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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트비나(왼쪽) 수녀가 수녀원 성당에서 기도서를 펼치고 있다. 하루 네 차례 있는 공동 전례기도나 개인 기도에 참 열심이다. 그 곁엔 이정자(크리스타) 수녀가 함께하고 있다. |
1949년 5월 14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함흥분원에는 적막이 흘렀다. 분원장 벨트비나 체사르(Bertwina Caesar, 한국 이름 채인숙) 수녀를 비롯한 유럽 출신 수도자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이에 앞서 7일 제4대 원장인 겔트루드 링크 수녀가 "선교는 끝났다"고 수도가족들에게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을 만큼 상황이 악화돼 있었고, 이어 10일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프리오랏, 수련소를 둔 원장좌 수녀원)이 공산당국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각 함흥분원 현관 초인종이 울리고 정치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때 벨트비나 수녀를 비롯해 4명이 원산 임시교화소로 피랍됐다.
그로부터 80여 일간에 걸친 원산ㆍ함흥ㆍ평양인민교화소 수감과 장장 4년 5개월에 걸친 '옥사덕수용소'(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에서의 수난이 이어진다. 당시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과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에서 체포 투옥돼 강제수용됐던 외국인 신부와 수사, 수녀는 모두 67명으로, 그 중 25명이 희생됐고 42명만이 살아남아 1954년 1월 12일 유럽으로 귀환한다. 피랍 초부터 1954년 1월 독일로 송환되기까지 전 수난 여정에 함께한 벨트비나 수녀는 생존자 42명 중 현재 유일하게 살아 있다. 6ㆍ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벨트비나 수녀가 노후를 보내는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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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채 벨트비나 수녀가 해맑게 웃으며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성당에 들어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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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8년 수도서원 70주년을 기념한 벨트비나 수녀는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한 해 한 해 기력이 달린다며 "한국 사람으로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가고 싶다"고 바람을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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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초 북한 옥사덕수용소에서 풀려난 포교 베네딕도회 수도자 17명이 독일로 돌아와 그해 1월 24일 다시 착복식을 한 뒤 미사를 봉헌하고나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벨트비나 수녀는 맨앞 오른쪽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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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사덕수용소에서 인고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입던 옷과 장갑 등이다. 포교 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1층 전시실에 소장돼 있다. |
수도원의 초여름은 화사했다. 우리 나이로 97살이라는 고령이 믿기지 않을 만큼 벨트비나 수녀 또한 화사한 미소에 정정했다. 아직도 날마다 새벽 4시 30분이면 기상, 하루 네 차례씩 이어지는 공동 전례기도(Opus Dei)는 물론 개인 기도(Lectio Divina)에도 열심이다. 짬이 날 때마다 호미를 들고 다니며 수도원 정원 잔디밭 풀을 뽑는다. 비록 은퇴했지만 '기도하며 일하며 읽어라(Ora, Labora et Lege)'는 베네딕도의 영성 전통은 여전히 그의 삶의 전부다. 이젠 수도생활과 기도에만 오롯이 전념한다.
수녀원 접견실에서 만난 벨트비나 수녀와의 인터뷰는 시종 즐거웠다. 들려주는 에피소드마다 폭소가 터졌다. 워낙 고령이어서 기억이 또렷하지 못했고,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했지만 삶을, 심지어는 북한에서의 혹독했던 수감과 강제노동, 추위, 배고픔, 수도가족들 순교까지도 하느님 뜻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수도자다웠다.
"함흥 인민교화소 감방 넓이는 가로 1m, 세로 3m 정도였는데 음식이 기가 막혔지요. 갖가지 잡곡을 섞은 밥 덩어리와 소금물에 배춧잎이 떠 있는 국이 전부였어요. 두 달 넘게 감방에 있으면서도 고기라고는 작은 생선 토막을 두 번 먹은 것뿐이었죠. 국을 담아오던 양동이는 새벽에 일어나 청소할 때 걸레를 빨던 양동이를 대충 씻은 것이었어요. 걸레는 너무나 낡고 더러워 바닥이 잘 닦여지지 않았지요. 뿐만 아니라 이나 벼룩, 빈대 등이 득실거려 견디기가 힘들었지요. 나무로 만든 변기통은 대개 두 주간에 한 번씩 비워주었어요. 우린 간수들이 변기통을 비워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연옥과도 같은 고통이었지요."
57일간 원산ㆍ함흥 임시교화소와 인민교화소에서 산 벨트비나 수녀 등 4명은 그해 7월 10일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된다. 이송에 앞서 수도복과 머릿수건, 소지품 등을 모두 빼앗기고 속옷과 속치마만 걸친 채 끌려간 네 수도자는 굶주리고 탈진한 모습으로 수감됐지만 겔트루드 원장수녀 등 수녀들 16명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벨트비나 수녀는 증언한다.
"새벽녘 옆방에서 벽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우린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간수에게 다른 수녀님들이 계신지 물어봤지만 도무지 대답을 해주지 않았죠. 나중에야 들었는데, 원장수녀님이 평양교화소장에게 면회를 신청했다고 하더군요. 그 결과 평양교화소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감방 죄수들이 모두 잠든 밤 12시부터 한 시간 동안 우리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울지도, 소리 내 말하기도 힘든 처지인지라 우린 얼마나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훗날 우린 이때를 '귀신의 시간'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몰골이 꼭 귀신과 같았고 아무도 모르게 이뤄진 만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 함흥교화소 수감 생활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지극한 인내로 견디며 바친 기도는 간절했다.
"주님! 당신 뜻대로 모든 것을 다 받겠나이다. 어여삐 여기소서!"
수난은 그치지 않았다. 1949년 8월 5일 평양교화소를 출발한 성직자와 수도자(당시 유죄선고를 받은 독일인 선교사 8명과 한국인 신부 6명은 피살) 59명은 험준한 자강도 산골짜기로 옮겨진다. 그래도 '모두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서로를 격려하며 고된 노동 속에서도 시간전례(성무일도)와 미사를 통해 궁핍과 고통을 견뎠다. 보위부원들이 덕원에서 가져온 옥수수ㆍ쌀자루에 섞인 밀알을 정성스럽게 골라 밀밭을 일궈 수확한 밀가루로 제병을 만들었고, 미사주는 산에 있는 머루를 따다가 술을 만들어 사용했다. 매일 봉헌된 미사 성제는 수용소 생활을 참고 견디게 해준 하느님 섭리이자 손길이었다.
옥사덕수용소에서 가장 힘겨웠던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벨트비나 수녀는 뜻밖에도 '호미질'이었다고 고백했다. 1937년 6월 21일 수련자로 한국에 들어와 이듬해 6월 29일 첫서원을 한 뒤 수련자 양성과 선교에만 매달린 벨트비나 수녀에게 하루종일 쪼그려 앉아 밭을 매는 호미질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늘 서서 일하는 유럽인에게 쪼그려 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여름이면 옥수수나 감자 등을 재배하고 겨울이면 숯을 굽는 인고의 세월이었다.
일거리도 '배정' 받았다. 수녀들에겐 주방 일과 가축 사육, 농장 일 등이 주어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일을 강요당하고 움막을 개조하고 외양간을 고쳐 지었다. 매일같이 옥수수와 콩을 갈아 먹어야 했다. 때로는 몇 주일간 무우국과 무우 시래기, 오이죽이나 오이 나물을 계속 먹어야 했다. 인민군이나 내무서원 같은 감시인들이 산나물을 캐 먹는 걸 보고 따라하고, 숲에 일하러 가서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으면 행운이었다. 죄수복처럼 푸른 작업복을 한 벌씩 나눠줬지만 이것으로는 추위를 견딜 수 없기에 인민군들이 버린 옷을 주워다가 잿물로 빨아 해진 곳을 기워 입었다.
"옥사덕ㆍ관문리 수용소에서 수도가족을 열 일곱 분이나 잃어야 했지요. 치명이나 다를 바 없는 죽음을 당한 수도가족들 시신마저 제대로 안장하지 못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벨트비나 수녀는 참혹했던 기억을 손자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매사에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성품이 시련을 '해피엔딩 스토리'로 바꿔 놓은 듯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열심히 찾았는지, 서로서로 얼마나 아끼며 사랑했는지 몰라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옥사덕수용소에서 살았던 시기는 하느님께서 허락한 축복의 시간이었지요."
독일 뷔르츠부르크교구 슈바인푸르트 인근 타일하임 출신으로 1936년 입회한 벨트비나 수녀는 올해 수도서원 72주년을 맞는다. 1954년 독일로 송환됐다가 1958년 한국에 공동체가 복원됐다는 소식에 다시 돌아와 대구수녀원에서 주로 양성을 담당했으며, 최근까지도 수녀원 역사 정리와 독일 은인 관리 업무를 맡기도 했다. 평생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살던 언니 브리기다 체사르(Brigida Caesare) 수녀는 지난해 5월 97살을 일기로 선종해 외로울 법도 한데 노수녀는 여전히 밝다.
지금은 후배 수녀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삶의 아름다운 황혼을 누리는 벨트비나 수녀는 "수녀로 서원한 것도, 수녀로 산 것도 한국에서였다"며 "그런 의미에서 독일산(Made in Germany)이 아니라 한국산(Made in Korea)이니 한국 사람으로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환하게 웃는다.
한 삶 신앙과 선행 실천으로 허리를 묶고 성경의 인도를 따라 주님의 길을 걸은 노수녀의 밝고 아름다운 미소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하느님 나라로 부르시는 날까지 계속 이어지기를 기도하며 황혼에 젖는 해거름 수도원을 걸어 내려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 전대식 기자 jfac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