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미
텍사스주 남부감리대(大) 대학생이었다. 당시 나는 ROTC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콜로라도주 덴버의 여름 캠프 도중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비행학교에 입교(入校), 조종사가 됐다.
1952년 12월
도쿄를 거쳐 눈 내리는 수원공항에 발을 디뎠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둘, 계급은 소위였다. 고향 댈러스에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부모님을 두고왔다. 한국의 첫인상은 몹시도 춥다는 것이었다.
미국 남부 텍사스주 출신인 내게 그렇게 추운 겨울은 처음이었다. 수원에 도착한 날, 25㎝의 눈을 경험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F-86 전투기를 조종, 총 62회 출격했다. 전투기의 이름은 내 아내와 고향의 이름을 딴 '셜리의 텍사스 토네이도(Shirley' Texas Tornado)'로 지었다.
우리 비행대대 임무는 수도권 상공을 지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 인근에는 2개의 미군 비행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50대는
김포에, 또 50대는
수원에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는 압록강까지 출격했다. 한번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던 경험도 있다. 소련군의 보급현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젊었기 때문일까. 나는 결코 적들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6·25 전쟁 중에 총 3대의 미그(MIG) 전투기를 격추 또는 일부 파괴했다. 한 대는 완전히 격추시켰고, 한 대는 실종시켰으며, 또 한 대는 크게 망가뜨렸다.
북한 상공에서 미그기를 격추시킨 후, 지그재그 비행으로 위험지역을 벗어났다. 전투를 마치고 나니 연료가 별로 없어 위험한 상황이었다. 계기판을 보니 수원공항까지 갈 연료가 되지 않았다. 급히 방향을 틀어 김포 비행장으로 비상착륙한 기억이 난다.
조종사들 중에는 적에게 포로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속한 비행 대대의 헬러(Heller) 대령이 격추당해 중국군의 포로가 됐었다. 그는 전쟁 이후에도 즉각 돌아오지 못하고 한참 동안 포로생활을 했다. 다른 동료도 중국군의 포로가 돼 고문을 당했다.
하늘이 아닌 땅에서 전투를 벌인 적도 있다. 하루는 수원에서 서울로 갈 때였다. 나를 포함해 4명이 지프를 타고 가다 언덕에 있는 북한군 게릴라들을 발견했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우고 동료들에게 "차에서 뛰어내리라"고 소리쳤다. 우리가 가진 것은 45구경 권총뿐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일제히 사격을 가해 사살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한반도 상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당시 지상에 있는 한국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그 처참한 상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인들은 그렇게 추운 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을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가능하면 그들을 많이 도와주려고 했다. 수원을 재건하는데도 힘을 보탰다. 1953년 11월까지 1년간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중위로 진급했다.
우리가 압록강까지 진격해 놓고서도 이를 지키지 못한 것은 무척 안타깝다.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물러난 것이 아쉽다. 미국은 당시 외교적 실수를 저질렀다. 미 의회가 전쟁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려 결국 지금의 휴전선이 만들어졌다.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북한 땅에도 자유가 있을 텐데…. 한국은 하나였잖은가. 지금도 휴전이 계속되고 있을 뿐,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전투 경험은 그 후 베트남전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베트남전에서도 전투기 조종사로 활동했고 비행기가 격추당해 7년 동안 '하노이 힐튼'으로 불렸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었다. 귀국 후에도 미 공군에 근무하다가 대령으로 예편했다.
6·25 직전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한국인들은 지난 60년 동안 굉장한 일을 해냈다. 6·25 전쟁 이후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한국측에서 초청장을 보내와 방문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2001년 9·11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취소됐다. 기회가 되면 치열한 싸움이 펼쳐졌던, 지금은 발전해 있는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 싶다. 당시 텍사스주 출신으로 생사를 함께했던 전우(戰友)들을 지금도 가능한 한 많이 만나고 있다. 만나면 한국의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1991년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뒤에는 6·25 전쟁의 교훈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만약 지금이라도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당장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도울 것이다. 올해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한국과 미국이 진정한 '친구'임을 보여줘야 할 때다. 사람들은 6·25 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지 않나. 전쟁의 의미가 많이 잊혀진 상황에서 자유를 지켜 낸 전쟁의 소중한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왼팔 하나로 손주 2명을 안아주시던 아버님…
왜 처음 저를 봤을 때 전쟁 중 잃어버린 오른팔을 숨기려 하셨나요
얼마나 자랑스러운 상처인데… 남편과 제가, 또 국민 모두가 얼마나 고마워할 상처인데…
아버님,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7년이 흘렀습니다. 저도 올해로 마흔넷이 됐습니다. 아버님을 처음 뵙던 때가 기억납니다. 가로수 나뭇잎들이 울긋불긋하던 1991년 가을이었습니다.
안동 기차역 부근 지하 다방에서 친정부모님과 아버님이 첫 인사를 나누셨지요. 남편 근무지가 부산이었고, 저는 안동에서 지냈던지라 저 또한 아버님을 처음 뵙는 자리였습니다. 옥색 계통 한복에 중절모를 차분히 눌러쓰고 계셨지요.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남편이 6남매의 막내라 그때 아버님은 이미 고희를 바라보는 연세이셨습니다. 어른들께서 결혼식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아버님이 조금 불편해 보이셨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장차 며느리 될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으셨지요. 앞에 놓인 차에는 손도 대질 않으셨어요. 저는 속으로 "아이고…. 내가 맘에 안 드시나 보다" 하며 조마조마했지요. 남편은 그때 의료보험공단에 다녔고 저는 별다른 직장이 없었거든요.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저와 친정 부모님이 나올 때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앉아계셨습니다. 그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니 참 이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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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후숙씨 시아버지가 손녀를 왼팔로 안고 있는 모습.
시간이 흐른 뒤에 남편이 이야기를 하더군요. 아버님이 그때 그런 건, 팔에 의수를 하고 계셔서였다고 말입니다. 6·25전쟁 때 포탄에 맞아 오른쪽 팔을 잃게 되었다고 그러더군요. 혹시 제가 놀랄까 봐 감추려고 조심하셨던 것입니다. 순간 남편에게 화가 나 말했습니다. "아니, 나쁜 짓을 해서 팔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죠?" 그러면서 "아, 6·25전쟁이란 게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50년 6·25 전쟁. 그때 아버님은 스물여섯 신혼이셨다고요. 아내와 딸 하나를 두고 전쟁터로 가셨던 아버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같은 해 경북 칠곡전투 때 다치셨단 말을 들었습니다. 포탄 파편에 맞아 오른팔은 어깨부터 결딴이 났고 왼팔도 흉터투성이였다고 말입니다. 피가 너무 많이 나 병원에서도 다 죽었다고 했다는데, 살아오셨으니 시어머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지. 다른 사람들처럼 무용담을 말하셨을 법도 한데, 아버님은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무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의수나 상처에 우리들이 혹여 놀라지나 않을까 언제나 조심하셨던 기억만 가득합니다.
저희 결혼 이듬해, 부산에 우리 신접살림 보러 오셨던 때를 기억하시는지요. 이것저것 음식을 차려드리고 평소 잘 쓰지 않는 작은 방에 들어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옷걸이와 벽 사이의 공간에 웬 팔 하나가 끼워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버님의 의수였습니다. 갓 시집온 며느리가 놀랄까 봐 의수를 숨겨 두신 것입니다. 전 그때 의수를 처음 봤습니다.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집안 며느리 3명 모두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큰형님은 "그때처럼 놀란 적이 없다"며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아버님이 외출하실 때면 제가 직접 의수를 매어드리고 흰 장갑까지 끼워 드리곤 했는데…. 이제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가 꼭 7년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왼팔로 덩실덩실 안아주셨던 손녀딸 소희가 올해 벌써 고3이 됐습니다. 한 팔로도 마늘농사 너끈히 지어내셨던 아버님. 손주 두 명이 좋다고 달려들면 하나씩 손을 잡아주지 못해 그 왼팔에 한꺼번에 매달렸습니다. 팔 하나로 손주 두 명을 다 안으셨습니다. 무뚝뚝하셨지만 정이 많으셨습니다. 평생 전쟁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은 그 고생 모르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정정당당해야 할 아버님의 의수가 구석에 치워진 것처럼, 나라를 위해 희생한 기억을 숨기고 사셨을 아버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남편이 1963년생이니, 아버님이 전쟁에서 살아오시지 않았다면 없었을 사람입니다.
1979년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1급 전기기사 시험을 준비하던 내게 아버지가 다가왔다. "네가 보고 있는 책이 내 것과 똑같구나." 아버지는 건넌방에서 색 바랜 보자기에 싸인 책 한 꾸러미를 가져와 그중 한권을 보여줬다.
두 책은 '전기기기 이론'이라는 제목이 같을 뿐 아니라 페이지마다 실린 내용까지 똑같았다. 내 책은 한글로, 아버지 책은 일본어로 돼 있다는 것만 달랐다.
한참 동안 회상에 잠겼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1951년 신혼이었던 아버지는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산에 피신했다. 어느 날 먹을 걸 챙기려고 잠깐 마을에 내려왔다가 인민군에 들키고 말았다. 그 인민군은 총을 겨눴고, 죽음을 예감한 아버지는 숨이 턱 막혔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안타까워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인민군 병사가 아버지에게 등에 멘 보따리를 풀라고 했다. 보따리를 풀자 책 몇 권이 펼쳐졌고, 인민군 병사는 내가 공부하던 것과 같은 바로 그 책을 집어들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인민군 병사는 "나중이 되면 이 사람과 같은 기술자가 필요하오"라고 말하며 아버지를 풀어줬다. 이 책 한권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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