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리 지음|조혜자 옮김|기파랑 | 480쪽|2만3000원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 비망록엔…
임진왜란을 이해하는데 유성룡의 통렬한 성찰 '징비록(懲毖錄)'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6·25전쟁에 대해서는 '징비록'에 비견할 만한 정본(正本)을 갖고 있는가? 수정주의니 탈(脫)수정주의니 하는 이념과 국제정치 시각에서의 이론서는 있어도 전쟁을 몸소 겪어낸 지도층 인물들 중에서 6·25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기록은 백선엽 장군의 '군과 나'(시대정신) 정도다. 기록의 빈약이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의 한 주역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1950년 6월 25일부터 1·4후퇴 직후인 1951년 2월 15일까지 이 대통령 주변의 상황을 일지(日誌) 형식으로 기록한 비망록은 6·25전쟁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막중하다.- 동부전선을 시찰하면서 지프에 올라 즉흥연설을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기파랑 제공
북한군이 새벽 4시에 남침을 시작한 1950년 6월 25일의 일지다. "나는 이날 오전 9시에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로 갔고,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끝내자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하러 갔다." 10시쯤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로 달려왔고,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마주 앉은 시각은 10시 30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오전 9시경 개성이 함락됐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가 돼서도 전쟁이라고 판단하지는 못했다. "경무대 안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종전(終戰) 후의 성찰이 아니라 당시 기록이기 때문에 전체를 보는 시야가 부족한 단점은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미화의 혐의는 그만큼 적다.
6월 25일 밤부터 이승만은 이번 침략이 전투가 아니라 전쟁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밤새 잠 못 이루던 이승만은 6월 26일 새벽 3시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전화를 걸겠다고 응답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호통을 쳤고, 부관은 서둘러 장군을 깨우겠다고 했다.
6월 26일은 이승만에게 참으로 긴 하루였다. 맥아더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워싱턴의 장면 주미대사에게 미국의 원조를 촉구토록 명령했고, 이어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해 전황과 대처방안 등을 지휘했다. 겨우 잠자리에 든 27일 새벽 2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다시 경무대를 방문했다. 서울에 남겠다는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존속을 위해 국가원수는 일단 피신해야 한다는 신 장관, 프란체스카 여사 등의 설전(舌戰)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어렵사리 기차에 올라탄 이승만 일행이 대구에 도착한 것은 27일 오전 11시 40분이었다. "기차가 머물자 대통령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는 대답에 대통령의 모습은 너무도 침통했다. 대통령은 나를 찬찬히 쳐다보면서 '내 평생 처음 판단 잘못했어.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바로 곁에서 20년 가까이 남편을 모셨지만 이때처럼 회오와 감상에 젖은 음성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망록은 하루하루가 긴박한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이승만은 미군과 한국군의 각종 불협화음을 조정해가며 국내 정치싸움에도 대처해야 했다. 그는 의주로 몽진한 선조에 자신을 빗대며 선조의 시를 직접 붓글씨로 써서 프란체스카에게 건네기도 했다. 대구와 부산의 피란 시절을 거쳐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대반전을 이루고 서울로 환도하지만 다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두 번째 서울을 버려야 했던 이승만의 처참한 심정도 고스란히 적어놓고 있다. 아쉽게도 이승만의 대미투쟁이 빛나는 성취를 이루는 1953년 6~7월의 상황을 포함하지 못하고 비망록은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이승만의 애국·반공·통일의 의지는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