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함북서 중령계급 소련 군사고문을… 황해도선 북한군 연대장급 2명 납치

namsarang 2010. 5. 18. 21:11

[나와 6·25]

함북서 중령계급 소련 군사고문을… 황해도선 북한군 연대장급 2명 납치

  • 최규봉(87·대한민국KLO기념사업회 명예회장)

     〈특별취재팀〉

최규봉(87·대한민국KLO기념사업회 명예회장)

[38] 美 첩보기관 켈로부대장 '최규봉씨의 6·25'


특공대원 6명이 팔미도 급습, 등대 불밝혀 인천 상륙작전 개시
중공군 가짜 대포 밝혀내…
51년 화력발전소 탈환에 특공대가 결정적 수훈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나는 광복 직후 김성(金星, 속칭 김별) 장군이 창설한 반공 지하단체 '양호단'에 입단했다. 서울에서 양호단이 해체된 뒤 우익단체 '백의사'에 흡수됐는데, 백의사가 미군 정보기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면서 나도 숙명적으로 그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1946년 초 북한 지역 정보 수집 임무를 성공리에 끝낸 뒤, 그해 5월 30일 미 24군단 방첩대(CIC) 정보원으로 채용됐다. 그때 '미 군정청 수사관 왕일(王一)'이란 가명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미군 철수를 맞아 대북 첩보를 계속 담당할 기관이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기구가 바로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LO)'다. '켈로'라는 이름은 KLO에서 나온 것이다. KLO 창설 당시에는 미군 정보팀에서 파견된 5명과 한국인 6명으로 구성됐다.

전쟁 발발 직전, 북한에선 남침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정보를 올렸지만 왠지 계속 묵살됐다. 1949년 12월 원산에서 연천으로 가는 북한군 열차를 탈취해 남으로 끌고 올 계획을 세웠다가 경찰이 우리를 공산당 프락치로 알고 습격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때 탱크 10여대와 대포, 탄약을 실은 화차를 끌고 왔다면 북한의 남침야욕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터진 뒤, 서울 함락이 임박하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몇몇 저명인사들을 찾아가 서울을 떠나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국군이 우세하다는 방송 때문인지 떠나지 않는 분들도 있었다. 조소앙 선생이 그랬다. 선생을 찾아가 "빨리 피신하셔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조 선생은 결국 납북돼 사망하셨다 하니 강제로라도 피신시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1951년 10월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고트(Goat)부대 훈련소에서 북파 훈련을 마친 KLO 부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최규봉씨 제공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팔미도에서 소형 보트를 타고 기함‘마운트 매킨리’로 복귀하는‘팔미도 6인방’.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유진 글라크 해군 대위, 연정 소령, 선원, 최규봉 대장, 존 포스터 육군 중위, 계인주 대령, 클라크혼 육군 소령. /최규봉씨 제공
1950년 9월 14일 밤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날 오후 7시쯤 우리의 고성능 무전기에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는 맥아더 사령관의 암호명령이 들어왔다. 우리 특공대는 6명. 클라크 해군대위와 클라크혼 육군소령, 포스터 육군 중위 등 미군 3명과 계인주 육군대령과 연정 해군소령, 그리고 나였다. 우리 배가 팔미도에 접근할 때 멀리 유엔군 전함에서는 인천과 월미도에 함포 사격을 했다. 우리 특공대는 팔미도에 있는 적 2개 분대를 급습, 팔미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등대를 켜는 작은 부품이 보이질 않았다. 1시간40분 만에 가까스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부품을 손으로 더듬어 찾아낸 뒤, 드디어 15일 오전 1시 50분쯤을 전후해 등대 불을 밝혔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팀장인 클라크 대위가 등대에 성조기를 걸자고 했다. 적이 아닌 우리 특공대가 등대를 켰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일종의 약속이었다.

작전이 성공한 뒤, 유엔군 함대의 기함 '마운트 매킨리'에서 맥아더 사령관을 만났는데, "바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그 성조기를 나에게 달라고 했다.

정전 후, 미국은 내게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성조기를 돌려 달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미국의 한 유력 언론사측에서는 10만달러를 줄 테니 넘기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성조기를 끝내 돌려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 나중에 맥아더 장군에게 돌려줬다. 그러자 맥아더 사령관은 감사 편지와 함께 자신의 친필 사인을 담은 대형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의 친필 사인이 담긴 사진. 맥아더 장군은 최규봉씨가 인천상륙작전 때 사용된 성조기를 돌려주자 답례로 감사편지와 함께 이 사진을 최 대장에게 보냈다. 현재 전쟁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1951년 4월 당시 최대 수력발전소인 화천발전소 탈환에도 우리 부대원들의 침투와 희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미 10군단은 막강한 중공군 때문에 이 지역에 들어가질 못했다. 특히 아무리 폭격을 해도 다음날이면 나타나는 전차와 대포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때 우리 부대원들이 적지에 침투했다. 알고 보니 적 대포 등은 전나무로 깎아놓은 가짜였다. 적들은 폭격이 끝나면 밤새 나무를 깎고 페인트를 칠해 다음날 아침이면 아군 정보기가 볼 수 있는 곳에 배치한 것이었다. 우리 대원들은 이 모든 것을 사진을 찍어와 미10군단에 알렸고, 벤플리트 군단장이 공격을 결심했다. 당시 중공군은 평소와 같이 유엔군이 폭격하는 동안 굴에서 잠을 자고 나오다 대부분 사살됐다. 당시 사망한 중공군은 1만5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헬기로 이곳을 둘러보다 화천 저수지에서 중공오랑캐를 격파했다해서 '파로호'로 이름 짓기도 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부대 규모도 커졌다. 본부가 대구로 내려가면서 피란민 중에서 공작대원을 발굴해 부대를 증편했다. 본부 산하에 '고트(Goat)''선(Sun)' '위스키(Whiskey)' 등 3개 부대를 편성했다. 1951년 11월엔 부대 명칭을 8240부대로 바꾸고 대원들을 선린상고 자리에 통합 수용했다. 나는 그때 공작과장으로 임명돼 대원들의 작전을 총지휘했다.

우리 KLO 부대원은 서울과 경주훈련소에 있는 대원과 백령도 등 서해안 도서지방과 북한에 침투해 있는 대원을 포함해 5000여명 정도였는데, 세상에는 10만~30만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적지에서도 신출귀몰하는 우리 부대원들은 전쟁 기간 중 북한엔 공포의 대상이었고, 국민들에게는 신화적 존재였다. 숫자 부풀리기는 적에 대한 심리전으로 활용되는 장점도 있었다.

1952년에 들어서는 분대 규모 작전팀을 적 후방에 항공기를 이용해 낙하시키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하룻밤에 100명 이상을 침투시킨 일도 있었다. 부대가 커지면서 특수 무전공작팀(특수공작대)을 양성했다. 침투한 대원이 육로로 돌아와 보고하지 않고 현지에서 무전기를 통해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그해 여름 함경북도에서 중령 계급의 소련 군사고문을 비행기로, 그해 말에는 황해도에서 북한군 연대장급 2명을 배로 납치해 왔다.

1952년 늦가을 북한에 흑사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만약 사실이라면 유엔군이 전장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말도 돌았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우리 부대가 나섰다. 대원 4명이 적 후방인 원산 도립병원에 침투, 환자 한명을 납치해왔다. 그 결과 이 병은 흑사병이 아니라 장티푸스로 판정이 났다. 이 작전에서 우리 부대원 1명이 적의 총에 사망했다.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6·25 전쟁 때의 흑사병 파문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전쟁 막바지 조병옥 박사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전쟁포로 석방 문제를 둘러싸고 조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각을 세웠는데, 경찰국장이 내게 찾아와 "조병옥, 기합 좀 주라"고 했다. 대원 몇명을 데리고 조 박사 이마에 가벼운 상처를 내주고 대문짝과 기물도 부수고 돌아왔다. 조 박사는 "대문 열어놨는데, 왜 담을 넘어오나. 자네들 맘대로 하고 가게나"하고 말했다. 마치 우리가 갈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다음날 조 박사는 커다란 붕대를 둘둘 감고 나와 기자회견을 했고, 범인들에 대해선 "아마 지금쯤 북한으로 도망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부대는 정전이 성립된 이후 공식적으로 해체됐지만, '켈로'라는 이름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미니 戰史]

[18] 중공군 1·2차 공세

  • 손규석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운산·희천서… 장진호에서 중공군, 공세 개시
유엔군 지도부, 적 과소평가… 중공군 2차 공세에 후퇴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추수감사절까지는 전쟁을 종료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 빨리 압록강과 두만강 선까지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1950년 10월 24일 10시, 국군과 유엔군은 '추수감사절 공세'를 개시했다. 청천강을 도하한 미 제8군은 압록강을, 함흥과 흥남을 점령한 미 제10군단은 장진호와 청진으로 향했다. 국경을 향해 진격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다음날 운산과 온정리 일대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습을 받았다. '중공군 제1차 공세'의 서막이었다. 은밀하게 압록강을 도하한 제13병단 예하의 5개 군이 적유령산맥 남단에 배치되어 운산-희천 방향으로 공격하고, 나머지 1개 군은 장진호 북쪽에서 아군의 전진을 저지했다.

10월 26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최초로 압록강변의 초산에 입성했지만, 다른 축선의 아군 부대들은 중공군의 저항으로 공격이 좌절되거나 포위상태에 처했다.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는 중공군 공세로 좌절되었다.

중공군의 개입을 인정한 맥아더 원수는 그들의 조직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다. 11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은 '크리스마스 공세'를 단행했다. 중공군은 다음날인 11월 25일 기습적인 반격, '제2차 공세'를 개시했다. 아군의 공세를 예상한 중공군은 제13병단이 적유령산맥 남쪽 일대에서, 제9병단이 장진호 및 개마고원 일대에서 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행히도, 유엔군 지도부는 중공군이 의용군으로 구성된 몇 개 사단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는 조직적인 지휘 체계를 갖춘 30개 사단의 약 30만 명이 투입되고 있었다. 중공군은 주공을 미 제8군의 우측방에 지향시켜 청천강 이남으로 진출했다. 동부전선에선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의 진격을 저지했다. 이로 인해 미 제2사단은 군우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계곡에서 상당한 인명을 희생한 끝에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12월 2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12월 5일엔 평양을 포기하고 38도선을 향해 남하했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역시 흥남지역에 집결, 해상철수를 단행함으로써 북한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