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지구 반바퀴를 돌아 찾아온 전쟁터 우리 부대만 하루 100명 넘는 사상자가

namsarang 2010. 5. 4. 22:25

[나와 6·25]

지구 반바퀴를 돌아 찾아온 전쟁터 우리 부대만 하루 100명 넘는 사상자가…

정리=조의준 특파원 joyjune@chosun.com

[31] 콜롬비아 참전용사 갈비스씨 '우리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호세 엘리 로하스 갈비스(81·콜롬비아 참전용사)

내 옆에 있던 종군기자 피 흘리며 죽어가고…
부상당한 미군 부축해 죽을 힘 다해 걷고…
산화한 전우를 기억하며 6·25를 책으로 펴내

호세 엘리 로하스 갈비스(81·콜롬비아 참전용사)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 한국. 그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콜롬비아군이 참전하기 시작한 것은 1951년 5월부터였다.

당시 나는 수도 보고타에서 회계사가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콜롬비아군 소위였던 내 친구가 함께 참전하자고 권유했고, 나는 21살 젊은 시절 호기심에 이끌려 참전하기로 했다. 1952년 2월 육군보병학교에서 한달쯤 군사훈련을 받았고, 따로 위생병 교육도 받았다.

한국으로 가는 여정은 길었다. 보고타에서 수송기로 콜롬비아의 항구 도시 카르타헤나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2000여명의 유엔군 동료들과 함께 미군 수송선 보도인(Beaudoin)호에 올랐다. 배는 파나마 운하를 지나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잠시 머무른 뒤 일본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일본 사세보 항구에서 며칠간 정박한 후 마침내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다시 트럭과 기차를 번갈아 타고 며칠을 간 끝에 1952년 6월 23일 강원도 김화지구에 다다랐다. 도착과 동시에 전투에 투입됐다. 그곳에선 몇 개월간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 탈환전이 벌어졌다. 7월 4일 함께 간 콜롬비아 동료 중 전사자가 나왔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전투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나는 위생병 교육을 받고 왔지만 전투 현장에서는 갑자기 공병(工兵)부대에 배치됐다. 전장(戰場)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수류탄으로 군데군데 움푹움푹 파인 곳을 찾아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한가운데서도 무너진 진지를 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 걸려 진지를 보수해놓아도 중공군은 단 몇초 만에 파괴시켜버렸다. 적들이 때때로 한밤중에 기습하는 바람에 온갖 함정과 장애물들을 설치하면서 밤잠을 자지 못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중공군은 엄폐물을 세워놓고 끊임없이 기관총을 쏘아댔다. 몸을 숨기려면 잠시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하루살이 목숨만큼이나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살아남은 걸 보니 천운이 따랐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모든 가톨릭 성인(聖人)들에게 목숨만은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갈비스씨가 6·25 전쟁에 참전한 뒤 발간한 단행본‘날짜 변경선 넘어’의 표지.
중공군들은 교묘한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들은 종종 개나 고양이 꼬리에 깡통을 매달아 풀어놓기도 했다. 그 소리에 장병들은 적이 쳐들어오는 줄 착각하고 깜짝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 시끄러운 소음은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9월 초 우리 부대는 강원도 철원으로 보내졌다. 그때는 본래 임무대로 위생병으로 싸웠다. 그곳에서 우리 콜롬비아군은 젖먹던 힘까지 내서 싸워야 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허공으로 쏘아올려진 조명탄이 까만 밤하늘에 천천히 떨어지면 수많은 중공군과 유엔군 시신으로 뒤덮인 전장이 드러났다. 나는 총탄을 맞은 한 미군 소위의 상처를 알코올로 닦고 모르핀 주사를 놓았다. 그가 안전한 곳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비틀거리며 걷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무서운 건 중공군뿐이 아니었다. 적도 근처의 나라에서 겨울을 겪어보지 못했던 나는 한국의 겨울이 치가 떨리도록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추운 어느 겨울날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이 우리 부대에 방문, 콜롬비아 국기에 미국 대통령의 상징을 달아줘 모두가 기뻐했던 일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1953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1월 25일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미군이 싸우고 있는 티본(T―bone)능선에 동료 세 명과 함께 위생병으로 파견됐다. 나는 전투기가 투하한 폭탄으로 생긴 구덩이로 부상자들을 끌고 와 치료했다. 오후 3시가 되자 무기와 탄약 심지어 병사까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사진 촬영을 하러 온 한 종군기자가 총탄을 맞고 옆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한 푸에르토리코 출신 미군 병사는 나에게 "이봐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다면 땅에 껌처럼 붙어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뱀처럼 배를 바닥에 바짝 붙이고 기어다녔다. 콜롬비아군이 소속된 유엔군 부대에서만 하루 100명이 넘는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나 잔인한 순간들이었다.

3월 12일 후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 부대가 다시 전방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렸다. 솔직히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다행히 며칠 후 콜롬비아로 돌아간다는 통보를 받았다. 우리는 부산에 내려와 귀국하는 선박에 승선하기 전에 UN기념공원에 들렀다. 우리는 콜롬비아 전사자들의 묘지에서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산화한 전우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한국전 참전 이후 나는 지구 반대편의 전쟁터를 기억하며 '날짜 변경선 넘어'(Despues Del Meridiano 180)란 책을 썼다. 이 책의 마지막에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아디오스(Adios·안녕) 한국이여, 우리는 한국을 떠나는 날 우리의 피와 고통이 헛되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신들이 '우리는 자유다. 평화를 찾았다'고 저 바람과 들판과 산들에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2국민병으로 전쟁터 나간 아버지… 어느 날 이름 석자 적힌 시커먼 종이만 돌아와

  • 곽인식(72·경기도 광주시)
곽인식(72·경기도 광주시)
1950년 12월 35세였던 아버지는 '제2국민병'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당시 12살이었던 나는 '참전'이란 단어가 뭘 뜻하는지도 몰랐다. 농부였고, 무뚝뚝하지만 나와 동생 두 형제에겐 한없이 자상했던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듬해 봄이 되자 국민병으로 동원된 동네 청년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날마다 동구 밖을 쳐다보셨다. "20대들도 저렇게 돌아오는데 네 아버지는 왜 아직도…." 그러고도 몇 개월이 지났지만 아버지 소식은 없었다.

그해 6월 '곽봉준 전사 통지서'가 날아왔다. 시커먼 종이 한 장에 아버지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하늘이 무너졌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으니 '설마…' 하며 기다렸다. 보름 후 집에 흰 광목으로 싸인 조그마한 상자가 왔다. 겉에는 '고(故) 육군 일등병 곽봉준'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에게 큰절을 올리게 하고 "너희 아버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거룩하게 전사했다. 너희는 아버지의 높은 뜻을 받들어 이다음에 커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고 하시곤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다. 혼자 된 어머니는 손수 논두렁 가래질을 하면서 우리 형제를 키우셨다. 어머니는 5년 전 돌아가실 때까지 이 전사통지서를 장롱 깊은 곳에 넣어 보관하셨다.

철이 들면서 나는 아버지가 육군 제3사단 23연대 1대대 3중대 소속으로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2국민병으로 동원된 아버지는 그해 1월 굳이 현역으로 자원입대해 용감히 싸우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난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하게 됐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 환갑이 넘은 2000년 1월 아버지의 부대를 직접 보고 싶어 23연대장에게 편지를 썼다. 연대장은 흔쾌히 승낙하더니 장병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줬다. 며칠 후 강원도 철원에 있는 부대를 방문했고 장병들 앞에서 '6·25와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90분짜리 강연이었는데 TV를 통해 내무반에서 강의를 들은 병사들은 내무반이 떠나가도록 박수를 쳤다고 한다. 늠름한 후배들을 보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봤다.
 
 
 [미니 戰史]

[13] 9·28 서울 수복… 행주·마포·신사리서 연합군, 한강 도하 인천상륙 2주 만에 수도 서울 완전 회복

  •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김충령 기자 chung@chosun.com

박진영 기자 jyp@chosun.com

심현정 기자 hereiam@chosun.com

 

인천상륙작전으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유엔군은 서울 수복을 위한 진격을 개시했다. 미 제1해병사단(국군 해병연대 배속)은 서울의 서쪽에서 시가지를 향해 공격했고, 미 제7보병사단(국군 제17연대 배속)은 서울의 남쪽에서 북한군 증원 차단과 함께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상하는 미 제8군과 연결하도록 했다.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2만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을 방어하려 했다. 그들은 서울의 시가지 교차로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전 준비를 갖추는 동시에 연희고지와 안산에서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따라 서울 서쪽과 남쪽에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한·미 연합군은 행주와 마포, 신사리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연희고지와 망우리, 구의동 일대의 북한군 진지를 공격해 9월 26일까지 서울 시가지의 절반 정도를 점령했다. 27일에는 공격 부대가 삼각지와 남대문, 회현동 일대의 북한군 잔적을 격멸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공격 부대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고, 28일 북한군의 저항은 끝났다. 서울은 인천상륙 후 2주일, 북한군에게 피탈당한 지 3개월 만에 완전히 수복되었다.

29일 정오 중앙청에서는 감격의 수도 탈환식이 거행되었다. 이 행사를 통해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계했으며,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전쟁에서 적의 침공으로 상실했던 수도를 되찾는다는 일은 어느 한 전투의 승리 또는 어느 한 지역의 회복과는 다른 특별한 의의가 있는 일이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시점에 퇴로를 차단당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산악지대를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때 패잔병이 되어 38선을 넘어간 북한군 병력은 2만~3만명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