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축구

北 축구 선전을 비는 이유

namsarang 2010. 6. 25. 17:02

[전문기자 칼럼]

北 축구 선전을 비는 이유

 

  

  ▲ 강철환 동북아시아연구소 

       연구위원

지금 평양을 비롯한 북한 전역은 북한 축구가 포르투갈에 7대0으로 패한 충격 속에 잠겨 있다고 한다. 평생을 거짓 선전 속에 살아온 북한 주민들은 TV 생중계로 전해지는 '진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4대0을 넘어서자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말을 잇지 못했다는 것이 충격을 잘 보여준다.

극단적 수비형인 북한 축구는 균형이 무너지면 자칫 대패(大敗)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주민들의 눈과 귀를 철저히 틀어막고 있는 북한 지도부가 TV 생중계를 결정했다는 것은 그런 위험성을 잘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함께 김정일 위원장이 '축구광'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축구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축구선수들은 모두 영웅이 됐고 이때부터 북한 주민들의 남다른 축구 사랑이 시작됐다. 하지만 북한 축구는 1967년 1월 김일성이 갑산 파(함경도 파)를 숙청하면서 몰락했다. 당시 축구를 관장해왔던 박금철 당중앙위 조직담당 비서와 김도만 사상담당 비서 등이 제거되자 그 불똥이 축구계에 떨어졌다. 당시 월드컵 영웅들의 출신 성분은 모두 지주계급이나 상공인 계층이었다고 한다. 특히 월드컵 축구 주장이며 당시 FIFA가 선정한 '베스트 11'에 뽑힌 신영규는 대지주의 아들이었다. 월드컵 팀은 해산됐고 주장 신영규는 함경북도 생기령 도자기 공장 노동자로 쫓겨나 끝내 축구계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박두익을 제외한 대다수 선수가 수용소로,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다음 세대를 이어받은 윤명찬 전 축구팀 감독(1999년 한국 망명)은 "갑산 파 숙청 이후 축구 대가 끊겼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이런 축구를 다시 살리기로 결심했다. 월드컵 영웅들을 다시 축구계로 불러들이고, 4·25팀을 창설했다. 축구선수들의 이름까지 다 외울 정도로 축구에 관심을 가졌던 김정일은 월드컵 본선 진출이 계속 좌절되자 한(恨)을 품게 됐다고 한다. 김정일은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진출하면 축구팀에 벤츠 승용차와 각각 1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장성택이 돈 가방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타르에서 열린 예선에서 한국에 3대0으로 패하고 탈락하자, 김정일은 "축구가 망신스러우니 10년간 밖에 나가지 말고 실력을 키우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실력 향상기에 있었던 북한 축구는 6년간 해외경기를 하지 못했다.

권력 2인자인 장성택도 불우한 시기엔 축구팀에 와서 대부분 시간을 보낸 축구광이라고 한다. 장성택의 끈질긴 설득으로 화를 푼 김정일은 조총련계 선수들을 합류시키는 파격적인 조처를 했다. 북한팀의 실력은 향상됐고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진가를 발휘했지만, 포르투갈전은 북한에 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월드컵 진출과 브라질전 선전은 북한 지도부와 고통받는 주민들에게 '좋았던 그 옛날'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수치와 절망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김정일의 분노로 이어질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한국에 3대0으로 패한 북한팀은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해 짐도 못 풀고 탄광으로 직행했었다. 포르투갈 선수가 "북한 선수들이 처벌을 받을까 걱정된다"고 했다는데, 이것이 기우(杞憂)만은 아니다. 북한에서 온 기자는 북한 선수들이 마지막 경기에서 제발 선전하기를 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