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韓·日 강제병합 100년

[3] 포츠머스조약

namsarang 2010. 8. 4. 22:50

[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을 찾아]

市 전체가 '회담 유적지'… 루스벨트 박물관엔 日·러의 답례품 전시

  • 포츠머스(뉴햄프셔)·오이스터 베이(뉴욕)〓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3] 포츠머스조약


美 루스벨트 대통령 중재로 日·러, 한달간 '회담 전쟁' 日, 한국보호·지도권 얻어
매년 9월5일 오후 3시47분 포츠머스 학교와 교회들 10분간 종 울리며 조약 기념

"실크해트를 쓰고 턱시도를 입은 일본러시아 대표단이 각각 부두에서 내려 200m쯤 이 길로 걸어와서 평화빌딩으로 들어왔습니다."

지난달 21일 오전 미국 뉴햄프셔주의 휴양지 겸 군사도시인 포츠머스 해군조선소(Naval Shipyard) 안 평화빌딩 앞. 공보관 게리 힐데스(Hildeth·53)씨가 바다 쪽을 가리켰다. 3층짜리 붉은 벽돌색 평화빌딩 정면에 박힌 동판은 그날의 역사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이 건물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 대표단의 평화협상이 열렸고, 1905년 9월 5일 오후 3시 47분, 두 나라의 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조약이 조인됐다.'

1905년 8월 8일, 행정구역으로는 메인주 키터리(Kittery)에 속하는 해군조선소에 양국 대표단이 몰려들었다.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과 다카히라 고고로 주미일본대사, 그리고 재무장관을 지낸 러시아의 세르게이 비테와 로젠 주미러시아대사가 수행원들과 함께 왔다. 한 달간의 '회의실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왜 포츠머스였을까. 힐데스씨는 "포츠머스가 군(軍)시설이기 때문에 안전이 확보되면서 언론을 피할 수 있고, 비교적 쾌적한 날씨 속에서 강화를 논의할 수 있어서"라고 말했다. 해군 차관보를 지낸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포츠머스 해군조선소를 골랐다는 것이다.

평화빌딩 1층 입구 벽에는 그날의 풍경을 전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빌딩 앞에 늘어선 대표단의 마차 행렬과 포츠머스 시가를 가로지르는 러·일 대표단의 행렬을 환영하는 시민들…. 2층엔 일본측 수행원들이 쓰던 방 두 칸을 터서 포츠머스 회담 전시실을 만들었다. 루스벨트, 고무라, 비테의 사진과 함께 대표단 도착을 알리는 '포츠머스 타임스' 신문 1면 기사와 회담 모습을 담은 사진, 평화빌딩을 담은 기념부채와 엽서도 눈에 띄었다.

'평화! 이 말 한마디가 포츠머스를 감전시키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강화조건에 동의했고, 전쟁은 끝날 것이다.' 누렇게 빛바랜 105년 전 포츠머스 헤럴드 신문 1면에는 '평화(Peace)'라는 제목이 주먹만한 활자로 찍혔다.

1905년 러시아와 일본 대표단이 함께 묵었던 웬트워스 바이 더 시 호텔. 전쟁터에서 총구를 겨눴던 두 나라 대표단은 한달간 같은 호텔에서 지내며 항구 건너편 회담장으로 출퇴근했다. 1982년 문을 닫았다가 2003년 메리어트 호텔로 재개관했다. /포츠머스=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인구 2만1000명의 소도시 포츠머스는 시내 전체가 포츠머스 회담 유적지다. 포츠머스 회담 대표단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한 웬트워스 바이 더 시 호텔, 지금은 콘도와 레스토랑으로 바뀐 기자단 숙소 록킹햄 호텔,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해군조선소 평화빌딩 대신 일반 관람객을 위한 '포츠머스조약 특별전'을 여는 존 폴 존스 하우스, 평화조약 성사를 위한 예배를 드렸던 노스 처치…. 105년 전 회담 당시의 건물들은 대부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미국 독립전쟁 유적을 소개하는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을 본떠, 포츠머스조약 트레일까지 만들었다.

포츠머스의 학교와 교회는 매년 9월 5일 오후 3시 47분이면, 해군조선소의 경적 소리에 맞춰 10분간 종을 울려 포츠머스조약을 기념한다. 포츠머스회담 이래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다. 뉴햄프셔주는 올해부터 9월 5일을 '포츠머스조약의 날'로 선포하고 주(州) 차원의 기념행사를 가질 만큼, '포츠머스조약'에 공을 들이고 있다.

메이지 일왕과 니콜라이 2세가 각각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선물한 일본도(왼쪽)와 은제 포도주병. 루스벨트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오이스터 베이=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일본과 러시아는 회담 초반부터 충돌했다. 고무라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비테는 그럴 경우 러시아의 이익이 손상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일본의 완강한 태도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포츠머스조약 2조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상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지도·보호할 수 있는 권리까지 허용했다. 회담 막바지까지 갈등을 벌인 것은 배상금과 사할린 할양 문제였다. 고무라는 비테에게 "배상금을 포기하면 사할린 남부 할양을 받아들이겠는가"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마지못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뉴욕 JFK 국제공항에서 동북쪽으로 60㎞ 거리에 있는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의 국립공원 사가모어 힐에는 포츠머스조약의 산파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재임 1902~1909년)의 사저(私邸)와 박물관이 있다. 루스벨트는 여름철은 이곳에서 정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여름 백악관'(Summer White House)으로 불린 곳이다. 루스벨트 사저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루스벨트 박물관에는 메이지 일왕이 선물한 일본도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준 은제 포도주병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조약을 막후에서 조율한 지휘자였다. 포츠머스로 향하는 러·일 대표단을 오이스터 베이에서 먼저 만나 중재에 나섰고, 회담이 난항에 부딪혔을 때는 하버드대 동기생인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 일본특사와 로젠 주미러시아대사를 만나 막후조정에 나섰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조약을 성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 미국인으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루스벨트의 사가모어 힐 사저 1층 노스 룸(North Room)에 걸린 지름 30㎝가량의 태극무늬 금속제 접시 한 점은 독립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던 구한말(舊韓末) 외교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자원봉사자 밀튼 엘리스(Elis)씨는 "1905년 사가모어 힐을 방문한 이승만이 전달한 고종의 선물"이라고 했다. 고종의 측근 민영환·한규설의 요청에 따라 미국에 온 이승만은 1905년 8월 4일 루스벨트를 만나 "조미통상수호조약에 따라 포츠머스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7월 27일 일본을 방문한 태프트 국무장관 대리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가쓰라 총리와 맺은 밀약을 승인한 뒤였다.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보름쯤 뒤인 그해 8월 12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도·보호권을 승인받았다. 1902년 1월 제1차 영일동맹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남겨둔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한다'는 구절은 제2차 영일동맹에선 사라졌다. 포츠머스회담은 일본이 당시 세계를 주도하던 영국과 미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 러시아를 상대로 벌인 마무리 외교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