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 참전한 건 1952년, 24살 되던 해였다. 직업 군인인 나는 그리스 내전(1946~49)에 참여해 22개월간 지뢰 제거, 폭탄 설치 같은 다양한 실전 경험을 했다. 그래서인지 대대에서 유일하게 전투공병(工兵)으로 뽑혔다. 나는 미3사단 제3중대에 배속됐다. 그 부대엔 푸에르토리코, 호주군들도 섞여 있었다.
그 해 8월 6일, 삼평 167고지 전투에 기관총병으로 참가했다. 새벽부터 계속된 총격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머리 위로 적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참호로 몸을 날리는 순간, 왼쪽 다리가 어깨에 닿는 걸 느꼈고, 다리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총알은 바깥쪽 무릎을 관통해 안쪽 허벅지를 뚫고 지나갔다.
- ▲ 콘스탄티노스 흘레초스(82세ㆍ그리스 아테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눴다. 몸짓을 보건대 "네가 폭탄을 던져라" "폭탄은 아까우니 그냥 총으로 죽여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결국 자동소총을 든 적이 나에게 총을 세 번 쐈는데 총알이 나를 비켜 머리 위 참호 벽을 맞추는 바람에 흙더미가 무너져 내려 내 몸을 덮었다. 그 후 흙과 피땀이 범벅된 몸을 한 번도 씻지 못했고 포로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피부병을 앓았다.
정말 총탄이 아까워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적은 양쪽에서 나를 어깨에 메고 산등성이를 넘고 고무보트로 강을 건넌 후 또 어딘지 모를 산과 들로 이동했다. 고통이 너무 심해 기절할 것 같았지만 적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다리를 끌며 걸었다.
어느 산 중턱에 다다르자 여러 나라 포로들이 모여 있었다. '끝이구나, 여기서 처형되는구나'했는데 적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3일 밤낮을 더 끌고 갔다. 그렇게 도착한 포로수용소는 말이 수용소지, 넓은 산등성이에 큰 천막을 몇 개 쳐 놓은 곳이었다.
- ▲ 콘스탄티노스 흘레초스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1953년 6·25전쟁에 참전한 후 그리스 피레아 항구에 도착해 환영행사에 참석한 모습. /흘레초스씨 제공
적은 얼굴에 침을 뱉고, 수염을 당기는 등 온갖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점은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화상을 입은 호주 비행사 데이비드의 얼굴은 썩어서 피부 속으로 벌레가 기어다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뭇가지로 벌레를 꺼내 주며 위로의 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내 다리 역시 방치됐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다리가 부러진 양이나 염소를 돌본 경험을 토대로 근처 나무를 꺾어 다리에 부목을 대고 고정시키는 것으로 치료를 대신했다. 고통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 ▲ 그리스에 돌아가기 전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다리에 입은 관통상을 치료받을 때의 모습(오른쪽 아래 휠체어 탄 사람). /흘레초스씨 제공
피로와 영양 부족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는 다리를 절며 수용소 밖으로 걸어나가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도쿄의 한 병원이었고, 옆엔 형제처럼 친하게 된 푸에르토리코·호주 병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두 달간 치료를 받은 후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스 육군병원에서 내 다리를 본 의사는 "다리 길이가 다르니 성한 다리 일부를 잘라 상처 입은 다리에 붙여서 높이를 맞추자"고 했다. 너무나 화가 나 병원 안뜰을 한참 거닐었다. 결국 다리를 절더라도 성한 다리를 그대로 두는 방법을 택했는데, 걸을 때마다 무게 중심이 한 다리에 쏠리는 탓에 세월이 지나면서 양쪽 다리에 통증이 오고, 최근엔 허리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살아온 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오전엔 국립병원 행정원으로, 밤엔 재봉사로 악착스럽게 일했다. 가정도 꾸려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 아이는 공군 소령, 둘째 아이는 문화관광부 공무원이다.
젊을 땐 먹고 살기 바빠서, 나이 든 후엔 몸이 여의치 않아 한국에 갈 수 없었다. 대신 그리스 참전용사 전우회를 통해 한국 소식은 꼬박꼬박 들었다. 한국이 몰라보게 발전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운 한편 뿌듯했다.
사실 내게 '한국'은 아련한 아픔이다. 아직도 그곳을 생각하면 엄마를 부르며 우는 아이, 얼굴에 공포와 절망의 깃든 여인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금의 발전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딛고 일어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그 비극을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기억해 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