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역시나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전날 오후 순례객을 태우고 그리스 피레우스 항을 떠난 크리스탈호는 터키 쿠사다시 항을 향하고 있다. 이른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배는 항구에 닻을 내렸다. 배에서 내린 일행은 조별로 버스에 나눠 타고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성모님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의 순례 목적지는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 중 하나인 에페소. 성모님의 집, 에페소 유적지와 성 요한 성당 등이다.
기원전 7세기경 최고의 번성기를 누린 도시답게 고대 유적이 많이 있지만 가톨릭신자들에게 에페소는 무엇보다 성모님과 요한 사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순례지이다.
버스로 이동하는 중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정진석 추기경님께서도 애도 메시지를 보내셨다고 한다. 차창 밖 이른 봄 풍경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대신학교에 입학한 첫해 축일에 받은 선물이 바로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였다. 책장을 넘기며 많은 부분에 공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떠나오기 전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막상 입적 소식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스님의 영원한 안식을 청하며 기도를 올렸다.
어느새 버스는 성모님의 집이 있는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과 성모님은 그리스도교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에페소로 피신했다. 요한은 성모님의 여생을 위해 에페소가 내려다보이는 크레소스 산 위에 작은 집을 마련해 드렸다고 한다. 성모님은 이곳에서 사시다가 영면하시어 승천하셨다고 전해진다.
현재 우리가 찾는 성모님의 집이 발견된 과정은 매우 놀랍다. 독일 태생의 가타리나 에머리히(1774~1824) 수녀는 12년간 병상에 누워 생활하며 예수님과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하곤 했다. 1852년 시인 브렌타노는 수녀의 환시를 채록해 「가타리나 에머리히의 비젼에 의한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펴내게 된다.
이후 1878년 프랑스어 번역본으로도 출간됐는데, 그 책을 읽은 융 신부가 1891년 에페소 주변 산야에서 책 내용과 일치하는 집터와 풍경을 찾아냈다. 에머리히 수녀는 에페소는 물론 터키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 집에서 정기적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고,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찾았다. 이후 각국 순례자들이 성모님 집을 찾고 있다.
성모님의 집에서 성모님과 우리의 어머니를 기억하며 야외미사를 봉헌했다. 나는 예전에도 이곳에서 미사를 드린 적이 있다. 2002년 순례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을 때 선배 신부님은 미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다. 함께한 신자들의 감격도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꼭 다시 오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다려주시지 않았다. 그 해 초여름 어머니는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을 그리워할 때면 늘 후회와 아쉬운 감정이 따른다.
|
▲ 순례자들이 에페소에 있는 성모님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