크게 들리도록 말했단다. 남로당은 다시 조사한다며 큰언니만 돌려보냈다. "죽창 든 사람들이 구덩이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어…." 큰언니는 흐느꼈다. 1950년 11월 1일, 우리 할머니·어머니와 다섯 동생의 기일(忌日)이다.

김차순씨의 회고록 원본. 김씨는 1997년부터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회고록 형태로 정리하고 있으며 그 사연을 본지에 보내왔다.
이듬해 봄. 화장(火葬)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장에 갔다. 그때도 밤엔 남로당, 빨치산이 내려왔다. 언니에게 장소를 물어 동창 몇 명과 우리 가족이 묻혔다는 곳을 찾았다. 한참을 둘러봐도 모르겠다. 그런데 하얀 고무신…. 내 고무신이 닳고 해졌다고 어머니가 바꿔 신으셨던 그 고무신이 있었다. 미친 듯이 땅을 헤집었다. 맨 먼저 할머니 시체가 나왔다. 그다음으로 어머니, 그 밑으로 판순이, 남순이, 장손 동진이, 춘광이, 대여섯 살도 안된 막내 남동생 행진이가 줄줄이 나왔다. 할머니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가장 어린 것부터 죽창으로 찔러 구덩이로 밀어 넣었단 말인가. 반쯤 부패한 시체에는 구더기가 득실득실 끓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한 명씩 파서 대발(갈대 또는 가늘게 쪼갠 대나무를 실로 엮어 만든 가리개)로 덮어주고 화장을 했다. 뼛가루는 한데 모아 근처 야산에 뿌렸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얼마를 보냈던가.

그 후 2년간은 넋 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아예 기억이 거의 없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아들이 하나 더 태어나 있었다. 그제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덧 내 나이 여든. 지난 2월, 조촐한 내 팔순잔치 때 "6·25 때 너희 외가가 참극을 당했다"고 60년 만에 겨우 입을 뗐다. 하지만 모든 걸 말하진 못했다. 남편이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사람은 숨을 거둘 때까지 그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언니 김원순도 10년 전 별세해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나 혼자가 됐다.

내가 겪은 6·25는 너무도 끔찍하다. 60년 전, 내 고향은 살인 지옥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람들이 쫓아올까 무섭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몇 번이나 망설이고 있다. 난 전쟁이 끝나고도 30년이 지날 때까지 무서워 고향에 가질 못했다. 나마저 죽고 없어지면 누가 그때 일을 기억할 것인가.

 

 

그 당시 무슨 일이…

                                                                                                                                              

 

 

北, 주력은 경부 축선으로, 일부는 호남 통해 우회공격
北 퇴각 후에도 일부지역서 극심한 좌·우익 혼란 겪어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은 주력을 경부 축선으로 진격시키는 동시에 일부 병력을 호남지역을 통한 우회공격에 투입했다.

북한군 제6사단은 1950년 7월 19일 금강을 넘어 익산에 진출한 데 이어, 20일 전주를 점령했다. 고창-영광-나주·목포남원-구례-순천-여수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31일에는 경남 진주에 다다랐다.

부산 점령을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던 북한군은 호남지역에 군 병력을 주둔시키지는 않았다. 북한군은 8월초 낙동강 전선에까지 진출, 국군·유엔군 방어선 돌파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는 동안 호남지역은 민간 좌익세력이 완전 장악했고, 고창 등 일부 지역에선 엄청난 학살극이 자행됐다. 지주 등 재산이 많거나 대한청년단 등 우익활동을 한 사람, 면장·경찰· 군인 등 공직에 있었거나 마을 이장 등을 역임한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수없이 목숨을 잃었다.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 이후 이 지역에선 경찰과 우익세력이 힘을 되찾았다. 우익세력은 대대적인 보복전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의 우세는 '낮'에 한정된 것이었고, 밤에는 여전히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 등이 활개를 쳤다.

국군은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차, 1951년 11월부터 5개월간에 걸친 2차 등 두차례에 걸쳐 소탕 작전을 벌였지만 이들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다. 인민군·빨치산 잔당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주민 학살과 테러 등을 일삼았다.
 

         

         

        고창군 茂長 사람들이 말하는 '잊고 싶은 그날'

         

          

        구덩이 파놓고 다 죽여… 같이 끌려갈까 두려워서 차순씨와 말도 안 섞어

        김차순(80)씨 사연을 접한 본지 특별취재팀은 12일부터 이틀간 전북 고창군 무장면에 찾아가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 증언을 들었다.

        ▲A씨(80)="6·25 때 그 집안(김차순씨네)은 결딴나 버렸다. 내가 그 옆집에 살았지. 차순씨한테 말도 붙이고 놀러도 갔는데 (6·25 이후에는) 무서워서 얼씬도 안 했다. 말이라도 섞으면 밤에 끌려가 버릴 것인데 어쩌겠나. 그 집안이 지주였다. 자손 있으면 복수하니까 씨족을 말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B씨(73)="내가 차순씨 정읍여중 후배요. 차순씨는 공부도 잘하고 여성스러웠지. 얼굴이 예쁘고 말수가 적었어. 그 집안이 많이 배우고 잘살고 하니까 다 죽인 것이야. 저들이 총이 없으니까 죽창으로…."

        6·25 전쟁당시 수많은 양민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은 인민재판 모습.
        ▲C씨(71)="김차순씨가 우리 집안 사람이오. 구덩이 파놓고 우리 일가 사람들 다 죽였지. 팔십 먹은 할머니도 죽였으니까. 나는 그때 정읍에 있어서 살았지, 거기 있었으면 당연히 죽지 않았겠소."

        ▲D씨(71)="동네에 한 50~60명 어린애들이 죽창을 어깨에 딱 걸치고 김일성 장군 노래 부르고 다녔지. 어렸으니 좌파고 우파고 뭐 알았겠나? (빨치산) 궐기대회 때 구덩이 파놓고 세 사람 세워놓고 '반동은 죽어야 허지 않겄습니까'라고 크게 묻는 거야. 전부 '예'라고 하니까 죽창으로 찌르고 발로 차 넣었어. 왜 그랬냐고? 뭐, 지주들이 죽어 없어져야 땅을 걷어 무상분배할 수 있다던가…."

        ▲E씨(70)="우익에 가까운 사람은 빨치산이 다 죽이고 좌익에 가까운 사람은 나중에 국군이 수복해서 죽였지. 빨치산이 반동이라면 반동이고, 국군이 빨갱이라면 빨갱이니 우리 같은 못난 사람들은 숨도 쉴 수 없었어. 국군이 오면 빨치산은 한참 산에 들어가 있다가 밤이 되면 내려왔지. 빨치산이 저녁에 한 번 데리고 간 사람들은 귀신같이 없어져 버렸어."

        ▲F씨(53)="4년 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그 당시 구덩이에 끌려가 죽을 뻔했는데, 빨치산 중에 동네 동갑내기 친구가 슬쩍 빼주었다고 한다. 우리 집은 돈도 없는 가난한 집이었는데 자기네 활동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끌고 갔다고 했다. 빨치산 했던 사람들 자식 중에 지금 우리와 한 동네 사는 사람도 있다. 정작 당사자 자식들은 그걸 모른다. 이제 그때 일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알아도 모르는 척 아무 얘기 안 하니까. 어쩌겠나. 그때는 다들 살려고 그런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