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굶주림에 지친 내 앞에 나타난 새어머니… 당신은 '꿀꿀이죽'을 팔아

namsarang 2010. 5. 3. 22:01

[나와 6·25]

굶주림에 지친 내 앞에 나타난 새어머니… 당신은 '꿀꿀이죽'을 팔아 가족을 살려내셨죠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석남준 기자 namjun@chosun.com

         안준용 기자 jahny@chosun.com

한흥삼(64·대전시 유성구)

[30] 한흥삼씨 '새어머니의 꿀꿀이죽'

한흥삼(64·대전시 유성구)

 

어릴 적 기억은 희미하고 단편적이다. 우리 집은 벼농사를 지었고, 가끔 메밀국수를 해 먹었다.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친어머니가 큰 가마솥에 물을 끓이며 솥 위에 국수기계를 세웠다. 온 식구들이 힘주어 매달리며 국수가락을 뽑을 때 어머니는 내가 제일 작다며 맨 뒤에 매달리게 했다. 1950년 평안남도 임흥리 46번지, 친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여름은 그랬다.

평화로운 나날이 깨진 건 그해 가을 이후였다. 북한군은 북쪽으로 밀려갔고, 유엔군이 올라왔다. 어느 날 유엔군 3명이 우리 집 마당 토끼에게 먹이를 주던 모습이 기억난다.

곧이어 1·4 후퇴가 있었고 우리 가족도 피란길에 올랐다. 몸이 아픈 할머니와 큰형을 제외하고 우리 가족 7명과 결혼한 큰 누나 가족 5명이 길을 나섰다. 아버지는 "머지않아 곧 돌아올 것"이라며 며칠분 식량만 싸게 했다.

피란길 공습에 친어머니 잃어

난 아버지 등짐 위에 목말을 탔고, 우리는 황해도의 한 텅 빈 집에 도착했다. 남들이 버리고 간 정말 '맛있어 보이는' 사과껍질을 배부르게 먹었다.

남쪽으로 향하길 한 달쯤. 오산으로 가는 국도를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비행기가 나타나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나는 도로 옆 개울 구렁텅이에 뛰어들었다. 총알 소리가 '투두둑'했고, 머리를 감싼 팔꿈치와 무릎 사이로 총알이 지나가면서 눈(雪)이 튀었다.

비행기가 지나가자 우리는 근처 빈집으로 대피했다. 인원을 세어보니 어머니와 동생·매부가 없었다. 아버지와 형·누나가 찾는다고 나갔다가 어린 동생만 안고 돌아왔다. 어머니와 매부는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린 나는 슬픔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며칠간 굶은 탓에 배가 고프다는 생각만 들었다. 또 비행기가 다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1월 말쯤이었던가. 오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언제 밥을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총알도 피했던, 돌도 지나지 않은 젖먹이 어린 남동생은 결국 굶주림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동생을 인근 야산에 묻었다고 한다. 어느덧 12명이던 우리는 9명으로 줄었다.

1960년대에 찍은 한흥삼씨 새어머니의 사진.
얼마 후 인천에 피란민수용소가 들어섰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곳에 가면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걸어서 인천까지 갔다. 하지만 그곳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와 형이 고물·철조각·총알 탄피 등을 주워 팔아 쌀을 조금 사오면 밀기울을 넣어 미음을 만들어 먹으며 생명을 근근이 이어갔다. 그렇게 끼니를 때우는 생활을 못 버티던 누나들은 모두 교회 고아원에 가고 큰 누나도 조카 셋을 데리고 살 곳을 찾아 떠나갔다. 둘째 형은 탄피를 주으러 다니다가 폭탄이 터져 왼쪽 손목이 부러져 손목을 잘라냈다.

가족들은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고 아버지가 일을 나간 사이 나는 하루종일 방치된 채 굶주렸다. 말할 사람도 없고 나를 찾는 사람도 없는 어려움 속에서 몸은 쇠약해져만 갔다.

그런 나를 살려준 건 전쟁이 끝나고 3년쯤 지나 아버지께서 데려오신 새어머니였다. 친어머니는 잘 기억 못하지만 새어머니 얼굴은 생생히 기억한다. 여장군이라고 할까. 대범하게 생긴 새어머니는 배포가 크셨다. 나는 그런 새어머니를 잘 따랐다. 난 새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던 우리 집 상황을 바꾼 것도 새어머니였다. 새어머니는 송도 가는 길목 '조개고개'라는 곳에 집을 얻고, 그곳에 '꿀꿀이죽'을 만들어 파는 가게를 차렸다. 재료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재료를 모아다가 양념을 해서 끓였던 것 같다. 꿀꿀이죽 가게는 5~6년 동안 대히트를 쳤고 우리 가족은 먹고사는 걱정을 덜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재료 모아 끓여

나는 그런 새어머니를 '새'어머니라 밝히지 않았다. 그냥 내 어머니였다. 초등학교 6학년 운동회 때 새어머니가 온다고 해 신이 나 열심히 뛰어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 3학년 때만 해도 달리기를 시작하자마자 넘어질 정도로 몸이 약했던 나였다. 새어머니께서는 그때 "우리 아들 잘 뛴다"며 춤을 덩실덩실 추셨다.

경남 밀양에 사시던 새어머니는 전쟁통에 온 가족을 잃었다. 남편도 자식도 모두…. 정신을 잃을 정도로 허둥대다 인천으로 흘러와 아버지와 만났다. 두 분은 결혼한 뒤에도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분께 자식은 나 하나였고 나에게 어머니는 그분 하나였다.

그토록 의지했던 새어머니는 56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 때문이었다. 독일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내가 말씀드리기도 전에 내 친구 하나가 유학 얘기를 해버린 것이다. 새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쓰러지셨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독일 유학이 확실해지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어리석은 내 결정이 평생의 후회로 남게 됐다.

56세 젊은 나이에 세상 떠나

새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년 후 나는 유학을 떠났고, 새어머니 생각을 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독일에서 장인(匠人)에게 주는 마이스터 자격을 획득했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과학기술대학교 창립 일원으로 활동했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기계공학 분야 기술교육원·초빙교수로 26년간 학생들 교육에 힘썼다. 총알이 비 오듯 하는 벌판 국도 위에서 살아남아 또 다른 어머니를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모든 기억이 이렇게도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공산당원 친척이 군인가족인 우릴 돌로 처형하는 '石殺 명단'에…

  • 조성희(67·미국 플로리다주)
 1950년 우리 가족은 서울 삼각지 육군본부 관사에 살았다. 아버지 조용일 소령은 육사 2기로 육군병참학교 부교장이었다. 그해 6월 25일 아침 일찍 아버지는 비상전화를 받고 급히 출근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중림동 외갓집으로 피신했다. 북한군이 너무 빨리 내려오는 바람에 우리 가족과 외갓집 식구들은 피란을 못 가고 3개월간 서울에 갇혀 지냈다. 공산군 치하의 세월은 참으로 길었다. 그들은 중림동 성당에 사람들을 잡아다가 인민재판을 열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죽였다. 우리 가족도 위험했다. 외가 쪽 6촌 중에 공산당원이 한명 있었다. 그는 우리 가족을 '석살(石殺)' 명단에 올렸다.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였다. 석살이 뭔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총알이 아까워 돌로 쳐 죽인다는 뜻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어찌나 끔찍했던지….

어머니는 우리 4남매를 데리고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친척집 지하실, 성당 지하실을 전전했다.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미군이 들어오니까 뛸 듯이 기뻤다. 어머니는 남대문로에서 걸어가는 미군 장병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휴전이 될 때까지도 아버지 행방은 몰랐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한 군 관계자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전쟁이 막 터지자 육군병참학교 소속 군인들이 미아리 전투에 참가했단다. 우리 군 군수물자는 턱없이 부족했고, 부교장이던 아버지가 현장 상황을 보러 지프를 타고 갔다가 북한군에게 잡혔다고 했다. 아버지는 서울대병원 약창고에 갇혔는데, 그곳에 폭발로 불이 나면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서울대병원은 전쟁 중 그곳에서 죽은 의사, 간호사, 국군을 추모하기 위해 1960년대 초 '이름 모를 자유전사비(碑)'를 세웠다. 어릴 적 제막식에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니 戰史]

[12]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 최권삼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왼쪽)이 USS 매킨리호에 승선해 인천상륙작전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살림 제공

"敵 보급로 끊고 후방 차단"… 성공확률 5000분의 1 뚫어

맥아더 장군은 1950년 6월 29일 수원에서 한강방어선을 살펴본 뒤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북한군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전세를 한번에 뒤집는 대담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울을 조속히 탈환해야 한국 국민들에게 정치적·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7월 초 맥아더 사령관 지시에 따라 미 극동사령부는 '100-B(인천)' '100-C(군산)' '100-D(주문진)' 등 세 가지 상륙작전 계획을 검토했다. 이 중 100-B 계획을 채택, '작전계획'으로 발전시켰다. 7월과 8월에는 북한군 공격이 예상 외로 강해 상륙작전을 감행할 여유가 없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처음부터 순풍을 탄 것은 아니었다. 미 합참뿐만 아니라 극동군 해군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유는 ▲인천은 간만의 차가 9m에 달하고 ▲낙동강 방어선과 거리가 멀어 각개 격파 위험이 크며 ▲원거리 상륙으로 상륙용 선박이 부족하고 ▲병력 차출로 낙동강 방어선 유지가 어려워지고 ▲병력 차출로 일본 방어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 등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은 5000분의 1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8월 23일 도쿄 미 극동사령부에서 미 육·해군 지휘관들이 상륙 장소를 결정하기 위한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 여기에서 맥아더 장군은 45분간의 브리핑으로 참석한 지휘관들을 설득했고, 결국 미 합동참모본부는 인천상륙 작전 계획을 최종 승인하였다. D-데이는 9월 15일이었다.

맥아더는 상륙 부대로 미 제10군단을 편성하고 극동군 참모장인 알몬드 육군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했다. 미 7함대를 주축으로 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부대장 스트러블 중장)는 함정 261척을 동원해 미군 2개 사단(1해병사단·7사단)과 한국군 2개 연대(17연대·제1해병연대) 등 한·미 연합병력 7만5000여명을 상륙시켰다.

북한이 유엔군의 인천 상륙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9월 13일쯤 미 해군 함정이 인천 앞바다 비어수도에 출현한 이후였다. 다음날 북한군은 제18사단 22연대를 인천으로 이동시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세기의 도박'으로 불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 일대에 투입된 북한군 13개 사단의 주력은 후방이 차단됐고, 이어 미 제8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의 주력은 일거에 붕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