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그림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namsarang 2010. 8. 20. 17:23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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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enceslas Hollar - Rubens (State 1).jpg

 

페테르 파울 루벤스

출생

 1577년 6월 28일   독일 베스트팔렌의 지겐 

 

사망

1640년 5월 30일  네덜란드 안트베르펜

 

사인

 통풍

 

직업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다. 루벤스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역동성, 강한 색감, 그리고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교회 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로 유명하다.

루벤스는 유럽 전역의 여러 귀족들과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화실을 운영했으며, 그는 인문학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스페인펠리페 4세잉글랜드찰스 1세에게 기사 칭호를 부여받은 외교관이었다.

 

오늘날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지겐 태생인 그는, 플랑드르의 풍요로운 상업도시 안트베르펜의 법률가 출신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인문주의적 고전에 정통하였으며 라틴어는 물론 스페인어, 영어 등 언어에도 능통하였다. 특히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능력은 그가 예민한 관계에 있었던 스페인과 영국 간의 평화 사절로서 이루어낸 업적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수려한 외모와 능숙한 외교술을 겸비한 데다 역동적이며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그의 대담한 화풍은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하였고, 그는 유럽 전역의 궁정과 교회로부터 수많은 작품 주문을 받았다. 안트베르펜에서 운영하는 공방은 그가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백여 명의 조수들이 끊임없이 작업하고 그가 마무리 작업을 하는 시스템으로 제작되어 놀라운 주문량을 감당해 낼 수 있었다. 무려 2,000여 점에 달하는 엄청난 다작을 내어 유럽의 어느 도시, 궁전에 가더라도 루벤스의 작품을 한두 점은 만날 수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역동적인 인물 묘사와 풍경에 능숙했던 그는 꽃 그림과 동물 묘사에 능숙한 얀 브뤼겔(1568-1625년 : 피터 브뤼겔의 둘째 아들로 ‘벨벳 브뤼겔’이라 불림)과 공동작업을 했다. 또 동물 묘사에 뛰어난 프란스 스나이데르스(1579-1657년)는 동물들을, 루벤스는 인물과 풍경을 그리는 시스템으로 작업하여 더욱 효과적이고 우수한 수준의 작품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외교관과 화가로서 유럽 전역을 무대로 활동한 루벤스는 명성과 명예를 동시에 누린 운 좋은 인물이었다. 1598년 안트베르펜의 화가조합인 성 루카 길드에 가입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2년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한동안 만토바의 곤자가 공작의 궁정화가로도 활동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고대에 대한 연구와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코레조, 틴토레토 등의 대가들 작품에 감명을 받았으며,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생동감이 느껴지는 르네상스 회화에 심취하여, 이를 바탕으로 한 화려하고 과학적인 이탈리아 화풍과 플랑드르 지방의 섬세함과 휴머니즘이 녹아든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1608년 그가 돌아와 정착한 안트베르펜은 국제적인 문화, 상업 중심지이자 스페인 지배 아래에 있던 플랑드르에서 반종교개혁의 본거지였다. 1609년 그는 인문주의자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으나 아쉽게도 그녀는 1626년 세상을 떠나고, 53세가 된 1630년에 16세의 미모의 여인 헬레네 푸르망과 혼인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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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 덩굴 숲의 루벤스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

 (The Artist and His First Wife Isabella Brant in Honeysuckle Bower)

1609-10. 페테르 파울 루벤스. Alte Pinakothek, 뮌헨.

 

 

 

 

생 애 

유년 시절 (1577-1599)

루벤스는 1577년 독일의 베스트팔렌(Westfalen,오늘날의 노트르라인베스트팔렌 주)이라 불리는 지방의 지겐(Siegen)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안트베르펜의 법률가인 장 루벤스(Jan Rubens)와 마리아 피펠린크스(Maria Pypelincks)로, 그의 아버지는 칼뱅주의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알바 백작의 프로테스탄트(개신교)에 대한 박해와 종교적 소란을 피해 1568년 안트베르펜에서 쾰른으로 도망쳤다. 아버지 장 루벤스는 William the Silent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작센의 안나의 연인이자 변호사 및 고문직을 맡고 있었는데, 1570년 그녀의 궁전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인 장 루벤스가 그녀와의 불륜이 들통나 감옥에 갇히게 된 후 1577년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태어났다. 루벤스의 가족은 1년 후 쾰른으로 옮기게 되었다. 1589년, 아버지가 죽은 지 2년이 지나고 루벤스는 형과 어머니와 함께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했으며 라틴어를 가르치는 가톨릭학교를 다녔다. 종교는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그는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형식의 미술 분야의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안트베르펜에서 루벤스는 인문학라틴어, 그리고 고전 문학을 배웠다. 14살이 되던 해에 그는 Tobias Verhaeght의 지도 하에 미술 실습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도시에서 유명했던 두 명의 매너리즘 화가 아담 반 누트(Adam van Noort)와 오토 반 빈(Otto van Veen)에게서 미술을 지도받았다.[1] 루벤스는 한스 홀베인이나 마르카토니오 레이몬디의 판화, 그리고 라파엘로 등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작품들을 모작하면서 공부했다. 루벤스는 1598년 공부를 마치고 '성 루크 화가조합(Guild of St. Luke)' 에서 조합장 및 교사직을 맡게 된다. [2]

이탈리아에서의 삶 (1600-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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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타는 러마 백작의 초상, 1603, Museo del Prado, 마드리드.

1603년 처음으로 스페인을 방문한 루벤스가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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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rgin and Child Adored by Angels, 1608. 석판과 구리판에 오일.

발리셀라의 산타 마리아 교회, 로마. 세 폭 제단화 중 중앙 패널 

 

1600년에 루벤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의 요람인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는 베니스에서 잠시 머무르며 티티안베로니스, 그리고 틴토레토의 작품을 감상했으며, 이후 빈센조 I 백작에게 사랑을 받으며 그의 성이 있는 만투아에 정착했다. 베로니스틴토레토의 색감과 구도는 루벤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이후 그의 성숙기의 스타일은 티티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3] 빈센조 백작의 후원을 받으며 1601년 루벤스는 피렌체와 로마를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예술작품과 이탈리아의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며 공부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라오콘과 그의 아들(Laocoon and His Sons)이 특히나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와 함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4]또한 그는 당시 큰 화제가 되고 있었던 매우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작품을 그리는 카라바조의 작풍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후 루벤스는 그리스도의 무덤이라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모작했으며 그의 후원자인 빈센조 백작에게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루브르 박물관)을 구입하라고 추천하기도 했다. [5] 또,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 있는 도미니칸 교회에서 로자리오의 마돈나(Kunsthistorisches 박물관, 베니스)를 구입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로마에서 머물 무렵, 루벤스는 처음으로 그의 세 폭 제단화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St. Helena with the True Cross로, 로마의 교회 예루살렘의 산타 크로스를 위해 그려졌다.

루벤스는 1603년, 외교 임무를 맡아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그는 펠리페 3세에게 보내는 빈센조 백작의 선물을 갖고 있었다. 스페인에 머물며 그는 펠리페 2세가 모았던 수많은 라파엘로티티안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6] 루벤스는 또한 마드리드의 프라도에 머물면서 말을 타고 있는 러마의 백작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데, 이 작품은 티티안의 작품 Charles V at Muhlberg (1548년작, 마드리드의 프라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이 여행은 그가 예술과 외교술의 재능을 함께 발휘했던 첫 번째 여행이었다.

루벤스는 1604년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며 이후 4년간은 만투아와 로마의 제노바에서 지냈다. 제노바에서 루벤스는 Marchesa Brigida Spinola-Doria(내셔널 미술 전시관, 워싱턴 D.C.) 등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이 때의 작품들은 훗날 안토니 반 다이크조슈아 레이놀드, 그리고 토마스 게인즈보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Belkin (1998): 75.</ref>ref> 또한 루벤스는 도시의 성들을 삽화 형식으로 그리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606년에서 1608년, 그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는 당시 도시에 새로 지어진 가장 세련되고 유명했던 발리셀라의 산타 마리아 교회(Santa Maria in Vallicella or, Chiesa Nuova)를 위해 제단화를 그리게 된다. 작품의 주제는 당시에 그 지역에서 가장 칭송받던 성인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성모 마리아와 그의 아들을 숭배하는 모습을 그리기로 결정된다. 첫 번째 작품은 한 폭만을 사용하여 그린 제단화였으나, 세 폭에 그려진 두 번째 작품으로 교체되었다. 이 두 번째 작품은 "발리셀라의 산타 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습을 재현했으며 제거가 가능한 구리 덮개가 곁들여졌고, 중요한 축제일에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7]

이탈리아에 미친 루벤스의 영향은 굉장히 거대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Pietro Paolo Rubens"라는 서명을 한 편지와 서신을 여러 장 썼다. 편지에서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쓰고 있으나, 그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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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클라라 유제니아 황녀(1566-1633),

1615년. Kunsthistorisches Museum, 비엔나.

 

안트베르펜에서의 삶 (1609-1621)

1608년 루벤스는 그의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안트베르펜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는 루벤스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온 이 시기는 1609년 4월 9일에 체결된 "안트베르펜 조약(Treaty of Antwerp)"에 따라 도시가 다시 번창했던 때로, "12년의 휴전(Twelve Years' Truce)"가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때부터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계속 머무르려고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9월에 루벤스는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7세 대공과 그의 아내 이사벨라에 의해 왕실화가로 지명받게 된다. 그는 특별 허가 조치를 얻어 브뤼셀이 아닌 안트베르펜에서 화실을 운영할 것을 허락받았고, 다른 손님을 받는 것도 허락을 받게 되었다. 루벤스는 대공의 아내 이사벨라가 죽기 전 1633년까지 그녀와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그는 화가 직무만이 아니라 대사나 외교에 관한 임무를 맡아 하기도 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장 브란트(Jan Brant)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Isabella Brant)와 1609년 10월 3일에 결혼함으로서 도시를 떠나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을 더더욱 굳건히 했다.

1610년, 루벤스는 그가 직접 설계한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현재 Rubenshuis 박물관으로 알려진 이곳은 안트베르펜의 중심지에 지어졌으며 이탈리아의 건축양식에 영향을 받은 빌라로, 루벤스와 그의 견습생들이 작품을 그리던 작업실과 그의 개인 작품들을 모아둔 방과 도서관 등 광범위한 루벤스의 직업 및 취미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이 즈음, 루벤스는 수많은 제자들, 실습생들과 함께 새로운 화실을 지었다. 당시 그의 제자 중에서는 오늘날 가장 유명한 바로크 시대의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인 플랑드르안토니 반 다이크가 있었다. 반 다이크는 자주 루벤스와 합작을 하공 했는데, 그 외에도 도시 내의 여러 전문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는 동물화가인 프란스 스나이더가 있었는데, 스나이더는 Prometheus Bound의 독수리 형상을 그린 인물이다. 또한 루벤스는 그의 친한 친구이자 꽃을 그리는 식물화가 장 브루겔과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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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프란스 스나이더, Prometheus Bound,

1611-12년. 필라델피아 미술 박물관.

 

 

루벤스가 그렸던 세 폭 제단화인 "The Raising of the Cross(1610)"와 "The Descent from the Cross(1611-1614)"는 성모 마리아 성당을 위해 그려졌는데, 이 작품들은 루벤스가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자리를 굳히는 데 기여하였다. 예를 들어 "The Raising of the Cross"는 베니스의 Scuoladi San Rocco에 있는 틴토레토의 "Crucifixion"과 미켈란젤로의 역동적인 인체, 그리고 루벤스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교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자주 사용되곤 한다. [9]

루벤스는 그의 친구이자 Plantin Press의 소유주인 Balthasar Moretus를 비롯하여 여러 작가들의 책 표지나 삽화, 프린트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때 루벤스의 이름은 유럽 전역을 걸쳐 알려지게 된다. 몇 번의 획기적인 에칭을 제외하고 그는 드로잉은 모두 그가 직접 그렸으며 프린트 작업은 Lucas Vorsterman과 같은 다른 전문가에게 맡겼다. [10] 그는 그가 원했던 좀 더 박력 있는 스타일을 가르쳤던 Hendrik Goltzius에게서 배운 동판화가들을 여럿 고용했다. 루벤스는 또한 나무 동판화를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활시킬 수 있었던 기술이었다. 루벤스는 그의 프린트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얻었는데, 그의 작품이 프린트로 여러 장 복사되던 네덜란드에서는 저작권에 대해 좀 더 확고히 했다. 덧붙여 영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서도 그는 프린트에 자신의 저작권을 명시하도록 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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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change of Princesses, "마리 드 매디시스의 생애"

시리즈 작품 중 하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와 외교관 임무 (1621-1630)

1621년, 프랑스의 여왕이자 국모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는 루벤스에게 파리의 룩셈부르크 성에 전시될 그녀와 그녀의 남편 프랑스의 앙리 4세의 삶을 그린 그림 시리즈를 각각 두 개 주문한다. "마리 드 메디시스의 시대(루브르 박물관)"는 1625년 전시되으며, 그가 그린 두 번째 시리즈는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12] 마리 드 메디시스 여왕은 1630년 그녀의 아들이었던 루이 13세에 의해 추방당하게 되며 1642년 루벤스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쾰른의 바로 그 집에서 죽었다. [13]

1621년에 체결되었던 "12년의 휴전"이 만기된 후, 스페인합스부르크의 통치자는 루벤스에게 여러 번의 외교 임무직을 강제로 맡기곤 했다. [14] 1624년 프랑스 대사는 브뤼셀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루벤스는 황녀의 명에 따라 폴란드 왕자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와 있다." (브와디스와프 바사 4세 (Władysław IV Vasa) 왕자는 황녀의 손님으로 1624년 9월 3일에 브뤼셀에 머물고 있었다.) [15][16] 1627년에서 1630년은 외교관으로서의 루벤스가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시기다. 그리고 루벤스는 스페인과 영국 왕실을 오가며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던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평화를 위해 일했다. 그는 또한 북부 네덜란드 지방에 외교관과 화가로서 여러 번 방문했다. 왕실에서 그는 종종 조신들은 미술이나 작품의 거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선입견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신사로 통했다. 이 때에 루벤스는 두 번의 기사 칭호를 수여받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1624년 스페인의 펠리페 4세에게 수여받았고, 그 후 1630년,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수여받았다. 루벤스는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1629년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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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ll of Man (티티안 원작), 1628-29. 마드리드의 프라도.

 

루벤스는 1628년에서 1629년에 8개월간 마드리드에서 지내게 된다. 여기서는 외교관 임무 외에도 펠리페 4세의 명령 하에 서너 개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개인적인 고객에게 작업을 주문받기도 했다. 그는 또한 티티안의 작품에 대해 새로이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마드리드의 Fall of Man(1628-29)이라는 작품의 모작도 포함되어 있다. [18]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왕실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친구가 된다. 둘은 다음 해에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갔으며, 벨라스케스는 결국 혼자 여행해야 했다. [19]

안트베르펜에서 그가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이후 루벤스는 런던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그는 1630년 4월까지 그곳에서 머물면서 Allegory of Peach and War(1629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과 같은 걸작을 남겼다. [20] 이 작품은 루벤스가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을 원했는지 잘 표현하고 있으며, 루벤스는 이 그림을 찰스 1세에게 선물로 주었다.

루벤스의 세계적인 명성이 귀족들과 수집가들에 의해 계속해서 자라날 무렵, 루벤스와 그의 화실은 계속해서 안트베르펜의 고객들에게 명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안트베르펜의 성당에 있는 동정녀 마리아의 승천(Assumption of the Virgin Mary)(1625-26)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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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e Fourment의 초상화 (Het Pelsken),

1630년. Kunsthistorisches Museum, 비엔나.

 

 

노년기 (1630-1640)

루벤스는 그의 노년기를 안트베르펜에서 보냈다. 그는 여전히 세계 각지의 고객에게 작품을 그려주었다. 이 때에 그가 그린 작품으로는 화이트 홀에 위치한 이니고 존의 성의 연회장 천장에 그린 작품 등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자기 자신의 화가로서의 방향을 탐구하는 데에 더 몰두했다.

1630년, 그의 아내가 죽은 지 4년이 지난 날 53세였던 그는 16살의 소녀 헬렌 포맨트(Helene Fourment)와 결혼한다. 헬렌은 1630년대 이후의 루벤스의 작품세계에게 관능미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었고, 그는 이 영감을 살려 The Feast of Venus(Kunsthistorisches Museum, 비엔나), The Three Graces(마드리드의 프라도), 그리고 The Judgement of Paris(마드리드의 프라도)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스페인의 왕실을 위해 그린 이후의 작품에서는 비너스의 모습에서 루벤스의 어린 아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 Helene Fourment in a Fur Wrap(Het Pelsken이라고도 불린다)에서 루벤스의 아내는 고전 조각상인 "푸디카의 비너스(Venus Pudica)"나 "메디치의 비너스(Medici Venus)"를 연상시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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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teau de Steen with Hunter, 1635-8년. 내셔널 갤러리, 런던.

 

 

1635년, 루벤스는 안트베르펜 밖에 있는 the Château de Steen (Het Steen)에서 사유지를 구입하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Château de Steen with Hunter(내셔널 갤러리, 런던)나 Farmers Returning from the Fields(Pitti Gallery, 피렌체)와 같은 풍경화를 그렸다. 이렇듯 그의 후기 작품들은 화가 자신의 내면을 담아낸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 많이 있다. 루벤스는 또한 대 피테르 브뢰겔의 네덜란드 고유 방식의 작풍에서 영감을 얻어 Flemish Kermis(1630. 루브르 박물관, 파리)를 그렸다.

루벤스는 통풍으로 1640년 5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안트베르펜의 성 야곱 교회에 안치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3명은 이사벨라에게서 그리고 5명은 헬렌에게서 태어났다. 가장 어린 자녀는 그가 죽었을 때 단지 8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루벤스는 열정적인 역동성과 풍만한 육체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Hippopotamus Hunt 1616년. 

 

작품

루벤스는 다작을 하던 화가로 유명하다. 그가 위탁받아 그린 그림들의 대다수는 종교적인 주제나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 역사화, 그리고 사냥을 하는 모습 등이 있다. 루벤스는 또한 자신의 친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자화상 또한 여럿 그렸으며 노년기의 그는 풍경화를 많이 그리게 된다. 루벤스는 태피스트리나 프린트를 디자인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집 또한 그가 직접 설계하였다. 루벤스는 1635년 왕자이자 추기경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의 명에 따라 안트베르펜에 Joyous Entry를 위한 일회성 실내장식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역사화·종교화·풍경화·인물화 등 각 분야의 작품이 있는데, 모두 생기가 넘친다. 선은 힘차고 색채는 풍부하고 화려하며, 구도도 웅대하여 야성적·관능적 표현에 뛰어났다. 그러나 힘찬 역동성에 반해 세밀함에 있어서는 그리 뛰어나지 않다. 루벤스는 연습을 위해 오일을 이용한 스케치를 자주 하였으며 나무 패널을 이용해서 작품을 그린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물론 캔버스도 자주 사용하였으며 특히나 작품이 먼 곳으로 이송되어야 할 때에 자주 사용하였다. 세 폭 제단화같은 경우 루벤스는 종종 석판 위에 그림으로서 반사광을 해결하였다.

루벤스의 풍만한 여성의 육체에 대한 맹신은 훗날 'Rubensian'이나 'Rubenesque'와 같은 신종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Rubensiaans'이란 단어는 그 때의 풍만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특히나 네덜란드에서 자주 쓰이게 되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플랑드르파의 거장이며, 동시에 바로크 회화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현재 안트베르펜에 있는 그의 저택은 그대로 루벤스 미술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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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ssacre of the Innocents(무고한 어린이의 학살), 1611년. 온타리오 미술 박물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빌림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루벤스가 직접 그린 작품과 루벤스가 한 부분만 그린 작품(얼굴이나 손과 같은 부분), 그리고 루벤스가 지시하고 감독하여 그려진 작품이다. 루벤스는 당시의 관습처럼 큰 화실에 여러 명의 견습생과 학생들을 두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안토니 반 다이크도 있었으며 그는 훗날 그의 스승만큼이나 유명한 화가가 된다. 루벤스는 또한 프란스 스나이더나 제이콥 조디안과 같은 다른 전문가에게 동물화나 정물화를 그려주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작품의 가치

2002년 7월 10일 소더비 경매에서는, 새로 발견된 루벤스의 작품 Massacre of the Innocents가 케네스 톰슨에게 7천 6백 2십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이것은 소더비 경매 역사상 현재까지의 서양 고전 예술작품에 대해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근 2006년에서는 새로 발견된 또다른 루벤스의 명작 The Calydonian Boar Hunt(1611 혹은 1612)가 파리의 Getty Collection에 팔리기도 했는데, 이때 정확한 가격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고전 미술 작품의 전문가가 밝혀내기 전까지 루벤스의 학생의 작품이라 여겨져 왔었다. [21]


대표작품

  • 십자가를 세움
안트베르펜의 발푸르기스 교회를 위해 제작한 세 폭 제단화.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611년~1612년 제작. 안트베르펜 대성당 소재. 세 폭 제단화의 중앙 패널이다.
  •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24개의 시리즈로 제작된 그림. 마리 드 메디시스의 삶을 미화하여 그렸다.

 

십자가를 세우다

 

 

성녀 안나와 성가정’, 1630년, 캔버스에 유채, 115x90cm,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대담하면서 균형 잡힌 구도 속 어두 운 바탕을 배경으로 붉은 기운이 도는 풍만한 여인들의 묘사와 힘차게 날뛰는 말들의 역동성이 연상되는 드라마틱한 바로크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년)는 렘브란트와 함께 북유럽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대가이다. 그는 화가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두 성공한 인물로, 사업가적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짐

 

1610년 그는 세 폭 제단화인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렸는데, 이는 잡화상인조합에서 의뢰한 작품으로 안트베르펜의 가장 오래된 성 와르부르 교회에 설치하려는 것이었다. 역동적인 대각선 구도로 십자가에 올려지는 예수의 근육질 몸은 고대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걸작, ‘라오콘 군상’의 드라마틱한 고통의 표현을 연상시키고 그에게 깊이 남은 이탈리아 화풍의 영향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 근육질의 몸을 가진 남자들의 모습에서는 이상적인 남성 인체 표현의 극치를 보여주고 힘이 넘친다. 강렬한 빛이 비치어 유난히 창백한 백색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한 파토스적인 드라마가 연출되고 역동적인 움직임은 이 비극을 극대화시킨다.
 
1611년 안트베르펜의 병기제조업자 조합장이자 시장인 니콜라스 로콕스가 주문한 작품 역시 세 폭 제단화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먼저 양 날개를 닫은 모습을 보면, 왼편 날개에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업은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크리스토포로 성인의 모습이 있는데, 그는 한 손에 커다란 지팡이를 들고 등에는 작고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를 업어 강을 건너고 있다.
 
이는 제단화를 주문한 병기제조업자조합의 수호성인이다. 그리스 신화 속 장사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키는 근육질의 거인 성인은 붉은색 망토를 힘차게 펄럭이며 성큼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고, 반대편 날개에는 크리스토포로 성인의 스승으로 노인 모습의 은자가 등불을 환히 밝혀 성인이 가는 길을 비추어주고 있다.
 
이 제단화를 활짝 펼치면, 역시 드라마틱한 효과를 강조해 주는 어두운 배경 속에 세 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저 왼편 날개 부분(54쪽)에는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장면이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 안에서 연출되고 있다. 온화하고 침착한 표정의 마리아는 벌써 볼록 나온 배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엘리사벳 역시 침착한 모습으로 그녀를 반가이 맞고 있다.
 
오른편 날개(55쪽)는 역시 화려한 대리석 기둥과 기둥머리 장식의 바로크 성당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는 바로 성전 안의 광경으로, 붉은 옷을 입은 시메온은 생전에 아기 예수를 보게 된 벅차오르는 감격에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드리고 있다. 이에 마리아가 예수를 받으려 두 팔을 뻗는 감동적인 표현이 심금을 울린다.
 
이 세 폭 제단화의 절정인 중앙 패널(55쪽)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모습이 절제되고 극적인 표현으로 그려져 있다.
 
먹구름 가득한 어두운 배경 중앙에는 나무 십자가가, 그리고 그 위에는 흰색 수의를 입으로 물고 한 손으로 예수의 핏기 잃은 육신을 잡고 있는 남자로부터 출발하여 그 옆에는 예수가 떨어질까 조심스레 손을 뻗는 남자의 모습이 있고, 그 아래 화려한 복장에 붉은 모자를 쓴 사다리 위의 남자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으로 한 손으로는 힘없이 늘어진 예수의 팔을, 그리고 흰 수의를 잡고 있다. 그 아래에 푸른 옷을 입고 새파랗게 질려있는 여인은 바로 성모 마리아로, 이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화면 왼쪽 아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발의 여인이 흐느끼고 있다. 그 옆에 예수의 발을 잡고 있는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그녀 옆에 눈부신 붉은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은 바로 예수가 사랑한 제자 요한으로 그는 예수의 시신을 받아 안고 있다. 그 옆에 사다리를 내려오는 남자는 니코데모이다. 십자가 위로부터 흐르는 눈부신 흰 수의에 휘감겨 땅으로 내려지는 예수의 축 늘어진 육신은 이미 생명의 기운을 잃은 지 오래고, 비극적이면서도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압도하는 이 드라마틱한 그림은 웅장한 색채의 장송곡을 들려주고 있다.
 
‘성녀 안나와 성가정’은 루벤스의 드라마틱한 바로크 화풍이 무르익은 1630년 작품으로, 여기서는 인위적인 극적 연출보다 인간미가 넘치는 표현이 돋보여 깊은 감동을 준다.
 
붉은 드레스에 푸른 망토를 두른 풍만한 성모의 모습에서는 교회의 어머니다운 풍만함과 넉넉함이 느껴지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모습에서는 후에 예수가 겪게 될 고통을 예견하듯 깊은 우울이 서려있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노는 아기 예수의 모습과 한쪽 가슴을 노출하고 있는 성모의 모습에서는 위엄있는 모습이 아닌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지며 깊은 감동을 준다.
 
루벤스가 연출해 내는 현란한 색채와 역동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회화 속 음악성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웅장하고 생동감 넘치게 울려퍼지고 있다.
 
 
[성화해설]

박혜원 소피아 - 화가. 벨기에 브뤼셀 리브르 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 판화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다. 인천 가톨릭 대학교, 한양여대, 상명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2003년 평화방송 ‘함께 보는 교회미술’을 진행했으며, 최근 “매혹과 영성의 미술관”과 “그림 속 음악산책”(생각의 나무)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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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와 그의 아내 헬레나 그리고 아들 피터

 (Rubens, his wife Helena Fourment and their son Peter Paul /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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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내리심   Descent from the Cross / 1617~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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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든 여인    Woman with a Mirror /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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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이유에 상륙하는 마리 드 메디치   The Landing of Marie de Medici at Marseilles / 1623~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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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신   The Three Graces /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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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프리앙의 초상화    Portrait of Helena Fourment /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