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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제 캄차카 ‘꺼레이즈’도 가슴을 폅니다

namsarang 2010. 6. 1. 19:15

[ESSAY]

어머니, 이제 캄차카 ‘꺼레이즈’도 가슴을 폅니다

  • 홍춘희 캄차카 예일리소브시 한글 교사

1948년 여름 청진 부두에서 캄차카로 떠났다
러시아 사람들은 꺼레이즈라 경멸하듯 불렀다
88올림픽으로 모든게 바뀌었다 발전된 한국
고향은 북한이고 국적은 러시아 그러나 한국이 자랑스럽다
이제 꺼레이즈는 더이상 경멸스러운 단어가 아니다

러시아의 캄차카반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화산과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당시만 해도 불모의 땅이었다. 막연히 러시아라면 우리나라보다 북쪽에 있으려니만 생각했다. 하지만 함경북도 청진항에서 러시아 화물선을 타고 떠나간 그곳은 동해에서 한 달 넘겨 도착했을 정도로 먼 땅이었다. 사할린 너머에 있는 그곳은 겨울철엔 영하 20도, 30도가 됐고 눈바람이 사나흘씩 몰아치면 새들도 옴짝달싹 못했다. 외출할 때면 서로 몸을 밧줄로 묶은 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뒤에서 밀며 갔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곳에서 산지 벌써 60여년이 지났다. 1세대는 이미 대부분 죽었지만 3·4대까지 합치면 2000여명의 '고려인'들이 캄차카반도 곳곳에 유랑민처럼 흩어져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이 캄차카로 간 것은 1948년이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 북한에 그 많던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직장 잃은 사람들이 많아 생활이 어려웠다. 그해 여름 청진에서 농사일하던 아버지는 소련으로 가자고 했다. 어장에서 일할 노무자를 모집한다는 것이다. 이미 전해에 한 차례 수백명이 그곳에 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당시 16살이던 오빠, 11살짜리 나, 그리고 네 살짜리 동생을 데리고 청진부두에서 배를 탔다. 6개월 계약으로 떠나는 젊은 청년부터 2년, 3년 계약으로 떠나는 부부와 자녀 등 수백명이나 됐다.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캄차카반도의 어항인 오제르나야였다. 러시아 사람 3000여명이 살던 곳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생선통조림 공장, 생선 말리는 공장, 얼음 공장들이었다. 젊은 청년들은 어부로 쪽배를 탔고, 부모님은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어선들이 수시로 들어오기 때문에 밤 2시, 3시에도 일하러 나가곤 했다. 일은 고됐지만 부모님들은 일이 있고 돈 벌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삼았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1950년 6·25 전쟁이 나면서 2년 계약으로 왔던 우리 가족은 그곳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북한은 복구사업에 사람이 필요하다며 전원 복귀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고향에 가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안 가겠다고 버티셨다. 먹을 게 없어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전쟁이 끝나 폐허가 됐을 고향에 가 뭘 파먹고 살겠느냐는 거였다. "내가 잘살고 나라도 잘살아야 고향도 있지…"라는 어머니 말에 아버지는 한숨만 푹푹 쉬셨다. 우리 가족은 산으로 도망쳤고 우리처럼 강제 출국 명령을 피해 피신한 이들이 꽤 많았다.

어머니는 늘 "이런 너른 땅에서 농사짓고 살았으면…"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그곳은 채소 재배가 힘든 척박한 땅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어디선가 구해온 감자를 심었고, 그 감자가 퍼져 이젠 지역의 주산물이 됐다. 우리는 해변에 밀려오는 미역을 건져왔고 명태·가자미를 먹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먹지 않던 생선이어서 "고려인들은 아무것이나 먹는다"고 손가락질 하곤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우리를 '꺼레이즈'라 불렀다. 일본강점기 때 조센징처럼 우리를 깔보고 경멸하는 단어였다. 못사는 나라 국민인 게 죄라며 너희들은 잘되어야 한다고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다. 이건 우리 부모님만이 아니라 우리 동포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어서 교육열들이 대단했다. 문제는 국적이었다. 북조선공민증을 갖고 있어 다른 지방에 가려면 일일이 당국의 허가를 맡아야 했다. 몸이 아파도 큰 병원이 있는 도시에 가지 못했고 모스크바대 같은 명문대 입학 허가도 받기 힘들었다. 나는 1964년부터 매년 모스크바 외무성에 소련 국적을 달라는 탄원서를 보내 10년 만에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포들은 러시아가 개방된 1991년 이후에야 국적을 얻었다.

나는 운 좋게도 모스크바 인근의 사범대를 나와 캄차카로 돌아와 중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고 일흔이 넘은 지금도 러시아 교육성이 만든 한글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내 아이 둘은 의사가 되어 유복한 생활을 한다.

나는 우리 가족이 잘된 것보다 발전된 한국이 더 자랑스럽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것을 러시아에서 TV로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서울은 정말 큰 도시였다.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러시아에선 한국에 대한 모든 게 바뀌었다. 거리에서 만나는 선원들은 한국사람들을 보면 "한국이 크게 발전했다"며 한마디씩 한다. 이들은 배를 부산항에 가서 수리해 한국에 대해 잘 안다. 나라가 발전해야 외국에 사는 동포들도 이렇듯 가슴 펴고 사는 법이다.

1995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내가 처음 찾은 게 미군이었다. 어렸을 적 남한은 미군이 통치하고 거지가 우글거린다고 배워 미군이 얼마나 많은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미군은 찾기 쉽지 않았고 되레 쭉쭉 솟은 대형건물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든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진짜 한국이었구나.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한번 와 보고 싶어하셨을 텐데…." 난 고향은 북한이고 국적은 러시아이지만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제1조국은 한국, 제2조국은 러시아라고 말한다.

지난달 '세계한마음공동체'란 단체의 초청으로 우리지역 '꺼레이즈' 14명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나는 서울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께 귓속말로 전해주듯 속삭였다. "더 이상 '꺼레이즈'는 경멸스러운 단어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