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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100년과 이병철의 꿈

namsarang 2010. 8. 5. 23:43

[조선데스크]

망국 100년과 이병철의 꿈

송의달 산업부 차장대우 edsong@chosun.com

 
 
       ▲송의달 산업부 차장대우
매년 8월이 되면 한일(韓日) 관계를 둘러싼 얘기들이 쏟아진다. 한일병합이 이뤄진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일본 기업 쪽에서 '한국을 보자'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이는 지난해 한국의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사상 처음 일본을 앞지른 데다, 이른바 '사천왕(四天王)'으로 불리는 삼성·현대차·포스코·LG 같은 대기업들이 약진한 결과이다.

'한일 기업 역전(逆轉)' 소식이 나올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고(故)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다.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고 그들과 대등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견지한 그는 '일본 벤치마킹'을 통한 '일본 추월' 노력을 평생 다 했기 때문이다.

호암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포함한 아들 세 명을 모두 일본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보냈다. 손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도 일본의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주변부터 철저하게 '일본 탐구 모드'로 만든 것이다. 한때 삼성그룹 임원의 70% 이상이 일본어를 구사했을 정도로 삼성은 모든 사업의 눈높이를 일본에 맞췄다.

예컨대 신라호텔 식당의 초밥과 튀김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도쿄 오쿠라(大倉)호텔 주방장에게 밥풀은 몇 개를 넣는지, 온도는 몇 도에서 끓이는지 등을 일일이 물어 적용하는 식이었다. 1959년부터 30여년 동안 매년 정월에 도쿄를 방문, 각계 전문가들의 선진 정보와 의견을 들으며 새 사업 아이디어를 모색하는 '도쿄 구상'으로 자신을 단련했다.

"호암은 주로 가쓰미가세키 빌딩 안에 있는 책방이나 아키하바라 전자상가를 찾았다. 책과 전자제품 외에 그가 직접 무엇을 사는 걸 본 일이 없다."(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의 증언)

일본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심은 이윤 창출 목적이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무살 때이던 1930년 일본 유학차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부관(釜關)연락선상에서 배멀미로 이등실에서 일등실로 옮기려다가 일본 경찰로부터 당한 모욕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후일 내가 사업에 몰두하게 된 것은 식민 지배하에 놓인 민족의 분노를 가슴깊이 새겨두게 했던 부관연락선상의 사건 때문이었는지 모른다."('호암자전')

그가 산요전기와 NEC 등에 기술연수생을 6개월씩 보내 매일 야근을 하며 그날 배운 내용을 집단복기(復棋)토록 하고, 일본 제품을 수없이 분해·조립토록 한 것 역시 '대일(對日) 기술 독립'을 향한 열망(熱望)에서였다. 이런 노력은 1990년대 초까지 소니에 컬러TV를 납품하던 하청 기업이던 삼성전자가 지난해 일본의 내로라하는 전자(電子)회사 10개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영업이익을 낸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호암의 '꿈'은 여태 미완성이다. 특허등록 건수,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상품, 기술무역수지 등에서 한국은 일본의 상대가 안 될 정도다. "한국은 반도체·조선·LCD 같은 조립세트 산업에서만 일본보다 우위"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대일 무역적자는 올 상반기에만 181억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기록을 경신 중이다.

호암은 우리의 '경제 극일(克日)전쟁'에서 첫 선봉장으로서 승전보를 남겼다. 그에 버금가는 제2, 제3의 극일 전사(戰士)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승전보는 한 번으로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