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참고

사찰·문화재 많은 충절의 도시… 생생한 역사체험 떠나보자

namsarang 2010. 2. 26. 18:12

[녹색 행복도시 의정부]

사찰·문화재 많은 충절의 도시… 생생한 역사체험 떠나보자

 

입력 : 2010.04.27 03:18

의정부의 명소들

의정부는 경기북부 10개군 중 끝에서 두 번째로 작은 땅 덩어리(면적 81.58㎢)이지만 의외로 수려한 자연과 문화시설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시를 동서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도봉산, 수락산, 사패산, 천보산 등은 산을 좋아하는 이들의 명소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고 이곳에 자리 잡은 많은 전통사찰들은 찾는 이로 하여금 경건하고 편한 마음을 갖도록 해주기에 충분하다. 의정부에는 특히 태조 이성계와 관련 있는 문화재들이 여럿 있다.

이성계가 왕자의 난으로 함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머무른 '회룡사', '충신은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이성계의 권유를 물리치고 은거하던 고려 말 충신 조견 등의 위패를 모신 '송산사지(松山祠址)'가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박태보를 모신 신당 '노강서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그후 누명을 쓰고 죽은 '정문부 장군 묘',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헌을 한 '신숙주 선생 묘' 등 각종 문화재가 의정부를 충절의 도시로 불을 밝혀주고 있다.

               ▲ ‘왕자의 난’으로 함흥으로 옮겼던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다 머물렀다는
                   ‘회룡사’. / 김건수 객원기자
회룡사(回龍寺)

도봉산 회룡골에 있는 경기도 전통사찰 제7호인 회룡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681)에 의상스님이 창건한 절로 의정부에서는 망월사 다음으로 오래됐다. 6·25 때 완전히 불타 없어진 이후 대웅전, 선실 등을 차례로 복원하고 1971년 큰 법당을 신축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룡사에는 태조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1881년에 쓰인 '회룡사 중창기'에 따르면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함흥으로 옮겼던 태조가 아들 태종의 거듭된 간청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이곳에 있던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찾았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다 절을 중창하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회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또 함흥에 있던 태조가 돌아오자 무학대사가 기뻐해 회룡사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정문부 장군 묘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한 정문부는 북평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성에서 이붕수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길주에서 적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워 길주 목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관계했다는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죽었다. 그 후 숙종 때 무죄임이 밝혀져 좌찬성이란 높은 벼슬을 추증받았다. 의정부시 용현동 379-281번지 묘 앞 동남쪽 20m 지점에 그의 신도비가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27호.

신숙주 선생 묘

무송군부인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석·상석·문인상·한글창제 사적비 등 각종 석물들이 있다. 그 중 한글창제 사적비는 후에 건립한 것이다. 신숙주는 조선시대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집현전의 수찬(修撰)을 지내면서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고,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참여해 정난공신 2등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우의정·좌의정을 지냈으며, 1471년(예종 즉위년)에는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경기도기념물 제88호.

                            ▲ 1.망월사 2.박세당의 고택 3.정문부 장군 묘 4.노강서원
송산사지(松山祠址)

고려 말 충신으로 새 왕조인 조선의 임금을 섬기기를 거부하고 은거하여 여생을 마친 조견·원선·이중인·김주·김양남·유천 등 여섯 사람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조견, 정구, 원선은 '충신은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절을 내세워 이성계의 끈질긴 권고를 끝내 물리치고, 송산동 삼귀(三歸) 마을에 들어와 숨어 살았다. 조견의 호가 송산이기 때문에 송산동은 그의 호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며, 조견·정구·원선 세 사람이 먼저 돌아온 곳이라 하여 삼귀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경기도기념물 제42호.

노강서원

의정부시 장암동에 위치하고 있는 노강서원은 조선조 숙종 때의 문신 문열공 박태보를 모신 신당이다. 박태보는 1654년에 서계 박세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급제하며 벼슬길에 올랐다. 1680년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좌랑, 암행어사, 파주목사 등을 지냈다. 나이 36세이던 1689년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전라도 진도로 귀양살이를 가던 도중 노량진에서 옥독(獄毒·매 맞은 독)으로 죽었다. 박태보는 학문과 문장에 능통하고 글씨도 뛰어나게 잘 썼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노강서원은 원래 노량진에 있었고 1695년에 건립되었다. 1925년 홍수로 한강 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노강서원이 물에 떠내려갔다. 196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이곳에 새로 노강서원을 건립하고 1977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 41호로 지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