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이런일 저런일

대한제국 황실 풍비박산의 100년

namsarang 2010. 8. 27. 23:30

[ESSAY]

대한제국 황실 풍비박산의 100년

  • 안천 서울교대 교수
 
          안천 서울교대 교수

황실은 정말 무능하고 무기력하기만 했을까
고종은 망명으로 저항하려 했고 순종은 죽을 때까지 한 품었다
그후 황실은 日人과 강제결혼 단팥죽 장사 호텔 보이 막노동꾼 전락
이를 이대로 방치해야 하나

해방 이후 덕수궁에 살던 대한제국 황손 이명길은 1962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홍릉에 있는, 고종의 계비인 엄 귀빈을 모신 영휘원 재실로 쫓겨났다. 청와대 영빈관 인근에 있는 칠궁(七宮)에 살던 황손 이수길은 신군부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다. 칠궁은 조선왕조 519년 동안 왕을 낳았으나 왕비가 되지 못한 7명의 상궁을 모신 곳으로 청와대 경호를 위한 명분으로 내몰렸다. 황실 후예로 인정받아 그나마 궁궐 한 귀퉁이에 살던 이들은 이후 궁과 영원히 이별하게 됐다. 대한제국 황실의 잊혀진 황손들의 이야기다.

29일로 나라 잃은 경술국치 100년이다. 이 100년은 풍비박산된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사이기도 하다. 2005년 일본의 한 호텔에서 객사한 채 발견된 마지막 황태손 이구의 삶은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의 고유한 황실 문화를 되찾아 역사적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뜻을 가졌던 나의 연구는 일제 침략논리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일제침략에 대항하지 못해 나라를 잃은 대한제국 황실은 과연 그렇게 무능하고 무기력했을까.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들춰보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일제가 우리 황실을 격하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고종은 상하이 은행에 거액의 돈을 예치해 일본과 싸울 군자금으로 쓰려 했고, 1910년 한일합병 직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하려 했다. 순종은 붕어하기 직전에 "병합은 역신의 무리들이 제멋대로 선포한 것으로 나를 유폐하고 협박하여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게 아니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1926년에 미국 교민들이 발간한 신한민보에 보도된 이 유언은 한일병합이 순종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실제 사례다.

순종의 동생인 의왕도 국권회복을 꿈꾸며 삿갓 모양의 방갓을 쓰고 상주(喪主)로 위장해 상해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만주 안동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온 이후 철저한 감시대상이 되어 술로 한세상을 보냈다. 이석 황손은 어릴 때에 아버지 의왕이 하늘에다 권총을 쏘면서 미친 듯이 통탄하고 절규하던 모습을 여러번 봤다고 이따금 말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대한황실에 대한 일제침략의 목표는 흡수통합이었다. 고종황제가 스스로 나라를 바쳤다고 외국에 거짓 선전을 하고는, 법으로 모든 황손들을 일본인과 강제결혼하도록 했다.

고종황제의 아들인 황태자 영왕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다. 영왕은 당초 민갑완이란 한국인 약혼녀가 있었으나 강제로 파혼하고 일본 황녀 이방자와 정략적인 강제결혼을 했다. 민갑완은 상해로 망명해 평생 처녀로 지냈고, 그의 부친 민영돈은 궁궐에서 보냈다는 약을 먹고 죽었다. 일제에 볼모로 잡혀 있던 영왕은 일제에 의해 일본군 중장까지 됐으나 평생을 감시당하며 살다가 들것에 누운 중환자로 귀국해 고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외동딸 덕혜옹주는 초등학생 나이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의 하급영주인 대마도주와 강제 결혼하고 정신병자로 생을 마쳤다.

이처럼 황실의 자손은 끊겨갔지만 고종황제의 다섯째인 의왕만 자손이 풍성했다. 의왕은 황실을 지키려고 '결혼독립운동'을 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많은 자식을 낳아, 공식적으로 12남 9녀이며 비공식 숫자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일제는 의왕의 자손들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일제는 의왕의 자손 중 큰아들(이건)과 둘째아들(이우) 2명만을 황실족보에 넣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황실 근친 가문에 강제로 양자로 입적시켜, 족보상에는 황족이 아닌 사생아가 되게 만들었다. 첫째인 이건은 일본여인과 강제결혼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부야역 인근에서 단팥죽 장사로 연명하다가 쓸쓸히 숨졌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아들로 인정받던 이우는 일본에 끌려가 일본군 대좌가 되었으나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지면서 희생됐다.

국내에 남아있던 의왕 아들들은 더 비참한 삶을 살았다. 여덟째인 이경길은 덕수궁에서 여러 황실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쫓겨나 호텔 보이, 막노동꾼을 전전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일본 순사가 혈통을 끊으려고 강제로 고자를 만들었다고 훗날 실토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세간에 '비둘기집' 노래로 널리 알려진 11번째 아들인 가수 이석은 사동궁, 칠궁에서 살다가 1979년 궁에서 쫓겨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0년간을 수퍼마켓 등에서 일하다가 귀국했다. 지금은 황실 발상지인 전북 전주의 '경기전'을 지키며 황실 복원운동을 하고 있다. 다섯째 딸인 이해경은 미국 컬럼비아대 도서관 사서로 평생 독신으로 살고 있다. 내가 만난 의왕 자손에서 가장 참담한 사례는 황손 이초남. 그는 고종황제를 정말 빼닮았다. 그러나 일제를 피해 숨어 살다 보니 호적에도 올리지 못했다.

황실 후예들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만든 '구황실 재산 처리법'으로 모든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순종황제의 계비인 윤황후는 6·25 때 피란을 다녀온 뒤 그가 살던 낙선재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릉의 한 집에서 귀양살이처럼 살기도 했다.이승만 정권 시절, 영왕은 일본에 있던 사저마저 우리 정부가 내놓으라고 하자, "내 나라, 내 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순 없다"며 소송 내기를 거절했다.

대한제국은 망했지만 아직도 황실의 후예들은 살아있다. 역사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문장이 전국 곳곳에 살아있는 이 땅에서 이들 후손들을 역사의 미아가 되도록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