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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들의 스트레스

namsarang 2010. 8. 7. 15:24

[태평로]

판사들의 스트레스

              ▲ 김낭기 논설위원
대구의 한 부장판사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지난달 말 투신자살했다. 이 판사가 작년 말 자기가 다니던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남긴 글이 최근 공개됐다. 그는 '판사들의 애환과 직업병'이라는 글에서 "판사는 만능이 아니다. 재판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판사가 아니라 당사자 본인들"이라며 "자신들이 가장 잘 알면서 왜 판사에게 판단해 달라고 하는지…"라고 썼다.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다.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마저 의심하게 된다.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다"라고도 했다.

어느 나라나 법정(法廷)은 거짓말의 경연장이라고 한다. 판사는 누가 참말을 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판사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바로 여기서 온다고 한다.

A씨는 B씨를 상대로 투자금 4000만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수원지방법원에 냈다. 법원은 작년 8월 A씨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A씨와 B씨의 집으로 배달된 판결문에는 A씨가 진 걸로 돼 있었다. 대법원은 진상을 알아본 뒤 이렇게 해명했다. "주심 판사가 사건이 복잡해 A씨가 이긴 경우와 진 경우로 나눠 두 가지 판결문 초고(草稿)를 미리 작성해 두었는데 판결 선고 뒤 법원 전산망에 A씨가 진 판결문 초고를 잘못 입력해 놓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다.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할지 고심을 많이 한 것 같더라." 판사가 판결문을 두 가지로 써 놓을 정도로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다는 얘기다.

참말·거짓말을 가리는 일 말고 판사들을 고민스럽게 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상식에 맞는 가치 판단을 하는 일이다. 한 판사는 "절도나 폭행 같은 형사 사건 재판에서 '오죽했으면…'과 '아무리 그래도…' 중 어느 쪽 입장에 서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고 했다. 전자 쪽이면 피고인에게 가벼운 형이 선고되지만, 후자 쪽이면 무거운 형이 선고된다는 것이다.

미국 학자들은 판사들이 재판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두 가지 유형으로 설명한다. '위로부터'의 유형과 '아래로부터'의 유형이다. '위로부터'는 판사가 개인적 신념을 앞세워 결론을 내린 뒤 여기에 맞춰 사실관계를 취사선택한다. '아래로부터'는 객관적인 사실관계와 전례(前例)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 이에 근거해 결론을 내린다. '위로부터'는 판사가 결론을 내기는 쉽겠지만 판사 개인의 주관(主觀)이 많이 개입돼 편향 판결 논란을 일으키기가 쉽다. '아래로부터'는 판사는 고민스럽겠지만 당사자와 국민들이 판결에 납득할 가능성은 크다.

판사들이 참말·거짓말을 가리고 상식에 맞는 가치판단을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아래로부터' 방식의 재판을 하는 판사가 많아진다는 얘기다. 이런 판사일수록 '내가 한 판결이 혹 잘못된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도 내가 한 판결에 동의할까' 하는 점을 늘 염두에 둘 것이다. 반면에 '판결로 사회를 바꿔 보겠다'는 생각이 강한 판사들은 '위로부터'의 방식을 따를 가능성이 크다. 올해 초 상식과 동떨어진 무죄 판결 시리즈로 논란을 일으킨 형사 단독 판사들이 여기에 해당할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판사들이 고민을 많이 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국민들한테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만큼 올바른 재판을 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