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60년 전 '장진호 전투' 책으로 되살린 고정일

namsarang 2010. 7. 18. 17:11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60년 전 '장진호 전투' 책으로 되살린 고정일

 

敗戰의 추억… '장진호 전투'를 아시나요
1950년 11월 영하30도
중공군 15만… 진주만 이후 美 역사상 최악의 패전―뉴스위크誌
"내 인생 두 번째 '장진호'는 백과사전… 그걸로 수백억원 날렸죠"

인생 1막

#1951년 1월 25일

음력 설을 며칠 앞둔 밤이었다.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함께 천지가 진동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비명소리, 지옥도(地獄圖)가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소년 곁에서 함께 잠자던 어머니와 두 동생은 차가운 주검으로 변해있었다.

당시 열한 살, 이제 칠십인 고정일(高正一)은 59년 전 광경이 아직 눈에 선한 것 같았다. "신갈 달마을이란 곳이었어요. 미군과 중공군 사이에 피란민들이 끼어버린 거였어요. 머리 감싸고 밖에 나와 보니 마을이 사라져버렸더군요."

엄마와 동생 잃은 소년은 그날로 '거지'가 됐다. 어찌어찌 미군을 따라다니며 그들이 먹다 버린 음식으로 만든 '꿀꿀이죽'으로 연명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처음엔 견디기 힘든 비린내에 토하기 일쑤였지만 목숨은 그리 모진 것이었다.

만일 그가 경기도 화성 외갓집을 찾지 못하고, 거기서 제2국민병으로 끌려간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1960년대부터 숱한 화제작을 양산한 출판사 '동서문화'와 '출판인 고정일'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모든 걸 바꿔놓았다.

17일간의 참혹한 전투. 패전에서 살아남은 전사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한다. 패배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는 것은 결국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고정일은 장진호 전투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더이상 외면하지 않아도 될, 불편하지 않 은 사실이다.
#1950년 가을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丁一權)은 회고록에서 기록했다. "북진하던 유엔군 앞에 중공군이 처음 나타났다. 그들의 기습으로 국군이 큰 타격을 받았다. 보고를 받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첫 마디는 이랬다. '역시 나왔구먼'."

기록은 이렇게 이어졌다. "이젠 겁쟁이 트루먼도 배꼽에 힘 좀 넣겠지. 정 총장,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왔습네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부인했으나 그건 트루먼의 잔소리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네다."


#그 해 10월

모택동(毛澤東)이 주석 팽덕회(彭德懷)를 불렀다. "북한을 도우러 출병해야 합니다. 전쟁이 장기화된다고 해도 해방전쟁의 승리가 몇 년 늦어졌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 중공군 '십대원사' 중 한 명인 그의 말은 짧았지만 묵직했다.

중공의 참전 소식을 박헌영(朴憲永)이 전하자 김일성(金日成)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얼마 뒤 김일성 앞에 나타난 팽덕회가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이것은 나와 맥아더의 전쟁이오. 귀하가 끼어들 여지는… 없소!"


#1950년 11월

그즈음 중공군 제9집단군 사령관 송시륜(宋時輪)이 12개 사단 1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초령 이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주은래(周恩來)의 가르침을 받은 송시륜은 '건실한 전술가'요 '유격전의 명수'였다.

"미군을 뱀 잡듯이 죽여버리자!" 송시륜의 호령 아래 15만 중공군은 폭설을 장막 삼아 낭림산맥을 타고 해일처럼 남진했다. 그로부터 17일간 벌어진 게 전사(戰史)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못지않다고 불리는 '장진호 전투'였다.

낮 기온 영하 20도, 밤 기온 영하 32도 속에서 진행된 전투로 미군은 36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총탄 아닌 동상(凍傷)으로 죽거나 다친 병사 수도 3000명이 넘었다. 중공군은 2만5000명이 죽고 1만25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장진호의 적막

얼어붙은 장진호 어둠 속에 내리는 적막이여

미 해병들의 모든 희망을 묻어 버린다

수많은 짐짝처럼 나란히 누운 병사들은

마치 커다란 파이프오르간 죽음의 소리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여러 다른 음색의 숨소리 들린다

(…)

미 해병들은 방랑자처럼 청춘의 풍경 속을 떠돌아다닌다

그들은 암흑의 우주가 커다랗게 입 벌리고 있는 것을 봤다

검은 행성이 정처 없이 떠돈다

뒤돌아볼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만다.

―고정일의 작가노트

동서문화사 대표 고정일이‘패전의 역사’를 쓴‘불과 얼음’을 출간했다. 신문팔이하다 청계천에 헌책방을 내고 출판사 사장까지 오른 그다. 고정일은 책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얻었다. 백과사전 펴내다 어려 움도 겪었지만, 책 만들고, 쓰고, 파는‘이야기꾼’이길 포기하지 않았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주변 사람들이 권했다.“ 당신에게는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소설을 써봐라.”미 해병이 장진호 전투에서 겪은 이야기를 써내려가면서 고정일도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찾은 듯했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불과 얼음

고정일은 2007년 '얼어붙은 장진호'라는 책을 냈다. 올해 '불과 얼음'을 출간했다. 3년 전 것을 전면 개작한 이 책엔 '장진호 혹한(酷寒) 17일'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었다. 그는 왜 우리가 외면하는 '패전(敗戰)'에 집착하는 것일까.

―2007년 작(作)과 올해 것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때는 주로 북한, 중국, 러시아 자료를 참고했지요. 그런데 그 후 기이한 인연을 맺었어요."

―기이한 인연?

"이범신 선생님이라고, 미국 워싱턴DC에 살고 계신 장진호 전투 참전자가 있습니다. 그분과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분은 본인이 겪은 장진호 전투를 매일 일기(日記)로 기록했습니다. 동료 병사들을 인터뷰하기도 했고요. 그 귀중한 자료를 제게 보내주셨어요."

―처음에 그 수기(手記)를 읽고 나서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전쟁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게 인간이고, 이런 게 인생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물론 제가 겪은 전쟁도 떠올리게 됐지요."

―외국에서 오히려 '장진호 전투'에 관심이 많습니다.

"'브레이크 아웃' 같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지요.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장진호 전투를 깊숙이 연구하고 있어요. 일본 육전사연구보급회라는 곳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유명한 동계 전투가 두 번 있었습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싸운 레닌그라드 전투, 그때는 모르핀도 얼어붙을 만큼 추운 날씨여서 부상 부위를 톱으로 썰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 역시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참패했지요. 미군은 전사에서 장진호 전투를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싸움'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위크지(誌)도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왜 관련 서적은 많이 나올까요.

"정반대의 해석도 있거든요. 10만명이 넘는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한 것을 후퇴가 아니라 (흥남부두를 향한) 새로운 진격(進擊)이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마거릿 히킨스라고, 얼마 전 작고한 전설적인 종군(從軍) 여기자가 있었어요. 그분은 장진호 전투를 '자유를 위한 희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왜 그 전투를 외면할까요.

"아무래도 '중공군에게 졌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패전은 잘 기록하지 않잖아요. 사실은 그렇지도 않은데."

―고 선생이 겪은 가족사의 아픔도 결국은 장진호 전투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투 이후 1·4 후퇴가 시작됐거든요. 저 역시 고향은 서울이었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다 변을 당했습니다."

―'불과 얼음'이 소설이라는데 읽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픽션입니까, 사실(事實)입니까.

"책에 나오는 내용은 전부 사실입니다."

―읽어볼수록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지금은 한중 간 교역(交易)이 중요하고 왕래도 많지만.

"송시륜이란 장군이 한 말이 끔찍하지요. '뱀을 잡으려면 토막을 치고 잡아라'라는 말에서 뱀이 바로 미 해병이었으니까요. 일례로 중국 북경방송은 1950년 12월 22일 전 세계에 이렇게 타전(打電)했습니다. '미 해병 2만5000명이 한명도 살아가지 못할 것'이라고요. 한·중 관계는 중요하지만 역사도 잊으면 안 되지요."

―어머니와 두 동생의 시신은 수습했습니까.

"화성 외가로 가 아버지를 만난 뒤 다시 달마을로 왔어요. 기억을 더듬어 제가 자던 집터를 뒤져보니 사람의 몸은 찾을 수 없고 이상하게도 입고 있던 옷만 고스란히 나오는 거였어요. 주변의 뼈를 수습해 외갓집 뒷산에 묻었지요."


인생 2막

어머니와 일곱살, 두살된 동생을 잃은 가난한 집 장남(長男)에게도 휴전(休戰)은 다가왔다. 그것은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는, 인생 2막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엄혹한 시절, 배움이란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종로 영창서원이란 곳에서 사환을 했지요.

"제가 어려서부터 신문팔이를 했어요. 당시 영창서원이 서울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는데 그곳엘 들락날락하다 장복환 선생님이란 주인 눈에 띈 거예요. 거기서 3년을 일했는데 장 선생님께서 '평생 남의 종노릇 할 거 아니면 독립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독립도 뭐가 있어야 할 거 아닌가요.

"과월(過月) 잡지, 그러니까 철 지난 옛 잡지를 대주시겠다고 했어요. 그때는 볼 것이 귀한 시대였으니 그것도 꽤 장사가 됐습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청계천 일대에 헌책방이 많았습니다. 저도 그 틈에 끼어든 거지요."

―거기서 유명인들을 많이 만났다고 들었습니다만.

"선우휘(鮮于輝) 선생이 당시 육군 대령이었습니다. 류근일(柳根一) 선생은 서울문리대학생이었고요. 그분들이 청계천 일대를 돌다 절 본 겁니다. '어린 녀석이 신통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했습니다. 인연이 그 뒤로 이어졌습니다."

―1956년에 출판사를 차렸지요? 처음 낸 책이 아주 파격적이더군요.

" '정문서림'이라고 지금 '동서문화'의 전신(前身)격입니다. 처음 낸 책이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지혜와 사랑'이었어요. 류근일 선생이 그 책을 내라고 추천했습니다. 외국어대의 이춘복 교수, 당시 이화여대의 민희식 교수님 같은 분들이 도와줬지요. 류근일 선생은 부친이 경성제대 교수로 선구적인 언어학자였던 분입니다. 그분이 월북하는 바람에 류근일 선생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어린 나이에 출판사 사장이 됐으면 집안은?

"뭐가 잘못됐는지 어렸을 때부터 집이 가난했어요. 처음엔 옛 미아리에 있던 동도극장 건너편에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방공호(防空壕)에서 살았을 정도니까요. 그 뒤 안암동으로 갔다가 다시 종로5가 보령약국 뒤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살았습니다. 선친은 선친대로 돈 벌러 다니고 전 저대로 책방을 한 겁니다."

―그래서 책은 많이 팔렸나요.

"책이 귀한 시절이니까요. '지혜와 사랑'은 2000부씩 3판을 찍었습니다. 그 뒤에도 장 폴 사르트르의 '상황'이니 하는 책들을 냈습니다. 그 뒤 정문서림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1969년 '대망(大望)'을 내면서 지금의 동서문화로 개명(改名)했지요."

―'대망'이면 그 유명한?

"일본 3대 신문에 동시에 연재된 것인데 그 소설이 나온 데는 사연이 있어요. 당시 일본도 2차대전 패전국으로 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국민들에게 가르쳐주려는 의도가 많았지요. 오다 노부나가는 옛 소련(蘇聯)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국에 비유할 수 있는 겁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들 밑에서 지내다 야망을 펴는 일본을 비유한 것이고요."

―그 책이 출판사를 일거에 일으켜 세웠지요.

" '대망'을 알게 된 건 송지영(宋志英) 선생 덕이 컸습니다. 그분은 소설가이면서 일어에도 능통했는데 어느 날 저보고 '이거 한번 해봐'라고 하신 거예요. 그때만 해도 저작권 같은 게 없었으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정치인들의 필독서(必讀書)였습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 유진오 박사 같은 분들이 아낀 책입니다. 요즘은 박근혜(朴槿惠) 의원이 애독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병철(삼성), 정주영(현대), 최종현(선경그룹) 회장 같은 분들도 애독자였고요. 정치인들뿐 아니라 30~40대들도 많이 읽었어요. 아무래도 그 시절 그 나이 대 분들은 일제시대를 겪었으니까요."

―혹시 얼마 전 돌아가신 분은?

"사실 제가 사기를 당해 소송을 하면서 그분과 알고 지낸 적이 있어요. 성실하고 순수한 분이었는데…, '대망'을 읽진 않았다고 알고 있어요. 그걸 봤으면 그리 되지 않았을 텐데."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해병들이 눈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인생 3막

고정일이 낸 책의 종류는 무려 3000가지를 웃돈다. 그중에서도 그는 전집(全集)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르블랑의 루팡전집, 소년소녀 명작전집, 세계시인전집, 그레이트북스 같은 시리즈가 나오는 족족 대박을 쳤다. 화려한 시기였다.

―대망 이전에도 히트작을 꽤 냈다고 들었습니다.

"아라비안나이트 완역판도 냈고 정비석(鄭飛石) 선생 작품, 그러니까 '번지 없는 주막' '호롱불' 같은 걸 냈지요.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氷點)'도 나왔고."

―그레이트북스…, 이름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군요. 저도 다 읽어본 전집들인데.

"그렇지요? 저 개인적으론 공부를 다시 할 수 있게 돼 기뻤어요."

―공부?

'강문중·고교라고 야간학교를 다녔습니다. 책은 책대로 내면서요. 그때 동기들 중에 유명인이 꽤 돼요. 가수 조영남, 배우 백일섭, 작가 이문열씨도 그 학교를 나왔다고 하더군요. 학교에서 본 기억은 없지만. 그리곤 성균관대학 국문과 야간에 진학했지요."

―당시 고 선생의 출판사는 규모가 어땠습니까.

"그리 큰 축에 속하진 않았어요. 을유, 정음, 삼중당, 동아출판사, 교학사가 아무래도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때 조심했으면 좋았을 텐데 백과사전에 도전했지요.

"욕심이 났어요. '왜 우리에겐 브리태니커 같은 게 없나'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백과사전이라곤 학원사에서 50년대에 만든 6권짜리뿐이었거든요. 문형이 아까 '내는 책마다 돈 버니 좋으냐'고 했지만 전 인생에서 중요한 게 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뭔가를 남기고 가느냐지요."

―그래도 그 큰 동아출판사가 백과사전 만들다가 곤욕을 치른 걸 봤으면 조심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김상문 선생이 200억원을 들여 30권짜리 백과사전을 만들다가 부도가 날 지경이 됐지요. 그런데 전 이상하게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보다 '동아백과보다 더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1979년부터 기획해 1985년 무렵부터 일을 본격적으로 벌인 겁니다."

―그때 노조(勞組)가 문제를 일으켰지요.

"재벌회사도 아니었는데…. 1년 가까이 말썽을 부렸어요. 월급은 200명분이 나가는데 일은 못하니 재정압박이 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백과사전은 절반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위기를 어떻게 타개했습니까.

"국민들에게 광고로 호소했지요. '이것으로 끝나면 동서문화사는 세상에서 없어집니다. 절반 나온 백과사전을 사주시면 그 돈으로 나머지 절반을 만들어 꼭 보답하겠습니다'라고요."

―일종의 구걸인데 그게 통하던가요.

"배우 신성일씨며 각 대학 교수님들이 동참해줬어요. 주문이 막 밀려들었어요. 그 시절만 해도 그런 의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완간을 했는데 이번엔…."

―또 뭡니까.

"KBS에서 뉴스에 우리 백과사전만 딱 집어 오류가 있다고 보도를 한 거예요. 그것도 5분씩이나. 다른 백과사전은 거론도 하지 않고.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다음 날 박권상(朴權相) 사장께 달려갔어요. '같은 프로그램에 같은 분량으로 정정보도해 달라'고. '선생님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분 아니냐'고."


두 번째 장진호

고정일의 삶을 들으며 '장진호'가 생각난 건 왜일까. 미 해병이 중공군의 협공에 빠져 장진호에서 고전한 것처럼 그도 백과사전이라는 무형의 장진호에 빠졌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지만 짧은 삶에 사연은 길다.

―소용이 없었을 것 같은데.

"꿈쩍도 하지 않고 소송(訴訟)만 지루하게 이어졌지요. 결국 진이 빠지게 소송을 하다 돈 1억5000만원에, 공식사과받고 끝냈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회사는 다 망가졌는데."

―자꾸 실패한 이야길 물어 미안하지만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은 없었나요?

"교학사 양철호 사장도 말리고 백과사전 낸 김상문 선생도 말리셨지요. '내가 해보니 안 된다'고. 을유문화사 정진숙 선생도 말렸고. 그렇지만 전 꼭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도 했다니 고집이 대단합니다.

"제가 이런 말 안 하려 했는데, 전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어요. 해방 후 좌우가 부닥칠 때 자진월북한 박헌영·이강국·김두봉·홍명희는 사실 기라성같은 천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김일성에게 당한 겁니다. 그 뒤로 북한에선 김일성류의 '성골(聖骨)'만 살아남게 됐잖아요. 리영희, 백낙청 선생 같은 분들은 히틀러보다 더 잔인한 유례없는 독재정권을 외면하고 있는데 전 그들의 실체를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그 수단이 바로 백과사전이었던 겁니다."

―지금처럼 포털사이트가 위력을 발휘하면 백과사전은 더더욱 안 될 것 같은데.

"하하! 제가 지금 백과사전 콘텐츠를 야후 코리아에 서비스하고 있는데 그 사용료가 월 1000만원이에요. 말이 안 되지요. 사실 일본 평범사(平凡社), 프랑스의 라루스, 독일 브룩하우스처럼 백과사전 낸 출판사들은 거의 다 망했어요. 브리태니커도 그렇고."

―그런데 저쪽 책장을 보니 여전히 전집을….

"동양문화 관련 책인데 100권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에 있는 것들도 다시 낼 생각을…."

―어? 이건 '딱따구리'네요.

"어린이용 도서입니다. 100권까지 나왔지요. 1978년에 나왔는데 한때 전 국민의 필독서로 불린 겁니다."

―저 같으면 집 날리고 출판사 어려워지면 좌절했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소설가로도 데뷔했습니다.

"선우 선생께서 권했어요. '자네는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고. 제가 무슨 글을 쓰겠느냐고 하자 '누구든 노력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소설을 쓰게 된 겁니다."

―선우 선생과 친분이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분이 퇴직한 날도 전 그분 댁에 있었어요.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을 비교할 수 있는 건데요. 박 대통령이 선우 선생께 감사원장 자리를 제의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선우 선생은 일본 하이쿠의 대가 바쇼의 글로 답했답니다. '들에 핀 꽃이 어여쁘다고 집안에 옮겨놓으면 예쁠 수가 있을까' 뭐 그런 내용으로. 박 대통령은 금세 그 말을 알아들었대요."

―그럼 다른 분은.

"전 대통령도 선우 선생께 한 신문사 회장자리를 제의했어요. 선우 선생이 '지금 구상 중인 장편과 단편이 있다'고 하니 '아니, 신문사 경영하면 소설 못쓰느냐'고 했다는 겁니다. 선우 선생은 원래 독립기념관장을 하시려 했어요. 다 결정됐는데 KBS의 6·25 기획물 만드느라 너무 무리하다 그만…."

―선생의 삶엔 정말 풍파(風波)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람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징그럽지요. 폭격 맞은 날 아침 창자가 튀어나온 동생들 모습도 지금 생각나고….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의 모습도 생각나네요. 생명은 끈질겨요. 그래서 저도 출판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동서문화사 대표 고정일이 ‘패전의 역사’를 쓴 ‘불과 얼음’을 출간했다. 신문팔이하다 청계천에 헌책방을 내고 출판사 사장까지 오른 그다. 고정일은 책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얻었다. 백과사전 펴내다 어려움도 겪었지만, 책 만들고, 쓰고, 파는 ‘이야기꾼’이길 포기하지 않았다./주완중기자 wjjo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