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규봉(87·대한민국KLO기념사업회 명예회장)
[38] 美 첩보기관 켈로부대장 '최규봉씨의 6·25'
특공대원 6명이 팔미도 급습, 등대 불밝혀 인천 상륙작전 개시
중공군 가짜 대포 밝혀내…
51년 화력발전소 탈환에 특공대가 결정적 수훈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나는 광복 직후 김성(金星, 속칭 김별) 장군이 창설한 반공 지하단체 '양호단'에 입단했다. 서울에서 양호단이 해체된 뒤 우익단체 '백의사'에 흡수됐는데, 백의사가 미군 정보기관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되면서 나도 숙명적으로 그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1946년 초 북한 지역 정보 수집 임무를 성공리에 끝낸 뒤, 그해 5월 30일 미 24군단 방첩대(CIC) 정보원으로 채용됐다. 그때 '미 군정청 수사관 왕일(王一)'이란 가명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미군 철수를 맞아 대북 첩보를 계속 담당할 기관이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기구가 바로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LO)'다. '켈로'라는 이름은 KLO에서 나온 것이다. KLO 창설 당시에는 미군 정보팀에서 파견된 5명과 한국인 6명으로 구성됐다.
전쟁 발발 직전, 북한에선 남침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정보를 올렸지만 왠지 계속 묵살됐다. 1949년 12월 원산에서 연천으로 가는 북한군 열차를 탈취해 남으로 끌고 올 계획을 세웠다가 경찰이 우리를 공산당 프락치로 알고 습격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때 탱크 10여대와 대포, 탄약을 실은 화차를 끌고 왔다면 북한의 남침야욕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터진 뒤, 서울 함락이 임박하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몇몇 저명인사들을 찾아가 서울을 떠나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국군이 우세하다는 방송 때문인지 떠나지 않는 분들도 있었다. 조소앙 선생이 그랬다. 선생을 찾아가 "빨리 피신하셔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조 선생은 결국 납북돼 사망하셨다 하니 강제로라도 피신시키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 ▲ 1951년 10월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고트(Goat)부대 훈련소에서 북파 훈련을 마친 KLO 부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한 모습. /최규봉씨 제공
- ▲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팔미도에서 소형 보트를 타고 기함‘마운트 매킨리’로 복귀하는‘팔미도 6인방’.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유진 글라크 해군 대위, 연정 소령, 선원, 최규봉 대장, 존 포스터 육군 중위, 계인주 대령, 클라크혼 육군 소령. /최규봉씨 제공
작전이 성공한 뒤, 유엔군 함대의 기함 '마운트 매킨리'에서 맥아더 사령관을 만났는데, "바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그 성조기를 나에게 달라고 했다.
정전 후, 미국은 내게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성조기를 돌려 달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미국의 한 유력 언론사측에서는 10만달러를 줄 테니 넘기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성조기를 끝내 돌려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 나중에 맥아더 장군에게 돌려줬다. 그러자 맥아더 사령관은 감사 편지와 함께 자신의 친필 사인을 담은 대형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 ▲ 맥아더 장군의 친필 사인이 담긴 사진. 맥아더 장군은 최규봉씨가 인천상륙작전 때 사용된 성조기를 돌려주자 답례로 감사편지와 함께 이 사진을 최 대장에게 보냈다. 현재 전쟁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부대 규모도 커졌다. 본부가 대구로 내려가면서 피란민 중에서 공작대원을 발굴해 부대를 증편했다. 본부 산하에 '고트(Goat)''선(Sun)' '위스키(Whiskey)' 등 3개 부대를 편성했다. 1951년 11월엔 부대 명칭을 8240부대로 바꾸고 대원들을 선린상고 자리에 통합 수용했다. 나는 그때 공작과장으로 임명돼 대원들의 작전을 총지휘했다.
우리 KLO 부대원은 서울과 경주훈련소에 있는 대원과 백령도 등 서해안 도서지방과 북한에 침투해 있는 대원을 포함해 5000여명 정도였는데, 세상에는 10만~30만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적지에서도 신출귀몰하는 우리 부대원들은 전쟁 기간 중 북한엔 공포의 대상이었고, 국민들에게는 신화적 존재였다. 숫자 부풀리기는 적에 대한 심리전으로 활용되는 장점도 있었다.
1952년에 들어서는 분대 규모 작전팀을 적 후방에 항공기를 이용해 낙하시키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하룻밤에 100명 이상을 침투시킨 일도 있었다. 부대가 커지면서 특수 무전공작팀(특수공작대)을 양성했다. 침투한 대원이 육로로 돌아와 보고하지 않고 현지에서 무전기를 통해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그해 여름 함경북도에서 중령 계급의 소련 군사고문을 비행기로, 그해 말에는 황해도에서 북한군 연대장급 2명을 배로 납치해 왔다.
1952년 늦가을 북한에 흑사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만약 사실이라면 유엔군이 전장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는 말도 돌았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우리 부대가 나섰다. 대원 4명이 적 후방인 원산 도립병원에 침투, 환자 한명을 납치해왔다. 그 결과 이 병은 흑사병이 아니라 장티푸스로 판정이 났다. 이 작전에서 우리 부대원 1명이 적의 총에 사망했다.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6·25 전쟁 때의 흑사병 파문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전쟁 막바지 조병옥 박사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전쟁포로 석방 문제를 둘러싸고 조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각을 세웠는데, 경찰국장이 내게 찾아와 "조병옥, 기합 좀 주라"고 했다. 대원 몇명을 데리고 조 박사 이마에 가벼운 상처를 내주고 대문짝과 기물도 부수고 돌아왔다. 조 박사는 "대문 열어놨는데, 왜 담을 넘어오나. 자네들 맘대로 하고 가게나"하고 말했다. 마치 우리가 갈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다음날 조 박사는 커다란 붕대를 둘둘 감고 나와 기자회견을 했고, 범인들에 대해선 "아마 지금쯤 북한으로 도망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부대는 정전이 성립된 이후 공식적으로 해체됐지만, '켈로'라는 이름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메아리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