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노래 잘 부르고 배짱 좋던 둘째 형 국방경비대 자원입대했다가 끝내…

namsarang 2010. 3. 19. 17:03

[나와 6·25]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김형원 기자 won@chosun.com

                                                                                                                         양모듬 기자 modyssey@chosun.com

                                                                                                                         양승식 기자 yangsshik@chosun.com

노래 잘 부르고 배짱 좋던 둘째 형 국방경비대 자원입대했다가 끝내…

박찬송(67세·경기도 화성시)

 

⑦ 박찬송씨 '어릴 적 내 자랑 둘째 형'
마을 장기대회 나가면 꼭 상 타서 내게 과자 갖다주던 형…
입대 후 전쟁 나자 소식 끊겨… 40년 수소문 끝에 전사 소식 들어

어릴 적 나의 최고 자랑거리는 둘째 형이었다. 나보다 13살 많았던 형은 176㎝ 정도 키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다혈질이었으나 배짱 하나는 두둑했던 형은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사람들은 나와 둘째 형이 영락없이 판박이라며 작은형을 '큰 마차꾼', 나를 '작은 마차꾼'이라고 불렀다.

1949년 둘째 형 박찬남은 "첫째나 둘째 중 한명쯤은 나라를 지켜야지. 첫째 형은 장손이니 내가 갈게"라며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했다. 형이 총을 차고 휴가를 나올 때면 내 작은 어깨도 으쓱했다. 내 친구들은 "국군, 국군"이라고 외치며 형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6·25 때 나는 경기도 화성 봉담리(현재 봉담읍) 갈담국민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어린 나이였기에 전쟁에 대한 무서움도, 북한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전쟁이 난 후에는 학교 선생님이 가르치던 김일성 장군 노래도 곧잘 따라불렀다. 전쟁이 터진 후 며칠이 지나자 국민학교 4개 교실 전체에 피란민들이 가득 들어찼고 우리 집도 피란길에 올랐다. 길 위에서 자는 게 일상인 고된 피란길에서 나는 누나에게 콩알만한 물집이 잡힌 발을 보여주며 "업어주지 않으면 나 안가" 하면서 투정도 많이 부렸다. 군에 있는 둘째 형 생각이 자주 났다. '우리 형이 국군이고 총이 있는데. 우리 형한테는 덤빌 사람이 없지'라고 믿었다.

지난달 28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실에서 박찬송씨가 6·25 때 전사한 둘째 형의 위패를 어루만지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둘째 형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부모님께 "형 왜 안 와, 형 언제 와"하고 물었다. 부모님은 "오겄지, 오겄지. 작은형이 와서 너 또 좋은 데 데려갈 꺼여"하셨다. 어린 마음에 하루를 못 참고 다음날이면 또 "형은 언제 오는데"라고 묻곤 했다.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장독대 위에 냉수 한 그릇 떠놓고 두손을 모아 빌었건만 아들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1970년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네 형이 혹시 북으로 끌려가서 살고 있는지 누가 알겠느냐"고 하실 때면 나는 '형이라면 북에 가서도 곧 탈출해 올 거야'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살 두살 나이가 들면서 또 이웃집 형들도 끝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서 나는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 6·25 참전자 실종 신고 기간이 있었다. 둘째 형을 행방불명자로 신고하려 했더니 법원에서는 "당사자가 몇 년째 연락도 없지 않으냐"며 형을 사망자로 판정했다. 동네 사람들은 "자네 형은 배짱도 있고 사나이 중의 사나이니, 북한군에 끌려갔다 한들 거기서 한 자리 해먹을 걸세"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 형이 그럴 형이 아닌데 왜 북에 가서 산다고 하나"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 나는 형의 행적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군에 복무한 사람을 만나면 꼭 '박찬남'을 아느냐고 물었다. 1980년대에는 이산가족 찾기에 형의 나이, 이름, 생년월일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군부대마다 전화를 해 '박찬남'을 찾기도 했건만 백방으로 뛰어도 아무 성과가 없었다. 나는 지친 나머지 둘째 형의 행방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 한쪽에는 둘째 형이 짐으로, 빚으로 쌓여 나갔다.

1990년대 후반 무렵 이상하리 만치 형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형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다시 행적을 찾기 시작했다. 형의 물건을 찾기 위해 집안 살림살이와 상자를 샅샅이 뒤졌다. 안방 대추나무 장롱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사진 속 형은 철모와 군복을 착용하고 동료 2명과 함께 개성 선죽교에 엎드려 캘리버30 총으로 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에는 단기 4282년(서기 1949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6·25 전 형이 마지막 휴가 때 가져 왔던 사진이었다.

사진을 들고 육군본부를 찾아가 "형님이 11연대 3중대에 있었다고 한다. 내가 가진 건 이 사진 한 장뿐이다. 형님을 찾아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육군본부는 "지나치게 믿지는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고마운 마음에 몇번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얼마 후 육군본부에서 둘째 형이 1951년 1월 12일 개성 송악산에서 전사했다는 연락이 왔다. 소식을 듣고 많이도 울었다. 작은아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 믿고 계셨던 아버지께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2000년 4월 90세 나이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작은형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저 신작로 밭은 작은형 줘라"고 하셨다. 마지막 사진마저 군에 제출한 지금 형의 존재를 말해주는 건 동작구 국군묘지의 작은 위패뿐이다.

60년도 더 옛날, 노래를 잘했던 형은 가끔 장기자랑으로 목청을 뽑고 과자를 잔뜩 받아와 어린 동생에게 안겨주었다. 좋은 곳, 재미있는 곳에도 빠뜨리지 않고 데려갔다. 하나 이제 형을 떠올리면 그 얼굴조차 가물가물하다. 남은 것이 있다면 아직도 내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뿐이다.

 

 

백발되어 만난 '최초의 카투사' 전우

 

본지에 각각 수기 보내와… 특별취재팀이 만남 주선

본지에 '나와 6·25' 수기를 보낸 참전용사 두 사람이 특별취재팀의 주선으로 58년 만에 감격의 상봉을 했다.

지난 12일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사 1층 로비. 송백진(87) 예비역 소위와 류영봉(78) 예비역 중사가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얼싸안았다. 이들은 카투사(KATUSA) 1기 출신으로 일본 후지산 훈련→인천상륙작전→흥남 철수를 함께한 전우(戰友)다. 군번이 'K1101741(송씨)'과 'K1101755(류씨)'로 맨 끝 두 자리만 다르다.

이들은 각자 "최초의 카투사"라며 수기를 보내왔다. 이동 경로가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한 특별취재팀이 두 사람에게 확인한 결과 서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송씨와 류씨는 나란히 1950년 8월 16일 대구에서 징집됐다. 송씨는 그날 밤 대구시내 한 여관에서 잠옷 바람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길거리의 헌병이 "빨리 나와"라고 소리치자 얼떨결에 군 트럭을 탔다. 경기도 부천 출신인 송씨는 경남 진주에서 건설기술자로 일하다가 동료들과 대구로 피란 왔을 때였다. 대구상고에 재학 중이던 류씨는 아침 등굣길에서 "학생도 군대 가야돼"라고 말하는 경찰관에게 붙들려 군 트럭에 타게 됐다. 카투사제도가 급하게 만들어진 탓에 징집도 마구잡이였다.
지난 12일 본지 특별취재팀 주선으로 58년 만에 만난 류영봉(왼쪽)씨와 송백진씨가 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경렬 기자 krchung@chosun.com
부산항, 일본 요코하마항을 거쳐 도착한 곳은 후지산 기슭의 미군 7사단 훈련캠프. 함께 건너간 2000명의 카투사들과 함께 미 7사단 17연대에 배속됐다. 송씨는 연대장 참모가 됐고, 류씨는 의무(醫務) 대원이 됐다.

일본에서 3주 훈련을 받고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군산 상륙 소문이 돌았는데 내려보니 인천이었습니다. 지리에 익숙한 카투사들이 UN군을 많이 도왔죠.(류씨)" 이들이 속한 미 17연대는 함남에도 상륙작전을 펼쳐 혜산진(현 혜산시)까지 진격했다. 미군들이 압록강변에 성조기를 꽂자 카투사들도 질세라 나란히 태극기를 꽂으며 자존심을 세웠다.

송씨는 "처음엔 미군이 카투사에게 모든 걸 가르쳐줬지만 1년쯤 지나자 기관총 쏘는 역할은 대부분 카투사가 맡고 있더라"고 말했다. 송씨와 류씨는 부대가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주둔할 때까지 함께 이동하다가 이후 다른 전선(戰線)으로 헤어졌다.

둘은 처음 커피를 맛봤을 때의 추억, 영화를 보다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던 일 등을 되새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송씨는 1953년 전역할 때 미 국방부로부터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대구 미군기지 병원에서 46년간 일하다 은퇴한 류씨도 미 국방부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UN데이(10월 24일)에 열리는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며 발길을 돌렸다.
6.25때 첫 카투사로 입대한 후 같이 싸운 송백진씨와 류영봉씨가 60년만에 다시 만나 기뻐하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북한, 49년 소련 무기로 무장… 소·중에 지원 약속 받아내

  •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미니 戰史 ③ 북한의 전쟁 준비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 기점이 되는 때는 1949년 3월이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쉬티코프 소련 대사를 계속 압박한 끝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이 회담은 수십년 동안 경제·문화 관련 회담으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1994년 소련의 일부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이 회담에서 다뤄진 핵심 내용이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서는 옐친 대통령이 소련의 비밀외교문서 중 6·25 전쟁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해 일명 '옐친문서'라고 불린다.

이 회담에서 김일성은 '즉각적인 무력 통일'을 주장했고, 스탈린은 "아직 때가 아니다"며 만류하는 입장이었다. 김일성은 당장 전쟁을 일으키는 데 대해 동의를 얻지는 못했지만 두 개의 큰 선물을 받았다. 우선 북한이 추후에 전쟁을 일으킬 경우 소련이 이를 지지하겠다는 것. 둘째는 북한군에게 현대적 무기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실제로 그해 5월 이후 북한에는 소련의 최신 무기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청진항과 원산항 등 항구에는 자주포와 박격포, 탄약 등을 실은 배들로 가득 찼고, T-34 전차 등은 철도를 통해 북한 땅으로 들어갔다.

공산세력은 위장 평화전술도 구사했다. 소련과 북한은 1948년 12월 25일 소련군 전면 철수를 국내외에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남측을 향해 평화통일 논의를 하자고 손짓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2월 소련군 총참모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는 여전히 소련군 4000여명이 몰래 남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기갑과 포병, 공병 등의 병과를 가진 병력들로 북한군의 전투 능력을 높이는 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북한은 중국으로부터는 주로 병력 지원에 대한 보장을 받았다. 중국에는 조선인들로 구성된 '조선의용군' 3개 사단 병력, 약 5만명이 있었다. 김일성 특명을 받은 김일 특사는 1949년 5월 마오쩌둥을 만나 이들 조선의용군 병력을 입북(入北)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조선의용군 5사단과 6사단 병력은 1949년 여름과 가을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12사단은 1950년대 3월에 입북했다.

1949년 10월 중공이 탄생하자 김일성은 전쟁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북한의 남침 계획은 1950년 5월 29일 '선제타격작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