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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능소화(凌霄花)

namsarang 2010. 7. 21. 17:24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68] 능소화(凌霄花)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행동생태학

 

우리 동네 연희동은 요즘 골목마다 능소화가 만발했다. '하늘을 업신여기는 꽃'이라 했던가? 거의 한 집 건너 담벼락마다 능소화가 하늘을 우러러 너울거린다. 일명 '양반꽃'을 심었다가 관아에 끌려가 볼기라도 맞을까 두려워 나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건만 옆집 능소화가 담을 넘어와 우리 집 외벽에 흐드러졌다.

몇 년 전 온 가족이 함께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가 경포호 남쪽 초동 솔숲에 있는 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 남매의 생가를 찾은 적이 있다. 고즈넉한 고택에 능소화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자원봉사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옛날 '소화'라는 이름을 가진 궁녀가 단 한 번의 승은을 입고 빈이 되었으나 그 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은 임금을 기다리다 요절한 넋이 꽃으로 피어났다고 한다. 그 하염없는 기다림이 아직도 여전한지 능소화는 지금도 연방 담 너머를 기웃거린다.

능소화는 암술 하나에 수술 넷을 지니고 있다. 능소화의 속명(屬名·genus) 'Campsis'는 '굽은 수술'이라는 뜻인데, 꽃을 들여다보면 정말 두 쌍의 수술이 서로 머리를 조아리며 암술을 위아래로 감싸고 있다. 한 쌍의 수술은 암술보다 위에, 그리고 다른 한 쌍은 더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능소화를 보며 늘 왜 키가 다른 두 쌍의 수술이 암술을 포위하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최근 중국 생물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서로 다른 종류의 곤충이 각각의 수술을 담당한단다. 긴 수술은 꼬마꽃벌이, 그리고 짧은 수술은 말벌이 주로 찾는단다. 소화는 일편단심 임금님만 바라보고 있는데 허구한 날 하나도 아니고 두 종류의 '벌레'가 늘 집적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다. 고 박경리 선생님은 '토지'에서 "미색인가 하면 연분홍 빛깔로도 보이는" 능소화를 최참판 가문의 명예를 상징하는 꽃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SBS 대하드라마 '토지'의 제작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슨 명예를 지키려 목숨까지 바쳐야 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능소화의 화려함 뒤에는 울컥거리는 애절함이 숨어 있다. 이런 사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양 사람들은 능소화를 '아침 고요(Morning Calm)의 꽃'이라 부른다. '아침 고요의 나라'의 아침을 여는 꽃 능소화, 너 참 아름답구나!
 

능소화

중국이 원산지로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심을 수 있어 양반꽃이라 부르기도 했다. 능소화과의 잎지는 덩굴식물인 능소화는 벽을 타고 오르거나 다른 나무를 타고 자란다. 여름에 피는 나팔 모양의 주황색 꽃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