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모노세키조약
淸 리훙장, 日청년에 피습… 청일전쟁 승리한
日 주도로 1條에 '조선은 독립국' 넣어…
메이지 주역들 가르친 하기市 요시다 쇼인 신사엔
폭우에도 많은 참배객 북적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은 양국뿐 아니라 중국·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들의 대결과 협력 속에서 진행됐다. 당시 열강은 어떤 타산과 외교적 구상에서 움직였고, 조선은 과연 이에 적절하게 대응했는가. 우리는 치열하고도 냉정했던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강제병합으로 가는 첫 단추가 끼워진 시모노세키 조약부터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강제병합 늑약까지 조선의 운명을 좌우한 국제정치의 현장을 찾아 10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급박했던 상황을 재구성한다.
1895년 3월 20일 청일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청국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은 나흘 뒤 숙소인 정토종 사찰 인죠지(引接寺) 부근에서 일본 청년에게 총격을 당했다. 왼쪽 눈 바로 1㎝ 아래에 상처를 입은 그는 황급히 피신해서 긴급 수술을 받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리훙장은 숙소에서 강화회담 장소인 고급음식점 '슌반로(春帆樓)'까지 언덕길을 오가며 회담 타결에 매달렸다.
일본이 시모노세키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슌반로를 강화회담장으로 택한 것은 전략적인 것이었다. 이곳을 안내한 기무라 겐지(木村健二) 시모노세키시립대 교수는 "강화회담의 일본측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 군함을 바다에 늘어놓고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곳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청국의 실력자 리훙장이 강화회담을 위해 일본에 왔다는 것은 지난 10년 동안 일어난 두 나라의 위상 역전을 잘 말해준다. 1885년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톈진조약을 맺을 당시 리훙장은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훙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러 바다를 건너야 했다.
그만큼 청국의 사정은 다급했다. 1894년 7월 20일 충남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이 청국 함대를 기습하면서 시작된 청일전쟁은 이듬해 3월 중순 일본의 완전한 승리로 마무리됐다. 일본군은 청국 수도 베이징을 위협할 수 있는 보하이 만과 츠리 해협을 장악한 데 이어 랴오둥 반도까지 점령했다.
- ▲ 리훙장 등 청국 대표단과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대표단이 시모노세키 ?V반로에서 벌인 청일전쟁 강화회담 장면을 그린 일본 전통회화 우키요에(浮世繪). /일조각 제공
일본은 4월 17일까지 계속된 강화회담에서 조선의 독립, 랴오둥 반도·타이완·펑후 열도 할양, 배상금 2억냥 등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이끌고 와서 일본을 강제개국시킨 지 불과 40여년 뒤에 서양 여러 나라와 맞먹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일본이 불과 한 세대 만에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 힘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국정을 개혁하고 서양식 문물제도를 적극 수용한 데서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정신적 뿌리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이라는 선각자였다. 그는 야마구치현 하기(萩)시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학당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그곳에서 배웠다.
하기는 시모노세키에서 지방선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네 시간을 넘게 달려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었다. 13일 도착한 하기 도심 곳곳에는 '유신의 고향' '일본 근대화가 시작된 땅' 등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요시다 쇼인을 모신 쇼인신사는 폭우에도 단체 관람객을 비롯한 많은 일본인이 참배하고 있었다. 인구 5만명의 작은 시골도시인 하기와 인근 지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부터 간 나오토(菅直人) 현 총리까지 9명의 총리가 배출됐다. 지난해 요시다 쇼인 150주기를 기념해 새로 지은 지성관(至誠館)의 곤도 다카히코(近藤隆彦) 관장은 "하기가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것은 쇼인 선생이 신분과 관계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교육의 폭과 수준을 높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 ▲ 기무라 겐지 시모노세키시립대 교수가 시모노세키 일청강화기념관에 전시된 회담장을 보며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당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한수 기자
조선 정부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반겼다. 조약 제1조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은 1885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에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고, 종래 명목적이던 종속관계를 실질적인 속국관계로 전환하려 한 청국의 전횡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청국 사신을 맞이하던 서울 서대문 밖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청국에 대한 복종을 상징하는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쓰러뜨렸다. 병자호란 때 자결한 김상용의 후손인 김가진은 "이제야 여러 왕대에 걸쳐 당한 굴욕을 씻고 사사로운 원수도 갚게 됐으니, 개화의 이익이 어떠한가"라고 했다.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확인한 것은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을 청국의 세력권에서 떼어내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수순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정부는 이런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군무대신 조희연은 "일본이 청국과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우리의 고유한 독립권을 인정하여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며 "일본 군사가 바다와 육지에서 크게 이기는 공로를 이룩했으니 특별히 칙사를 파견하자"고 건의했다.
조선 정부가 이렇게 오판한 원인은 슌반로 앞에 1937년 만들어진 일청강화기념관(日淸講和紀念館)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 옆에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흉상을 세워 놓은 기념관에 들어서자 강화회담 당시 양국 대표가 앉았던 탁자와 의자를 이름표와 함께 재현해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마무리를 위한 것이었고,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는 회담이었지만 조선 대표나 관계자의 이름은 없었다. 이렇듯 격변하는 국제 정세와 일본의 의도를 읽지 못한 조선은 결국 이후 열강들이 벌이는 파워 게임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말았다.
조선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