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상인 서울대 교수·사회학
공포체험, 저승체험… 구걸체험, 음주체험…
전교조 시험거부도 체험학습으로 대체
체험이 강박, 영리스펙, 점수가 되니…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인생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진다. 물질적으로 연명(延命)하는 것에 대한 염려가 줄어들면서 무언가 자기 자신에게 재미있고 의미 있는 노력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삶의 질을 따지며 개인의 행복 극대화를 중시하는 추세는 1960~70년대 이후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풍미한 행동지침은 '너의 삶을 즐겨라'였다.
사람들은 즐거움의 원천을 이른바 '체험'에서 구했다. 말하자면 체험을 통해 행복을 직접 그리고 즉각 느끼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여행·스포츠·섹스·연예·영화·텔레비전·자동차·음식 등이 일상적 기쁨의 대표 소재로 자리 잡았다. 생존이 지상목표이던 시절에 의무나 자기희생이 미덕으로 군림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졌다. 소위 탈(脫) 물질사회의 시대정신은 개인의 취향과 안락을 좇아 "너의 삶을 체험하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를 두고 독일의 사회학자 게하르트 슐체(Schulze)는 '체험사회'라 불렀다. 또한 재화나 서비스가 아닌, 새롭거나 특별한 경험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의 현재 국면을 '체험경제'라고 이름붙인 것은 미국의 경영학자 파인(Pine)과 길모어(Gilmore)였다.
체험사회와 체험경제의 도래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엔 과열의 조짐이나 왜곡의 징후마저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체험시대의 문을 본격적으로 연 것은 고도 경제성장의 과실로서 1990년대 전후에 등장한 디지털 글로벌 세대다. 체험의 대상은 배낭여행, 길거리 응원, 촛불시위, 몸매 관리, 향락문화, 성적 개방, 오빠부대, 자원봉사 등으로 다양했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 한국사회는 일종의 '체험 전성시대'로 돌진하고 있다. 시나브로 체험은 관광이나 마케팅 영역은 물론 교육제도, 사회봉사, 지역개발, 사회운동, 자기계발 등 삶의 현장 대부분을 파고들었다.
문화체험, 역사체험, 생태체험, 농촌체험, 우주체험, 병영체험, 안보체험 따위는 고전적 사례다. 아프리카 체험, 북극체험, 야간체험 같은 종류나 직업체험, 과학체험, 영어체험 같은 유형에 다례(茶禮)체험, 갯벌체험, 흑미(黑米)체험, 고택(古宅)체험, 승마체험, 양치체험 같은 미세부류도 추가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공포체험, 은혜체험, 성령체험과 더불어 저승체험이라는 것도 있고, 빈곤체험, 장애인체험, 구걸체험도 부족해 가상 음주체험이라는 것도 있다. 기부체험이나 지방선거 체험처럼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있고, 자동로밍 체험, 애플리케이션 체험, 얼리 어답터 체험같이 내용이 뻔해 보이는 것도 있다. 하긴 전교조가 일제고사를 거부할 때 상습적으로 대체하는 것도 체험학습이다.
물론 체험 행위의 긍정적인 측면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컴퓨터 가상현실의 영향력이 날로 막강해지고 제도권 교육이 생활현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작금의 상황에서 오감(五感) 전체를 활용하는 체험의 인성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체험은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거나 다른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나름 효과적이다. 말하자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외견상 체험에 목말라 있는 것도 행여 우리가 살아왔던, 혹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암묵적 반작용인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체험 열풍에는 전반적으로 문제가 더 크다. 무엇보다 체험사회의 취지와 본질에 해당하는 경험의 주체성 및 진정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이는 그저 아무것에나 체험이라는 첨단 유행어를 갖다 붙인 결과다. 그리하여 한국사회의 체험문화는 대체로 상품화, 산업화, 집단화, 획일화 혹은 형식화의 경향을 띨 수밖에 없다. 체험이 강박이 되고 영리(營利)가 되며, 또한 스펙이 되고 점수가 되는 일이 오히려 더 대세(大勢)에 가깝다.
외관상 유례없는 체험시대의 만개가 우리의 삶을 오히려 피동적 혹은 피상적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역설이다. 체험이란 어디까지나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경험일 뿐 그 자체가 결코 삶의 진면목은 아니다. 체험은 온실이고 현실은 야생이라면 작금의 의사(擬似) 혹은 과잉 체험사회에 대한 약간의 경계와 조심은 불가피해 보인다. 보다 높은 문명사적 차원에서 체험사회의 개인주의적 측면을 문제 삼거나 쾌락주의적 성향을 시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차라리 시기상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