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유엔군 철수하면 北進" 압박하자 美, '비상시 이승만 감금' 검토

namsarang 2010. 6. 25. 22:00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유엔군 철수하면 北進" 압박하자 美, '비상시 이승만 감금' 검토

  • 차상철 충남대 교수·미국외교사

 

 [5] 미국을 움직인 '고집불통' 이승만


강경한 '벼랑끝 전술'로 韓美상호방위조약 체결 대한민국 안보 보장받아
開戰 직후 맥아더에 전화 무스탕전투기·곡사포 등 무기 긴급지원 약속받아내
글 싣는 순서 ① 스탈린 ② 트루먼·맥아더 ③ 모택동 ④ 김일성·박헌영 ⑤ 이승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스탈린의 전쟁 승인과 모택동의 군사지원 약속을 받은 김일성은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랜 측근으로 주일대표부 공사를 역임한 정한경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오전 6시 30분 남침을 보고받고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최근 출간된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는 이와 다르다. 그날 프란체스카는 오전 9시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를 찾았다. 이승만은 아침식사를 끝내고 오전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하러 갔다.

국방장관 신성모의 보고는 오전 10시였다. 개성이 오전 9시 함락됐고, 공산군의 탱크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는 보고였다. 하지만 신성모는 "크게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전면 남침이 아닌 국지적 충돌 정도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정보통으로부터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26일 새벽 도쿄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잠에서 깨어 전화를 받은 맥아더는 미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히키 장군에게 무스탕전투기 10대, 곡사포 72문, 바주카포 등을 긴급지원하도록 명령하겠다고 약속했다.

6·25 전쟁이 계속되던 1952년 7월 3일 제주도 제1훈련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뒷줄 오른쪽), 훈련소장인 장도영 준장(왼쪽 두번째) 등과 함께 지프를 타고 시찰하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
이승만은 다시 워싱턴의 장면 주미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전하시오. 적이 우리 문앞에 와 있다고! 준다던 1000만달러 무기 지원은 어떻게 된 거냐고!" 이튿날 새벽 신성모와 서울시장 이기붕 등은 이승만에게 서울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이승만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편하겠다"는 신성모의 말에 남행(南行) 열차를 탔다. 그러나 기차는 수원에 머물지 않고 오전 11시 40분 대구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는 대답에 이승만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했어.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승만은 전쟁 초기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이 자신의 지론인 북진통일(北進統一)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7월 1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북한의 남침으로 38선의 의미는 사라졌다. 유엔군이 현상회복만을 시도한다면 적의 반격을 도와주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1년 5월 미국이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선(戰線)을 따라 휴전을 제안하는 정책을 확정하자, 이승만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한국과 만주의 국경선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물론 이승만도 휴전협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결연한 의지 표명은 휴전을 앞두고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얻어내려는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승만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 때부터 "미국은 한국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며, 한국민 전체의 생명과 희망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달려있다"며 미국에 조약 체결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협박과 최후통첩 등으로 미국을 압박했다. 이승만은 1952년 12월 3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한 아이젠하워와 두 차례 회담을 갖고 북진통일의 당위성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다. 아이젠하워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경우 유엔군 참전 국가들의 군사적 참여가 줄어들 것이고, 미국민과 의회의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승만은 "유엔군 철수가 불가피하고 한국에 경제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면 내일이라도 그렇게 하라. 한국은 독자적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1953년 5월 4일 만약의 돌발사태시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에 '군정(軍政)'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감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승만은 1953년 6월 17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필리핀·일본·호주·뉴질랜드와 체결한 조약 수준의 한·미 상호방위조약 없이 휴전이 이뤄진다면 이는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남한이 공산화될 경우 극동, 아시아 전체, 나아가 세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6월 18일 이승만은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반공포로 2만5000명을 직권으로 전격 석방한 것이다. 이는 송환을 거부하는 모든 포로를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긴다는 유엔군 휴전안(案)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자칫 휴전협정을 무효로 돌릴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이승만은 브릭스 미국대사에게 "한국과 미국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떠나야만 하는 갈림길에 들어섰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나의 행동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후일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살행위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국민의 특권"이라고 역설했다.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은 미국에 조약 체결을 위한 한국과의 협상 개시를 강요했다. 결국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假)조인됐고, 10월 1일 워싱턴에서 공식 조인됐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의지를 단념시키는 데 성공했다. 반면 이승만은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국가안보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이승만의 확고한 신념과 뛰어난 대미 협상 전략의 값진 열매였다. 이승만은 이 조약이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을 유지하게 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이승만이 1960년 4·19혁명 후 하야하면서 남긴 마지막 말도 '동맹국 미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간곡한 당부였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휴전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억제하고 한국의 생존과 안보를 확보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한 탄탄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들이 6·25전쟁 시기 국가안보를 책임졌던 대통령 이승만의 역할과 공헌을 평가하는데 인색할 이유는 없다.
 

'전쟁지도자' 이승만… 사실 그대로를 보다

 

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리 지음|조혜자 옮김|기파랑 | 480쪽|2만3000원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 비망록엔…

임진왜란을 이해하는데 유성룡의 통렬한 성찰 '징비록(懲毖錄)'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6·25전쟁에 대해서는 '징비록'에 비견할 만한 정본(正本)을 갖고 있는가? 수정주의니 탈(脫)수정주의니 하는 이념과 국제정치 시각에서의 이론서는 있어도 전쟁을 몸소 겪어낸 지도층 인물들 중에서 6·25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기록은 백선엽 장군의 '군과 나'(시대정신) 정도다. 기록의 빈약이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의 한 주역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1950년 6월 25일부터 1·4후퇴 직후인 1951년 2월 15일까지 이 대통령 주변의 상황을 일지(日誌) 형식으로 기록한 비망록은 6·25전쟁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막중하다.

동부전선을 시찰하면서 지프에 올라 즉흥연설을 하는 이승만 대통령(1951). /기파랑 제공
바로 이 8개월 동안의 '이승만상(像)'은 지극히 부정적으로 형성돼 있다. '이렇다 할 전쟁 대비 태세도 갖추지 못했고, 허둥지둥 도망치기에 바빴으며, 무고한 백성들을 희생시켰다.' 물론 실상을 알 길 없는 일반 국민들이 미디어나 소문 등을 통해 얻은 이야기들을 합쳐서 만들어낸 하나의 상(像)이다. 6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우리는 당시 기록을 토대로 이승만 대통령이 실제로 어떻게 전쟁을 수행했는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

북한군이 새벽 4시에 남침을 시작한 1950년 6월 25일의 일지다. "나는 이날 오전 9시에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로 갔고,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끝내자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하러 갔다." 10시쯤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무대로 달려왔고,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마주 앉은 시각은 10시 30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오전 9시경 개성이 함락됐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가 돼서도 전쟁이라고 판단하지는 못했다. "경무대 안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종전(終戰) 후의 성찰이 아니라 당시 기록이기 때문에 전체를 보는 시야가 부족한 단점은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미화의 혐의는 그만큼 적다.

6월 25일 밤부터 이승만은 이번 침략이 전투가 아니라 전쟁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밤새 잠 못 이루던 이승만은 6월 26일 새벽 3시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전화를 걸겠다고 응답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호통을 쳤고, 부관은 서둘러 장군을 깨우겠다고 했다.

6월 26일은 이승만에게 참으로 긴 하루였다. 맥아더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워싱턴의 장면 주미대사에게 미국의 원조를 촉구토록 명령했고, 이어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해 전황과 대처방안 등을 지휘했다. 겨우 잠자리에 든 27일 새벽 2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다시 경무대를 방문했다. 서울에 남겠다는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존속을 위해 국가원수는 일단 피신해야 한다는 신 장관, 프란체스카 여사 등의 설전(舌戰)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어렵사리 기차에 올라탄 이승만 일행이 대구에 도착한 것은 27일 오전 11시 40분이었다. "기차가 머물자 대통령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는 대답에 대통령의 모습은 너무도 침통했다. 대통령은 나를 찬찬히 쳐다보면서 '내 평생 처음 판단 잘못했어.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바로 곁에서 20년 가까이 남편을 모셨지만 이때처럼 회오와 감상에 젖은 음성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망록은 하루하루가 긴박한 드라마처럼 전개된다. 이승만은 미군과 한국군의 각종 불협화음을 조정해가며 국내 정치싸움에도 대처해야 했다. 그는 의주로 몽진한 선조에 자신을 빗대며 선조의 시를 직접 붓글씨로 써서 프란체스카에게 건네기도 했다. 대구와 부산의 피란 시절을 거쳐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대반전을 이루고 서울로 환도하지만 다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두 번째 서울을 버려야 했던 이승만의 처참한 심정도 고스란히 적어놓고 있다. 아쉽게도 이승만의 대미투쟁이 빛나는 성취를 이루는 1953년 6~7월의 상황을 포함하지 못하고 비망록은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이승만의 애국·반공·통일의 의지는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