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민배 도쿄지국장
이후 한반도는 전쟁 국면에 들어간다. "즉각 보복"의 비등한 여론에 미국은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7함대 구축함 2척을 동해에 급파해 일전불사로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10개월의 협상 끝에 12월 23일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를 판문점을 통해 넘겨받고 종결된 결말에 실망했다. 김일성은 이 와중에 11월 2일 울진·삼척지구에 100여명의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광적(狂的)인 '남한 흔들기'를 거듭했다. 당시 56세의 김일성은 "환갑잔치는 서울에서"를 외치며 전쟁 준비에 광분했다.
이런 고립무원 상태에서 박 대통령은 생각을 바꾼다. '자주국방' 기치 아래 김일성을 확실히 제압하기 위한 종합전술을 구사, 이후 남한의 완벽한 승리로 이끈다. 박 대통령은 먼저 그해 2월 7일 "온 국민이 경제건설과 국토방위를 병행, 논두렁에 총을 두고 농사를 짓는 태세를 갖춰야 한다"면서, '250만 재향군의 무장방침'을 밝힌다. 두 달도 안 된 4월 1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167만 예비군 창설식이 열렸다. 김일성이 자랑하는 100만 노농적위대를 숫자로 압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곧 다른 카드도 꺼냈다. 그해 3월 울산석유화학단지 착공식을 가졌다. 또 예비군을 창설한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을 창립한다. 중화학공업 육성의 깃발을 든 것이다. 당시 중공업, 특히 병기(兵器)산업은 북에 완전히 눌려 있었다. 북한은 그때 우리의 10배가 넘는 연산 210만t의 철강으로 군함·잠수함을 만들고 있었다. 우린 소총 한 자루 만들지 못할 때다. 박 대통령은 "무기의 소재인 중화학공업을 육성해야 방위산업을 키울 수 있다", "중화학공업을 압도해야 북의 도발을 원천봉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포철만 해도 투자금 1억달러를 빌려줄 나라가 없었다. 박 대통령의 분신 박태준씨가 1년간 일본을 전방위로 설득, 대일청구권 자금 9000만달러를 투입할 수 있게 됐다.
이해 씨앗이 뿌려져 오늘날 세계 6대 철강대국의 교두보가 된 포항 제철기지와 울산 석유단지에 이어 여천의 제2종합화학공업기지, 온산의 비철금속기지, 창원의 종합기계공업기지, 거제도의 조선기지, 구미의 전자기지 등 7대 중화학공업기지가 70년대에 차례로 건설된다. 100억달러가 투입되는 대역사였다. 68년 수출액이 5억달러임을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투자였다. 이들 기지는 대외 수출품(80%)과 각종 방산무기(20%)를 함께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 방위산업과 연결된 박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김일성과의 싸움에서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겨냥해 짜낸 지혜의 산물이었다. 이 카드들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로 인해 1970년대 후반 국방력도 앞서고, 중화학공업은 오늘날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운 견인차가 되었다.
김정일이 일으킨 천안함 사태에 대한 대북 후속 조치는 앞으로 한반도와 나라의 운명을 가르게 될 것이다. 북한핵과 김정일의 건강, 파탄상태에 빠진 경제로 인한 북의 급변사태 변수마저 끼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42년 전 박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탁월한 선택"을 구사하지 못하면 우리의 운명은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