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이런일 저런일

압류 현장에서 만난 아픔들

namsarang 2010. 8. 12. 23:29

[ESSAY]

압류 현장에서 만난 아픔들

  • 기원섭 전 서울남부지방법원 집행관 법무사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이런 여인 앞에 집을 비우라 했으니
집행 현장에는 압류 딱지 붙이고 집에서 쫓겨나는 그런 아픈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세상살이 어려울수록 닫히고 막힌 마음을 열어 서로를 보듬는 일도 자주 만난다

"똑, 똑, 똑" 현관문을 두드리는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쾅! 쾅! 쾅!" 손바닥으로 세게 두드려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간 열쇠 전문가에게 강제로 문을 열게 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엉거주춤하게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 왜 문 안 열어줬니?" 머리가 맨머리여서 남자 고등학생인가 싶었다. "미안합니다. 힘이 없어 말은 안 나오고…. 기어 나오느라 늦~었~습니다." 들릴락말락한 소리였지만 목소리가 여자였다. 핼쑥해 보이는 얼굴에 머리도 빡빡 깎아 병색이 완연했다. "전 집행관(옛 집달리)인데요. 아주머니, 어디 아프세요?" "예. 대장암 말기래요. 집을 빨리 비워 드리지 못해…."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겨우겨우 입을 떼가며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했다. 거실이 딸린 방 두 칸에 화장실 하나인 15평짜리 다가구 주택에 사는 그녀는 월 20만원 월세를 못 내 전세보증금 500만원까지 이미 까먹어 집을 비워줘야 할 처지였다. 인형공장을 하던 남편은 중국산 싸구려 제품에 밀려 부도를 내고,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가 6개월 전에 집을 나갔다고 했다.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딸마저 돈 벌겠다고 집을 떠나 혼자서 산다고 했다.

애처로워 보이는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런 여인 앞에 집을 비워달라고 왔으니…. 내가 마치 저승사자처럼 여겨져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랐다. "아주머니, 집을 곧 비워주셔야 하는데, 어디 가실 데는 있어요. 주인에게 잘 말해보세요. 집주인도 인정은 있을 거예요." 그렇게 고개 돌리면서 난 이 집에 두 번 다시 오게되지 않길 빌었다."도대체 신은 있는 것입니까. 생명이 꺼져가는 이 가련한 여인을 어찌 팽개치셨습니까…." 아무나 붙들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고통과 상처를 극복해야 빛나는 인생이라고 하지만, 불행이 사람들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가,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지만 평생을 그늘 속에서 사는 이들도 많은 게 현실이 아닌가.

그 후 난 그곳을 다시 찾지 않았다. 내가 간절히 바랐던 대로 그 여인은 집주인에게 매달려 도움을 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사이 그 여인의 명이 다한 것은 아닐까. 지금도 그 여인의 휑한 눈빛이 떠오르면 나 혼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검찰 수사관 30여년을 마치고 내 스스로 선택한 집행관의 길이지만, 때론 마주치지 않고 싶은 자리도 많았다. 내가 집행관이 되어 만났던 그 수많은 군상들…. 사업자금으로 빌려간 500만원 때문에 수십년 쌓아온 우정을 허물어뜨리고 원수가 된 사람들, 유산 때문에 남보다 못한 사이로 변한 친형제들, 인생은 서로 상처를 내고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모든 게 바로 우리 서민들의 얼굴이고 삶이었다.

일러스트=김현지 기자 gee@chosun.com

집행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직업'이다.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가 있어야 할 일이 생기고,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돈 버는 그런 직업이기 때문이다. 집행관을 악마처럼 여기며 뜨거운 라면 국물을 내 얼굴에 끼얹던 할아버지, 집 곳곳에 압류딱지를 붙이자 우는 어머니를 달래며 두 주먹 움켜쥐고 달려들던 어린 아이들….

그러나 날 선 다툼의 현장에는 강제로 압류딱지를 붙이고 집에서 쫓아내는 그런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서로 슬픈 상처를 보듬고 서로를 이해하는 그런 일도 자주 만난다.

신혼부부에게 월 50만원의 사글세로 20평 아파트를 임대했는데, 단 한 번도 사글세를 내지 않아, 제기된 소송을 강제집행하러 간 날이었다. 공기업에서 정년퇴직했다는 아파트 주인인 60대 남자와 함께 아파트에 들어서자, 혼자 집에 있던 30대 초반의 여인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 전화를 왜 한 번도 안 받았어요?" "겁이 나서요. 월세를 못 내 쫓겨날까 봐…." "그렇다면 사정 얘기를 미리 말했어야 하잖아요?" "돈이 없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집주인은 살림살이 들어내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집주인과 그 여인이 나누는 말을 엿들으면서, 그 주저하는 이유를 곧 알아차렸다. "무슨 대책이라도 세워놨어요?" "그냥 나가야지요. 방법이 있겠어요." "아니, 내 말은 시간을 주면 해결할 수 있냐고요?" 그 말을 듣자 그 여인은 갑자기 "아, 예, 한 달만 시간을 주시면 밀린 돈을 내든지, 저희가 스스로 이사 가든지 하겠습니다"고 힘을 내 말했다. 그 여인은 친정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바람에 돈 없이 살림을 차려 그만 이 지경이 됐다고 했다. 집주인은 그렇게 한 달의 말미를 준 뒤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저렇게도 세상 사는 이치를 모르는 것들이…. 다 부모들 책임이지. 나도 딸 아이가 하나 있는데…. 오늘 집행 비용은 제가 다 부담하겠습니다. 쟤네들, 그 돈의 의미를 알 날이 오겠지요." 나는 그 순간 그를 보며 참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서글픈' 집행관 생활은 어쩌면 남의 작은 행복을 앗아갔는지도 모른다. 빚더미에 앉아 갈 곳마저 잃은 서민들과 만나는 그런 날이면 나도 이 직업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았다. 그러나 4년간 집행관을 하면서 손쉽게 법원 판결을 내세운 강제력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의 위로나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격려가 때론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닫히고 막힌 마음을 열어, 서로의 마음들이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작은 행복은 작은 마음으로 짓는다는 믿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