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적[36] 그리스 참전용사 흘레초스 '아직도 생생한 한국이라는 나라

namsarang 2010. 5. 13. 23:19

[나와 6·25]

적군들, 날 가리키며 "수류탄 아까우니 총으로 죽여라"

[36] 그리스 참전용사 흘레초스 '아직도 생생한 한국이라는 나라

 

'허벅지 부상입고 이송중 동료들도 전부 총맞고 쓰러져 참호 속에 혼자 누워있다 잡혀
포로생활 9개월간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 속에 화상 입은 호주 포로는 얼굴속에 벌레 기어다녀
제게 한국은 아련한 아픔입니다 엄마를 부르며 우는 아이… 공포와 절망의 빛이 깃든 여인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딛고 지금의 한국이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벌써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그리스 아테네에 살고 있는 내게 6·25는 아직 현실이다. 그때 입은 총상은 지금도 내 육체를 괴롭히고, 9개월여에 걸친 포로 생활은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건 1952년, 24살 되던 해였다. 직업 군인인 나는 그리스 내전(1946~49)에 참여해 22개월간 지뢰 제거, 폭탄 설치 같은 다양한 실전 경험을 했다. 그래서인지 대대에서 유일하게 전투공병(工兵)으로 뽑혔다. 나는 미3사단 제3중대에 배속됐다. 그 부대엔 푸에르토리코, 호주군들도 섞여 있었다.

그 해 8월 6일, 삼평 167고지 전투에 기관총병으로 참가했다. 새벽부터 계속된 총격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머리 위로 적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참호로 몸을 날리는 순간, 왼쪽 다리가 어깨에 닿는 걸 느꼈고, 다리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총알은 바깥쪽 무릎을 관통해 안쪽 허벅지를 뚫고 지나갔다.

콘스탄티노스 흘레초스(82세ㆍ그리스 아테네)
들것에 나를 싣고 운반하던 동료들도 차례로 총을 맞고 쓰러지자, 나는 꼼짝없이 참호에 남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적 두 명이 나를 발견했다. 북한군인지 중공군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하나는 러시아제 자동소총을, 다른 하나는 수류탄 두 개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중공군들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2인 1조로 다니며 하나가 쓰러지면 다른 하나가 죽은 이의 무기를 들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눴다. 몸짓을 보건대 "네가 폭탄을 던져라" "폭탄은 아까우니 그냥 총으로 죽여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결국 자동소총을 든 적이 나에게 총을 세 번 쐈는데 총알이 나를 비켜 머리 위 참호 벽을 맞추는 바람에 흙더미가 무너져 내려 내 몸을 덮었다. 그 후 흙과 피땀이 범벅된 몸을 한 번도 씻지 못했고 포로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피부병을 앓았다.

정말 총탄이 아까워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적은 양쪽에서 나를 어깨에 메고 산등성이를 넘고 고무보트로 강을 건넌 후 또 어딘지 모를 산과 들로 이동했다. 고통이 너무 심해 기절할 것 같았지만 적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다리를 끌며 걸었다.

어느 산 중턱에 다다르자 여러 나라 포로들이 모여 있었다. '끝이구나, 여기서 처형되는구나'했는데 적은 다른 포로들과 함께 3일 밤낮을 더 끌고 갔다. 그렇게 도착한 포로수용소는 말이 수용소지, 넓은 산등성이에 큰 천막을 몇 개 쳐 놓은 곳이었다.

콘스탄티노스 흘레초스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1953년 6·25전쟁에 참전한 후 그리스 피레아 항구에 도착해 환영행사에 참석한 모습. /흘레초스씨 제공
겨울이 되자 매서운 산바람이 살을 에는 것 같았다. 음식도 형편없었다. 수용소에 들어온 첫날 팔에 총을 맞은 푸에르토리코 병사와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은 호주 비행사와 셋이서 고기가 든 통조림 한개를 나눠 먹었다. 껍데기에 붙은 지방 덩어리도 나눠 먹었다. 수용소로 오는 도중에 길에서 우연히 발견해 챙겨뒀던 것이다. 그게 포로 생활 중 가장 호화로운 식사였다.

적은 얼굴에 침을 뱉고, 수염을 당기는 등 온갖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점은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화상을 입은 호주 비행사 데이비드의 얼굴은 썩어서 피부 속으로 벌레가 기어다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뭇가지로 벌레를 꺼내 주며 위로의 말을 하는 것뿐이었다.

내 다리 역시 방치됐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다리가 부러진 양이나 염소를 돌본 경험을 토대로 근처 나무를 꺾어 다리에 부목을 대고 고정시키는 것으로 치료를 대신했다. 고통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리스에 돌아가기 전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다리에 입은 관통상을 치료받을 때의 모습(오른쪽 아래 휠체어 탄 사람). /흘레초스씨 제공
그렇게 9개월 반을 보낸 후, 마침내 포로 교환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됐다. 풀려나고서야 알았다. 그전까지 적은 포로를 모조리 사살했는데, 전쟁 도중 포로 교환 협정이 맺어진 이후엔 자기네 포로를 돌려받기 위해 우리를 살려뒀다는 것을….

피로와 영양 부족으로 만신창이가 된 나는 다리를 절며 수용소 밖으로 걸어나가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 보니 도쿄의 한 병원이었고, 옆엔 형제처럼 친하게 된 푸에르토리코·호주 병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두 달간 치료를 받은 후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스 육군병원에서 내 다리를 본 의사는 "다리 길이가 다르니 성한 다리 일부를 잘라 상처 입은 다리에 붙여서 높이를 맞추자"고 했다. 너무나 화가 나 병원 안뜰을 한참 거닐었다. 결국 다리를 절더라도 성한 다리를 그대로 두는 방법을 택했는데, 걸을 때마다 무게 중심이 한 다리에 쏠리는 탓에 세월이 지나면서 양쪽 다리에 통증이 오고, 최근엔 허리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살아온 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오전엔 국립병원 행정원으로, 밤엔 재봉사로 악착스럽게 일했다. 가정도 꾸려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 아이는 공군 소령, 둘째 아이는 문화관광부 공무원이다.

젊을 땐 먹고 살기 바빠서, 나이 든 후엔 몸이 여의치 않아 한국에 갈 수 없었다. 대신 그리스 참전용사 전우회를 통해 한국 소식은 꼬박꼬박 들었다. 한국이 몰라보게 발전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운 한편 뿌듯했다.

사실 내게 '한국'은 아련한 아픔이다. 아직도 그곳을 생각하면 엄마를 부르며 우는 아이, 얼굴에 공포와 절망의 깃든 여인들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금의 발전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딛고 일어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그 비극을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기억해 줬으면 한다.
 
 

 조약국네로 불렸던 우리 집 아버지는 총살당하고…

  • 조용갑(71세·부산시 동구)
 

할아버지는 맞아 죽고… 이제 아들이 가문 전통 이어

경남 사천시 용현면에서 2대째 약국을 한 우리 집은 조약국(趙藥局)네로 불렸다. 증조할아버지(조경식)가 한약 약국을 했고, 할아버지(조성향)가 그 약국을 이어받았다. 아버지(조대규)는 해방 후 의용경찰대원으로서, 좌익들의 방화·파괴 행위를 막는 일을 했다. 그러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부모님과 나, 여동생 이렇게 네 식구는 경남 고성군의 큰 이모 댁으로 피신했다.

운명의 날인 1950년 8월 3일.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누군가 우리를 밀고했다고 한다. 그들은 부모님을 끌고 가기 시작했고,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어린 여동생까지 덩달아 끌려가게 됐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자식들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제발 저만이라도 살려주세요"라고 애걸복걸했다. 인민군은 "이쫑간나 여편네는 애기도 있고 귀찮구먼"하면서 풀어줬다. 어머니는 평생 그 순간을 생각하며 가슴을 쳤다. 아버지는 그 길로 지금의 삼천포 노산공원 자리로 끌려가 인민군이 준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총살당한 후 그 구덩이에 암매장됐다. 그때 아버지는 29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3일 후인 8월 26일, 좌익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천의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를 동네 입구로 끌고 가 "반동분자를 척결한다"며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도 동네 사람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결국 예순 두살의 할아버지가 현장에서 숨을 거두자, 그제야 할머니와 어머니가 풀려났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다. 나는 부산에서 고교·대학을 모두 야간으로 다니며 낮에 부산아동자선병원에서 급사로 허드렛일을 했다. 이후엔 30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고 1999년 정년퇴임 했다. 하지만 내가 집안의 전통을 잇지 못했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할아버지와 전공은 약간 다르지만 아들(조재영)이 우리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아들 재영이는 의학 분야에 뛰어들어 지금은 분당서울대병원 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 세상에 계신 할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실까. 살육으로 무너진 집안을 다시 세웠다는 보람으로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