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만화가 1세 임수씨 '난 만화로 전쟁을 치렀다… 이름하여 선무공작대'
"전시엔 심리전이 중요" 붙일 만한 곳엔 다 붙여 중공군 6명 투항시켜
대장이던 우경희 화백은 후에 인기 삽화가로 날려
난 만화 '거짓말 박사'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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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수(본명 임영의·83·서울 동작구)
1927년 개성에서 태어나 7살 때부터 일본 전쟁만화를 섭렵하며 만화가 꿈을 키웠다. 외아들이 만화를 그리겠다니 부모님은 "환쟁이(그림 그리는 사람)는 빌어먹는 직업"이라며 노발대발하셨다. 담뱃대로 매도 많이 맞았다. 당시에는 만화를 가르쳐줄 사람도, 만화를 그릴 종이도 없었다. 친구들이 골목에서 뛰놀 때 혼자 책상에 앉아 만화를 그렸고, 종이가 없으면 집 벽지에다 그렸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만화만 그렸다.
1947년 7월 만화 5점을 들고 개성의 USIS(미국 문화원) 미술실을 찾아갔다. 당시 USIS는 반공 포스터를 제작했는데 만화를 그리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내 작품을 본 미국인 원장은 "OK"를 연발했다. 그곳에서 3살 많은 미술실장 우경희 화백을 만났다. 일본 동경 제국미술학교를 나와 개성에서 고등학교 미술교사로도 일했던 그는 순수미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만화에 열중하던 내게 "이게 그림이냐. 이런 것에 미치면 네 인생도 끝장"이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쏘아댔다. 우 화백 밑에서 꽤 고달팠다.
전쟁이 터지자 USIS는 폐쇄됐고 직원 20여명도 뿔뿔이 흩어졌다. 생계가 막막했던 나는 1951년 4월 말 강화지역 유격대에 들어갔다. 처음엔 국군 1사단 직속으로 편성됐다가 나중에 미군 소속으로 바뀐 부대다. 당시에는 '5816 유격대' '국군 특수부대'라고도 불렸다. 활동 무대는 황해도 연백군, 경기도 개성시와 개풍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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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수씨가 6·25전쟁 당시 유격대 선무공작대에서 활동하며 그린 만화 전단을 재현한 그림. 전단에는 중국어로‘생명과 안전을 보장한다’,‘ 빨리빨리 오시오, 나는(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임수씨 제공
운명의 장난일까. 입대 직후 부대에서 우 화백을 봤다. 적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내용 등을 담은 전단·포스터를 만들어 뿌리는 '선무공작대' 대장이라고 했다. "혹시 날 보지 못했겠지." 솔직히 그와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다.
3주일쯤 지났을까. 하루종일 유격·제식 훈련을 받던 어느날, 특무대원 4명이 나를 강화읍 본부로 데려갔다. '선무공작대' 현판이 걸린 한옥에 우 화백과 유격대장 안일채 중위가 앉아 있었다. 우 화백은 "이 친구가 만화 하나는 잘 그려요. 글도 잘 쓰고 여러모로 쓸모가 많습니다"라고 나를 소개했다. 우 화백은 내 입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운명도 참 기구하구나 생각했다. 안 대장은 나를 선무공작대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선무공작대는 유격대의 여러 직할대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직할대인 군예대에는 나중에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방랑시인 김삿갓' 등으로 유명한 한명숙·명국환 등도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만화로 심리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작업반'은 7인 1조, 총 3개 조로 구성됐다. 인쇄기가 없어 하루종일 만화 밑그림을 30여장씩 그렸다. 내가 밑그림을 그려 넘기면 당시 개성 호수돈여고 출신 공작대원 6명이 색을 입혔다. 작업은 매일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전쟁 중 내 무기는 총칼이 아닌, 그보다 더 무서울 수 있는 '펜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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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수씨의 데뷔작‘거짓말 박사(1955년)’의 주인공(사진 위). 아래는 어린이 만화 도서‘노아의 대홍수 그 진실을 밝힌다’(2003)의 표지. /임수씨 제공
작전이 개시되면 전투부대의 도움을 받아 적지로 건너갔다. 어깨에는 장총, 양손에는 각각 풀통과 빗자루를 든 채 적진 후방 곳곳을 누비며 전단과 포스터를 붙였다. 한 조당 호위병 5명이 따라붙었고, 그들이 정찰을 나가 '안전한 곳'이라고 신호하면 우리가 따라 들어갔다. 불과 30m 앞에서 전투가 벌어져도 우리 임무는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후퇴를 할 때는 풀통과 빗자루를 버린 채 총만 들고 달아났다. 3개 조가 붙이는 전단은 하루 100여 장에 달했다. 1년 전만 해도 만화를 극도로 멸시하던 우 화백은 내게 "전시 만화 심리전이 아주 중요하다"고 몇 번씩 강조했다. 그는 "장소 불문하고 붙일 만한 곳엔 다 붙이라"고 했다. 전쟁은 불과 몇 달 만에 그의 꼬장꼬장하던 만화관마저 바꿔놓았다.
1951년 9월 25일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국군은 적의 편성과 동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밤에 적지인 개풍군 해창포에 기습상륙해 풍덕리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 공세에 밀려 다시 해창포까지 후퇴했다. 활로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중공군 장교 한 명이 두 손을 번쩍 든 채 풀숲에서 걸어나와 우리 쪽에 투항했다. 그의 손에는 '이 그림을 보고 넘어오라. 생명을 보장한다'는 내가 그린 만화 전단이 들려 있었다. 귀순 장교는 중공군 제1야전군 194사단본부의 문화소대장 '서춘발'. 그는 "인민군은 동부전선으로 이동했고 대신 중공군 2개 사단이 연백지구와 개풍군에 각각 포진하고 있다"는 등 정보를 털어놨다. 그 후에도 중공군 5명이 차례로 만화 전단을 들고 투항해왔다. 우리 군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나는 그 공로로 유격대장 표창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우 화백은 삽화가, 나는 만화가의 길을 걸었다. 우 화백은 최인호의 '불새' 등 조선일보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리며 1960~7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삽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나는 1955년 만화 '거짓말 박사'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흑석동에 '임수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방 한 칸의 작은 작업실이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내 만화에 관심이 많다는 미대생 8명을 제자로 받기도 했다. 지금은 가장 유명한 만화가가 된 이현세도 학창시절 "제자로 받아달라"며 편지를 보내왔다. 우 화백과 나는 한 달에 2번 정도 만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그도 "자네 만화가 최고"라며 내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가 미국 시애틀로 이주한 1983년부터는 주로 전화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지난 2000년 우 화백은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지만 왠지 저세상에서도 그를 만나 함께 만화를 그리게 될 것만 같다.
김경자씨, 아버지께 드리는 40년 만의 사죄 편지
다리 저는 아버지가 창피해 상이군경 가족 증명 서류 회사에 안냈어요
전쟁터에서 총 맞은 걸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올해엔 백합과 용돈을 꼭 마련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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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자(60·인천 중구)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8월 16일, 제가 사랑하는 김현태씨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김경자입니다. 저는 30년 전부터 아버지께 용서를 빌고자 (편지를) 썼다가 지우기를 수없이 하며 한 번도 보내지를 못하다 이번에 용기를 내어 봅니다. 우리 아버지 하늘나라 가시기 전에 꼭 용서를 빌고 싶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4개월하고 일주일이 되어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셨지요. 그 날이 아버지 생신날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군생활을 하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지금 여쭈어 보자니 아버지가 요즘은 잘 알아듣지를 못하시고, 옛날에는 여쭈어 볼 시간도 없었고 아버지가 엄하시고 무서웠거든요.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신 지 일년 정도 되어 왼쪽다리 복사뼈에 관통상을 당하셨고 일년을 병원에 계시다가 명예 제대를 하셨지요. 고향에 오셨지만 그때 시절에는 상여금도 적었고, 우리가 사는 작은 섬에서 강원도 부대까지 다녀오시려면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작은 섬(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모도리)은 하루에 배가 한 번밖에 오지 않았다지요.
아버지는 상여금을 포기하시고 고향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사시며 저희 6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저희들은 중학교를 가려면 육지로 가야 했는데 작은 섬에서 먹고살기도 힘든데 공부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죠.
그래도 저는 학교가 다니고 싶었고 인천에 사시는 이모님 댁을 찾아갔었지요. 이모님은 작은 구멍가게를 하셨는데 저는 낮에는 가게일을 도와드리고 밤에는 야간중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낮에 가게를 보며 엎드려 숙제를 할 때면 동네 꼬마들이 몰래 들어와 물건을 훔쳐가곤 해서, 채 일주일도 못 다니고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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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자씨 아버지
어린 동생들을 두고 마냥 놀 수 없어서 양재(洋裁)며 편물(編物) 같은 기술을 배우고 양장점에서 일하다가 스물한살에 스타킹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지요. 중졸 이상만 뽑는다기에 중학교를 졸업했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들어갔습니다. 회사에서는 상이군경 가족은 혜택을 주겠다며 증서를 가져오라고 했지만 저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리를 심하게 저시는 아버지가 창피했거든요.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너무도 후회스럽고 아버지께 죄스러움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회사를 그만둘 때야 안 사실이지만 그 혜택은 무상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서류를 제출했으면 나도 동생도 힘들지 않게 공부를 했을 텐데…. 그래도 6남매 중 바로 아래 동생과 저만 공부를 못했고 그 아래 동생들은 부모님과 저희들이 열심히 협력해서 공부를 시켰지요. 다행히 동생들은 부모님 고생하시는 걸 알고 공부도 잘 하여 큰 남동생은 제약회사 중직(重職)으로, 또 다른 동생들은 각자의 자기 일을 가지고 모두 열심히 살았지요.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가기까지 부모님 고생이 많았다는 걸 잘 압니다. 저는 해마다 6·25를 잊지 않는답니다. 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셨으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너무도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아버지는 86세가 되셨지요. 지금은 팔십도 청춘이라지만 하늘나라 가시는 날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동안 아버지께 6·25 날이면 하얀 백합 한 다발과 용돈을 드리려 마음먹었지만 지금까지 못 해드렸습니다. 6남매 맏딸인 제가 또 6남매 맏며느리로 넉넉지 못한 집안과 결혼을 하다 보니 마음뿐이지 실천에 옮기지 못했답니다. 이제는 동생이 꽃집을 하니 꽃도 팔아주고 올해는 꼭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아버지는 요즘 연금도 조금씩 타시고 병원 치료도 무료로 받고 계시지요. 다리가 아프셔서 약을 잡수시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그래도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랍니다.
저도 이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답니다. 동생도 중학교 과정을 마쳤고요. 저희도 노인복지회관에 다닐 나이가 벌써 됐네요. 아버지 큰딸이 아버지께 용서를 빕니다.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를 그때는 제가 왜 그렇게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 오랫동안 건강하시고 저희 곁에 있어주세요. 아버지를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큰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