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英·日 동맹… 英·러 사이서 이중플레이
랜스다운 외무장관 증손자, 방명록의 이토 사인 보여줘
일본공사 뻔질나게 드나든 서명 장소
랜스다운하우스… 지금은 프라이빗 클럽으로
1902년 새해 첫날, 네 차례나 일본 총리를 지낸 노정객 이토 히로부미가 하야시 다다스(林董) 주영일본공사와 함께 헨리 랜스다운 영국 외무장관 사저(私邸)인 보우드 하우스를 찾았다. 이토는 당시 러시아와 동맹을 논의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직후였다. 다음 날 오전 10시, 이토는 랜스다운 외무장관에게 말했다. "이중 플레이를 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러시아와 동맹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런던 패딩턴역에서 기차로 1시간15분 거리인 영국 서남부 윌트셔(Wiltshire) 카운티의 작은 마을 칸(Calne). 나지막한 언덕과 숲에 둘러싸인 보우드 호텔 1층 대기실엔 진홍빛 가운을 걸친 헨리 랜스다운(Lansdowne·1845~1927) 외무장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의 증손자인 찰스 랜스다운(69) 경은 "1959년 인도 대통령이 보내줬다"고 했다. 헨리 랜스다운은 외무장관이 되기 전 캐나다와 인도 총독을 거쳤다.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보우드 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이토 히로부미가 남긴 서명이 보입니까. 그 밑에는 하야시 다다스 이름도 있네요." 랜스다운 경은 100년 전 낡은 방명록을 펼쳐보였다. "연초 휴가 시즌에 기자들이 없는 곳에서, 단 둘이 얼굴을 맞대고 개인적 신뢰를 쌓아가는 게 진짜 외교 아닌가요." 그는 영·일동맹의 조인자인 랜스다운 장관과 하야시 공사의 사진을 나란히 싣고, "영·일동맹은 영국 정부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라고 보도한 당시 영국 신문 스크랩을 건네줬다.
- ▲ 1902년 1월 1일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다다스 주영일본공사가 영·일동맹의 막후교섭을 위해 찾은 헨리 랜스다운 영국 외무장관 사저 보우드 하우스. 오른쪽은 랜스다운 외무장관의 증손자인 찰스 랜스다운 경이다. /김기철 기자
이중 플레이를 한 적이 없다는 이토의 말은 거짓이었다. 러시아에서 니콜라이 2세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을 먼저 만나 협상을 벌인 이토의 행적을 알고 있던 랜스다운 외상도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친러파'였던 이토도 이 무렵에는 영국과 동맹을 맺는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 외상, 하야시 다다스 주영일본공사가 추진한 영·일동맹에 메이지 일왕이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었다.
런던 도심 그린 파크 근처 랜스다운 하우스. 랜스다운 외무장관의 런던 거처가 있던 이곳은 1935년부터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으로 사용되고 있다. 클럽 안 '라운드 룸'의 벽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등 미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보낸 편지와 초상화가 보였다. 직원 앨리슨 굴레이(Gourlay)씨는 "1782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1대 랜스다운 경이 이 방에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함께 미국과의 강화조약을 기초했다"고 말했다. 1902년 1월 30일 랜스다운 하우스에선 세계를 놀라게 할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대영제국의 랜스다운 외무장관과 아시아의 작은 나라 일본의 하야시 주영공사가 동맹을 체결하는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영·일동맹은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확보한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주도하고 독일과 프랑스가 가세한 삼국간섭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일본이 절치부심 끝에 따낸 외교적 승리였다. 1만40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내면서 요동반도를 품 안에 넣었다가 빼앗긴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그 방법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렸다. 이토가 만주는 러시아, 한반도는 일본이 나눠 먹는 '만한(滿韓) 교환론'을 내세운 데 반해, 가쓰라와 고무라는 조선은 물론 만주도 일본에 필요하다며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영국과 손을 잡자고 주장했다. 1901년 여름부터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하야시 주영공사는 랜스다운 하우스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제휴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면, 영국은 자극을 받아서 일본과 협정 체결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하야시는 비밀회고록에서 일본이 이중 플레이를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 ▲ 이토 히로부미가 방명록에 남긴 서명(위에서 세번째). 영어로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라고 썼다. 바로 밑에는 하야시 주영일본공사의 서명이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영·일동맹이 조선의 운명에 미칠 영향을 주시했다. 장지연·박은식이 이끌던 황성신문 1902년 2월 21일자 논설은 '조선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약속한다'는 영·일동맹 전문(前文)의 진의에 의문을 제기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해 독립주권과 강토보전의 평화질서를 유지한다 함은, 외적으로 보면 이웃나라의 호의에서 나온 것도 같고, 무시무시한 정략(政略)을 포함한 것도 같은지라."
그러나 당시 조선의 집권층은 영·일동맹을 빚어낸 국제질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의 주권수호 외교를 도왔던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멸망사'에서 영·일동맹을 촉진한 요인 중 하나로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을 지목했다. 1900년 3월 체결된 한·러 거제도 비밀협약 등 조선이 급격하게 러시아로 기운 것이 영국 등 서구 열강의 경계심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국제정치학자 이삼성 한림대 교수도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친(親)러시아 노선이 치명적이었다고 말한다. "삼국간섭 이후 만주를 중심으로 북중국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는 일본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경계심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를 끌어들인 조선의 결정은 영국과 미국 등 대서양 세계가 주도하는 국제사회가 한반도에서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 지배권의 확장을 지원하고 승인하도록 재촉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힘겨루기하던 당시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제때 힘도 기르지 못했던 조선은 세계 최강국 영국과 손을 잡고 조선을 압박하는 일본의 행보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일동맹 조약 〈요지〉
제1조: 양국은 청나라와 한국의 독립을 서로 승인했다. 영국은 청나라에서, 일본은 청나라와 한국에서 정치·상업상 각별한 이익을 가지고 있고, 그 이익을 침해당하면 필요불가결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제2조: 어느 한 쪽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제3국과 전쟁을 개시하는 때에 다른 한쪽은 엄정중립을 지키고, 다른 나라가 동맹국에 대한 교전에 가담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제3조: 상기 경우에 다른 나라가 동맹국에 대해 교전에 가담하는 때에 다른 한쪽은 동맹국을 원조하고 교전에 가담해야 한다.
제6조: 본 협약은 5년간 효력을 가진다.
조선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