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땅

(2)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namsarang 2010. 4. 25. 18:50

(2) 사제의 해-성경의 땅을 가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3월 9일 오후 1시 15분 인천공항, 뮌헨으로 향하는 루프트한자 항공기가 굉음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창밖 활주로에는 각국 비행기들이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잠시 후 약속이라도 한 듯 편두통이 찾아왔다. 비행기를 타면 늘 찾아오는 현상이다. 진통제는 없어도 괜찮다. 이륙 후 어느 정도 고도에 이르면 자연히 사라지니까. 찌릿한 통증도 살아 숨쉬고 있는 징표라 생각하면 마냥 나쁘지 만은 않다. 이른 아침 서둘러 짐을 챙겨나와 출국수속을 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다 이제야 편안한 시간을 갖는 것이니 편두통이 지나간 후의 평온을 잠자코 기다릴 뿐이다.

 지난해 말, 사제의 해를 기념해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과 평화방송ㆍ평화신문은 공동으로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이스라엘을 찾아가는 쿠르즈 성지순례를 기획했다. 150여 명이 성지순례 참가 신청을 했고 마감 후에도 몇십 명이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믿음조 민병덕 신부님(서울대교구 사목국장), 희망조 허영민 신부님(의정부교구), 평화조 조정래 신부님(군종교구 삼위일체본당), 그리고 사랑조는 내가 담당사제로 함께했다. 어제 오전 믿음ㆍ희망조 68명이 먼저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그리스로 떠났고 오늘은 사랑ㆍ평화조 81명이 순례길에 오르는 것이다.

 나는 아침 9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모임장소인 J카운터 주위로 순례객들이 모여들었다. 열흘 전 발대미사 때 만나 인사를 나눈 사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다들 서먹한 분위기다. 그러나 순례여정을 함께 하는 동안 자연스레 친숙해질 것이다. 순례객 가운데는 낯설고 먼 길을 떠나는 이의 셀렘과 더불어 약간의 긴장감도 감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출발기도를 했다. 나는 기도를 이끌기 위해 의자 위로 올라갔고 순례객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방금 전까지 어수선하던 공항에 성령의 기운이 느껴진다. "…(중략) 이 순례가 아브라함을 광야로 불러내시어 당신의 길을 따라 길을 걷게 하였듯이 저희를 불러주신 분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당신을 만날 희망으로 이 시간을 앞당겨 살게 하소서." 우리는 모두가 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이 순례에 함께 해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대규모 인원이 함께 움직이는 성지순례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안전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긴박한 상황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기도하고 모든 것을 맡겨 드릴 수밖에 없다.

 기도를 마치고 출국장으로 향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신부님! 만나게 돼 기쁘고, 성지순례를 함께 가게 돼서 정말 행복합니다." 첫 만남의 인사치례로 들릴 수도 있지만 상쾌한 이 한 마디에 기분이 좋아진다. 말은 참 신비롭고 때로는 큰 힘을 발휘한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지 않은가.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 4,29).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다시 새겨본다.

 어느새 우리가 탄 비행기는 저녁노을을 내려 보며 날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한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손수 인간을 지으신 후 "참 좋다"고 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찬양이 넘치는 풍경이다.

 누구나 높이 올라가 아래를 보면 세상과 사람의 존재가 미소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유명한 음악가가 고향인 그리스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유럽 대륙을 내려다 본 소감을 말한 적이 있다. "지도에는 분명히 국경선이 굵게 그려져 있는데 하늘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산과 들만 보이지요." 인간이 구분해 놓은 구분과 구별의 선은 고립과 고독을 만들어낸다. 사람과 사람을 막아놓은 보이지 않는 장벽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언제쯤 올까.

 독일 뮌헨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우리 일행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그리스 아테네 공항에 도착했다. 아! 차가운 밤공기와 낯선 풍광에 비로소 지구 반대편에 도착했음을 실감한다. 한국 시각으로 낮 1시경 인천공항을 떠나왔으니 17시간 만에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이제부터 순례 시작이다.
▲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찬양이 넘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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