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삐라 이야기] [上] 유엔군

namsarang 2010. 3. 15. 17:55

[나와 6·25]

 

[삐라 이야기] [上] 유엔군   

"敵을 삐라에 묻어라" 유엔군, 25억장 뿌려

6·25 전쟁 당시 '삐라'(전단)는 '들리지 않는 총성' '종이 폭탄' '심리전의 보병'으로 불렸다. 당시 미 육군 장관이었던 프랭크 페이스는 "적을 삐라에 묻어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유엔군이 뿌린 삐라는 총 1000여종 25억장. 보통 엽서만한 크기(17㎝×10㎝)였으니 한반도를 20번 덮을 수 있는 분량이다. 최고 절정기에는 매주 2000만장 이상 살포됐다. 최초로 살포된 삐라는 1950년 6월 28일 미군이 항공기로 뿌린 1200여만장이다. "곧 유엔군과 미군이 참전해 공산침략자를 물리칠 것이니 북한 점령하에 있는 한국 국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이었다.

북한군을 상대로 한 삐라는 "귀순하면 추위와 배고픔을 면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상대편 공포심과 동요를 노리고, 조직의 통제력을 떨어뜨리고자 한 것이다. 활짝 웃고 있는 북한 포로들의 사진을 넣고 "유엔군 쪽으로 넘어온 이 용감한 동지를 보라! 박 전사는 훌륭한 대우를 받으며 좋은 친구들과 같이 지내고 있다"고 쓰는 식이다.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對北 삐라>

"우리는 가끔 목욕을 한다"는 제목 밑에 야외에서 목욕을 하는 한국 군인들의 사진을 담은 것도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는 꿈꾸기 힘든 본능 욕구를 자극해 북한군과 중공군의 항복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인기 삐라들도 있었다. '안전보장증명서' 'safe conduct pass'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것들인데, 이 삐라를 지니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의미다. 포로로 잡힌 병사 대부분과 공산당의 하급 간부까지 만일을 위해 이 삐라들을 소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