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그림

장 프랑수아 밀레

namsarang 2010. 9. 4. 13:52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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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나다르(Felix Nadar)가 찍은 밀레의 초상 사진.
 

 

 

장프랑수아 밀레(프랑스어: Jean-François Millet, 1814년 10월 4일 - 1875년 1월 20일)는 프랑스의 화가로, 프랑스의 지방에 위치한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삭 줍기,' '만종,'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하며,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라 불리고 있다. 그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품을 남겼다.

 

생애

유년 시절

밀레는 장루이니콜라(Jean-Louis-Nicolas)와 에메앙리에트아델라이드 앙리(Aimée-Henriette-Adélaïde Henry) 밀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노르망디의 그레빌아그(Gré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태어났으며, [1] 이곳은 농업이 주된 삶이었던 지역이었기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자라났다. 마을의 두 개신교 목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밀레는 라틴어와 근대의 문학 작가들에 대해 배웠다. 일찍부터 성인전에 감명을 받아 종교적인 장면의 데생을 즐겨 그렸다.

1833년 그는 재능을 인정한 아버지에 의해 Cherbourg로 보내져 그곳에서 초상화가 폴 뒤무셸(Paul Dumouchel)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835년 밀레는 그로(Baron Gros)의 제자였던 뤼시앵테오필 랑글루아(Lucien-Théophile Langlois)에게서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게 되었다. 랑글루아와 다른 이들이 밀레에게 준 장학금으로 1837년 그는 파리로 이사하게 되며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에게서 그림을 계속 배우는 한편, 루브르 박물관에서 푸생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1839년에 그의 장학금 수여는 종결되었으며 파리 살롱에 제출했던 그의 작품은 거절당하게 된다.[1]

파리

그의 첫 작품이었던 초상화가 1840년 파리 살롱에 전시되게 되자, 밀레는 셰르부르(Cherbourg)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개업하게 되었다. 이듬해 폴린 비르지니 오노(Pauline-Virginie ono)와 결혼하였으나 생활이 어려워 다시 파리에 나와 간판·미인화 등을 그려 생활해 나갔다. 1843년 파리 살롱에서 작품 전시를 거절당하고 아내인 폴린이 폐병으로 죽자, 밀레는 셰르부르로 다시 돌아갔다.[1] 1845년 그는 카트린 르메르(Catherine Lemaire)와 함께 르아브르(Le Havre)로 이사하여 1853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9명의 자식을 갖게 되었고 이후 그녀는 밀레의 여생 동안 함께 살게 된다.[2] 르아브르에서 그는 초상화 작품이나 풍속화들을 그리면서 몇 달간을 보내다가 다시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840년 중반 즈음 밀레는 콩스탕 트루아용(Constant Troyon), 나르시스 디아즈(Narcisse Diaz), 샤를 자크(Charles Jacque)를 비롯하여 후에 밀레처럼 바르비종파 화가로 알려지는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와 친구가 된다. 또한 밀레는 그의 명암 기법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와 밀레의 전기 작가이자 정부 관직을 지내고 있었으며 훗날 밀레 일생의 후원자가 된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와 만나게 되었다.[3] 1847년 그는 처음으로 파리 살롱에서 성공적인 전시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때 전시된 작품으로는 Oedipus Taken down from the Tree가 있었다. 1848년 그려진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The Winnower)는 정부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다.

바르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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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 캔버스에 유채,

101.6 x 82.6cm, 보스턴 미술관, 미국                                                   

 

1849년 밀레는 '추수하는 사람들'(The Harvesters)를 그려 국가에 기증하였다. 파리 살롱에서는 같은 해에 '숲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양치기'(Shepherdess Sitting at the Edge of the Forest)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이 작품은 매우 작은 유화작으로 이전까지 그가 그려왔던 미화되고 목가적인 주제에서 보다 더 사실적이고 화가 개성적인 기법을 사용했다.[4] 같은 해 6월 그는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파리의 교외인 바르비종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농민 화가로서 전원 생활의 정경을 그렸다. 그는 가난에 쪼들렸으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

1850년 밀레는 그의 열렬한 후원자인 상시에에게서, 그에게 작품을 그려주는 대가로 지속적인 후원을 약속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그는 다른 구매 희망자를 위해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1] 이 해에 파리 살롱에서 밀레는 '이삭 줍는 사람들'(Haymakers)와 '만종,' '이삭 줍는 사람들' 과 함께 걸작이라 평가되는 3개의 작품들 중에 가장 초기 작품인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를 전시하게 된다. [5]

1850년에서 53년까지 밀레는 그가 가장 중요시했으며 가장 오랫동안 작업하게 된 작품 '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시간'(Harvesters Resting)을 그리게 되었다. 미켈란젤로푸생과 같은 그의 개인적인 영웅 화가들에게 필적하기 위하여 그려진 이 그림은, 밀레의 그림 인생에 있어 농부들의 일상만을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보다 사회적인 상황 자체를 상징적인 기법으로 나타내는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이 작품은 밀레가 날짜를 기록한 유일한 작품이며, 파리 살롱에서 1853년 2위에 해당하는 메달을 수여받으면서 공식적인 명예를 쌓도록 도와준 작품이었다.[6]

 

성화해설 박혜원(소피아) - 2011년 7월 10일 의정부 주보중에서

여기‘무너질 듯 경사진 언덕’을 힘찬 발걸음으로 내딛는 강인한 의지의 충실한 농부가 있다. 기념비적인 웅장미와 비장함이 느껴지는 이 그림의 배경은
그가 살던 바르비종이 아니라 고향의 둔덕으로 이는 밀레 자신이 주인공으로 투영되었다.
해가 뜨는 새벽인지 황혼인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여명이 트는 하늘 아래 투박한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의 진지한 모습에서는 종교적인 진지함이 느껴
지고, 또한 영원한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신앙인의 정신과 고된 노동의 숭고함이 배어나온다.
역광으로 그려짐으로써 어둠 속에 묻혀 희미한 빛을 받고 있는 이 남자의 고된 노동 뒤에는 수확의 기쁨과 영원한 광명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이는 19
세기 프랑스 자연주의 화가 밀레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삭 줍는 여인들(The Gleaners)

참고 : 이삭 줍기, 이삭 줍는 사람들 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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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여인들, 1857년. Musée d'Orsay, 파리.

 

밀레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걸작인 이 작품은 1857년에 그려졌으며 1854년 세로로 긴 캔버스에 그렸던 첫 번째 버전을 다시 각색하여 그린 작품이다. 또한 1855년에서 56년까지의 에칭 기법의 영향은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에 전시된 현재의 작품에 대한 예시이기도 했다.[7] 이 작품은 여인들이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추수 이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곤궁에 처한 유럽아메리카노동자 계급(working class)에 대한, 그러니까 근대 민중들의 삶을 그린 상징이자 기념이었다.

추수 이후에 남겨진 것들을 줍는 것은 사회에서도 가장 최하급의 일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8] 그러나 밀레는 이 작품에서 이 여인들을 마치 영웅과도 같은 구도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그려졌던 첫 번째 버전에서는 옆에 시중드는 종까지 그려넣어져 가난하고 멸시받는 민중들을 마치 귀족이나 과 같은 존귀한 인물들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 작품에서는 그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이 열심히 일하는 그녀들의 어깨를 밝게 비추고 있다. 그들의 뒤로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밭은 드넓고 장대한 하늘아래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세 명의 여인들의 모습은 이렇게 밝게 빛을 받은 밭과 달리 그림자가 많이 들어가 배경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종(The Ange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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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 1857-1859년. Musée d'Orsay, 파리.

이 작품은 부유한 미국인이었던 토머스 G. 애플턴(Thomas G. Appleton)의 청탁으로 그리게 된 작품으로, 1857년 여름교회의 뾰족탑을 배경에 더하면서 완성되었다. 밀레는 처음에 이 작품에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만종"으로 바꾸었다. 1859년, 작품의 구매자가 이 작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자, 밀레는 1865년부터 이 작품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게 되며 작품에 나타난 손을 여러번 바꾸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인 공명을 의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밀레는 손의 모양을 계속 바꿈으로서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십여년 뒤 밀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미국프랑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사기 위한 경매 경쟁이 계속되었으며 몇 년 후, 프랑스 측에서 80만 프랑을 제시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이렇듯 그림의 가치는 비싼 가격으로 매겨졌지만 정작 생존해 있는 밀레의 가족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균형은 'droit de suite'를 고안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Droit de suite'란, 화가의 작품을 되팔게 될 경우 그 수익의 일부를 화가나 화가의 가족에게 필수적으로 지급하는 정책이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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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굽는 여인, 1854년. Kröller-Müller 박물관, 오텔로.

노년기

파리 살롱에 전시했던 그의 작품들에 대한 각양 각색의 비평들에도 불구하고 밀레의 명성과 성공은 1860년대까지 계속해서 자라났다. 이 시기에 그는 달마다 봉급을 받는 것으로 3년간 25여 점의 작품을 작업할 것을 계약하게 된다. 1865년 또다른 고객, 에밀 가베(Emile Gavet)는 훗날 9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하게 되는 그의 수집품 목록에 추가하기 위해 밀레에게 파스텔 작품을 의뢰했다.[10] 1867년에는 World's Fair에서 밀레의 작품들 중 '이삭줍는 여인들,' '만종,' 그리고 '감자를 심는 사람들' 등을 전시회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프레데리크 아르만(Frédéric Hartmann)은 2만 5천 프랑에 '사계'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게 되며 밀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아 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10]

1870년 밀레는 파리 살롱의 심사위원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그는 그와 가족과 함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Cherbourg와 Gréville로 이사를 가게 되며 1871년 때까지 바르비종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노년기는 상업적인 큰 성공과 공식적인 명성의 정점으로 평가되었으나, 밀레는 건강이 악화되어 정부에서 의뢰했던 작업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었다. 1875년 1월 3일, 그는 카트린(Catherine)과 결혼하였으며 1875년 1월 20일에 빈곤하였을 때 얻은 결핵이 원인이 되어 61세로 숨을 거두었다. [10]

훗날의 영향

밀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시절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밀레와 그의 작품은 반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노르망디를 그린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은 밀레의 풍경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또한 밀레의 작품들의 구도나 상징적인 요소 등은 쇠라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밀레는 마크 트웨인의 연극 Is He Dead? (1898년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극에서 그는 명예와 부를 위해 그의 죽음을 가장하는 젊은 화가로 등장한다. 극에서 묘사되는 밀레는 대다수가 허구이다.

밀레의 작품 L'homme a la houe는 에드윈 마컴에게 영감을 주어 유명한 시 "The Man With the Hoe" (1898년)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만종"은 19세기와 20세기에 자주 화가들에게 각색되어 그려지기도 했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 작품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작품을 분석하여 "밀레의 만종에 숨겨진 비극적인 신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달리는 이 작품을 정신적인 평화를 표현한 작품으로 보지 않고 이 작품이 어떠한 메세지와 억압되 성적 호전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었다. 달리는 또한 작품 속의 두 명의 인물들이 삼종 기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땅에 묻힌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달리의 끈덕진 주장 덕분에 이 작품은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엑스 레이 분석을 거쳐야 했다. 엑스 레이 분석으로 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이 작품은 최종 덧칠 전에 관과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11] 그러나 이 형태는 굉장히 불확실하여 정말로 관의 모양인지, 그리고 밀레가 마음을 바꾸어 만종을 그리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밀레의 작품 세계

 

토우조형아트 중에서

밀레 Jean-Francois Millet (1814~1875) 

자연주의- 자연을 주제로 숭고함과 웅대함으로 승화

쿠르베나 마네와 달리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사실주의 작가로 활동한 밀레는 다른 주제의식을 소유한 작가였다. 크락은(Clark) Absolute Bourgeois에서 밀레의 주제가 자신의 '노동'으로 주어진 형태에다 의식으로서의 무게가 매일의 일상을 보편적인 숭고함과 웅대함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해석했다. 밀레를 자신의 논의의 틀에 맞게 적용시킨 크락의 주장은 나름대로 그의 작품을 적절하게 이해했고 그의 주제와 당시 계층의 문제를 연결하려는 의도가 돋보인다. 밀레는 자신이 유행하는 양식을 따라 팔릴 그림을 제작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피하고 굳이 이러한 주제를 계속 추구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계몽주의적, 금욕주의적 작가이다. 밀레와 바르비종(Barbizon) 파는 사실주의 작가들이면서도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했기에, 농촌 생활의 구체적 노동과 환경을 다루지만, 날카로운 비판의식보다는 미화된 고요함이 있다.

밀레가 그린 농민들은 바르비종에서 땅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작품 '만종'에 대해서 밀레 자신은 문학적인 감정보다는 음악적인 감정을 더 강조했다고 합니다.
밀레의 정신은 훗날 쿠르베의 사실주의로 이어졌습니다.

1. 밀레는 한 때의 도시생활을 제외하고는 농촌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2. 밀레 자신의 주변에 있는 농촌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즐겨 그렸습니다.
3. 밀레는 자연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은 자연을 향한 깊은 철학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고일컬어 집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화가로 평가 받기도 합니다.
4. 밀레의 중심작품은 농민화가이며, 그의 그림은 한 시대의 풍속화가라고 일컬어 집니다. 그래서 그는 농민 화가라고 불립니다.
5. 밀레의 그림은 고요하고 경건하다고 평가받습니다.
6. 밀레는 유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는 스케치나 파스텔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7. 밀레의 대표적인 작품은 '만종'과 '이삭줍기'입니다.
8. 밀레의 '만종'은 종교화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칭송됩니다.
9. 밀레의 '이삭줍기'는 매우 사실적이고 견고한 구성을 지녔다고 말해집니다.
10. 밀레는 평생 가난과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양치기 소녀와 양떼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가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농가에 들어가 생애를 농민 화가로서 보냈다. 이 깊숙한 농민 생활의 체험은 그의 그림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객관적인 입장이아니라 언제나 모티브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몸으로 부터 우러나온 자연스러움이 그림 속에 배여 있다. 어린양치기의 모습과 양떼의 조화는 순진한 이미지의 동일성에서 밀레의 화인(畵因)을 자극한 것이 분명하다.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모습과 지팡이에 기댄 어린 양치기의땅과의 밀착된 관계가 돋보인다.

 

 

달빛아래의 양우리

달밤에 양떼가 들어오는 목장의 장면이다. 달은 먼 지평선에 떠오르고 그 은은한 빛은 대지로 번져가는데, 목장으로 들어오는 양떼와 양 몰잇군의 검은 실루엣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밤의 야외 정경은 다소 특별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밀레는 이같은 모티브로 다룬 두 개의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하나는 1856년의 것이고, 또 하나는1861년 작인 이 작품이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전작은 인물이나 동물이 하나하나분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태반의 작품에서와 같은 견고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반면, 후자의 이 작품은 달밤의 은은한 분위기가 화면 전체를 덮고 있어 더욱 시적(詩的)인 느낌을 주고 있다.

1861년경. 판자 유채. 39.5*57cm, 지평선 위에 더오른 달빛과 그 달빛을 바도 있는 양의 등이 시상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다.

 

거위를 지키는 소녀

역시 농가의 한 장면을 모티브로 한 작품. 앞쪽에 개울이 있고, 이 개울로 통하는 길이 화면 중심으로 나 있다. 거위떼들이 개울로 몰려들고 있으며 오른쪽 언덕빼기엔 한 소녀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화면은 밀레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3분의 2에 해당하는 위치에 지평선을 설정하고, 아래쪽에 대상물들을 배치하였다.

밀레는 거위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여러 장 그렸는데, 파스텔로 속사(速寫)한 것도 있다. 그는 이 파스텔 그림들을 그날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 팔았다. 이 작품은 1867년 살롱에 출품된 것으로 점차 무르익어가는 시골 생활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늘로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놈, 물에 떠 노는 놈, 물가에서쉬고 있는 놈, 소리를 지르면서 물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놈, 각양의 표정이 흥미롭게 포착되고 있다.

1866~67년, 캔버스 유채. 66.6*82.5cm, 연못으로 들어가는 거위들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한 생동감을 주며,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실감케 하는 작품이다.

 

그레빌의 낭떠러지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밀레는 세르부르로 피난하여 바다를 접하게 되었다. 1870년경. 종이에 파스텔. 43.5*54cm,

 

海軍士官의 초상

   역시 밀레 초기의 작품을 대표하는 초상화중의 하나,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한 밀레가 1845년 잠깐 동안 르아브르란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항구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 초상은 당시에 그렸던 주문화 가운데 하나다.
   이 때는 밀레의 명성도 점차 상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이 부호나 미술 애호가, 해군 사관, 선장들 에게서 많은주문이 쇄도해 왔다. 파르당 부인의 초상과 같이, 검은 제복을 입고 양팔을 낀 사관의 표정은 밀레의 더욱 자신 있는 수법의 원숙을 통해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인물과 배경의 부드러운 조화라든지, 검은옷 빛깔과 황금빛의 장식과의 격조있는 대비 등은 인물의 성격과 함께 화면의 짜임새를 더욱 돋우어 주고 있는 듯 보인다.

 

우유를 휘젓는 여인

 

   1847년경부터 다루어온 소재인데, 이 파스텔 화는 70 년에 제작된 것이다. 농가의 생활 단면을 아무런 꾸밈 없이 극히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붙잡고 있다. 이런 그림은 화가가 방안에 들어와 모델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스스럼 없는 시각을 느끼게 되는데,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뛰어난 점도 이런 소박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화면에 있어서 별다른 구도적 배려도 찾을 수 없다. 화면 가운데 큰 통을 앞에 두고 우유를 젓고 있는 시골 여인의 약간 거친 표정이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야성미(野性美)로 대치된다. 우유를 휘젓고 있는 막대기는 이상하게도 <어린 양치기>나 밭에서일하는 사람 들의 쟁기와 연결되는, 대지에서 솟아오른 듯한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주고 있다.

 

 

 

물통의 물을 옮기는 여인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노동하는 남자들은 한결 같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묘사되고 있으나, 농가의 여성들은 조용하고도 우아한 모습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이라도 그 동작은 크지 않고 여성 특유의 청순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보는 여인도 그 동작이 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동작이나 표정이 다소곳하면서도 수줍은 듯한 여성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두 개의 물통에 물을 붓고 있는, 약간 구부린 여인이 정직하게 화면 가운데 자리잡고, 그 배경으로 농가의 뒤뜰이 보여 주는 정적이 오히려 정답기까지 하다.

저쪽 문 쪽으로 뒤뚱거리며 가고 있는 집오리의 모습도 농가의 한가로움을 더욱 실감시켜 준다.

 

파르당 부인의 초상

1837년 고향 세르브르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나온 밀레는 들라로시의 아틀리에에서 지도를 받는 한편, 루브르를 자주 방문하면서 주로 미켈란제로와 푸생 등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 작품을 연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한 것이 40년이니까 파리에 나온 지 3년 후가 되는 셈이다.

이 시기 밀레의 작품은 주로 초상화와 신화(神話)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었으며, 검은 색을 주조로 하면서 백색의 효과를 살리는, 전통적인 수법을 주로 사용하 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향 세르브르에 돌아와주문받 은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검은 색을 기조로 하면서 뉘앙스가 풍부한 수법을사용, 인물의 내면의 섬세한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외제니 카노비유 부인의 초상

첫 번째 부인 포리느가 죽었을 때 이들 부부가 아사(餓死) 직전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초기의 초상화에는 짙은 술픔의 그림자가 화면을 덮고 있다.

이 초상화의 여인도 슬픈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검은 옷에 화려한 레이스는 어딘가 모르게 정숙한 품격을 자아내게 하는데, 앞으로 포개어진 두 손과 얼굴을 연결하는 목걸이 선이 눈길을 끈다. 어두운 배경에 인물의 얼굴만은 부각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하고있는데, 엄격한 데상에 의한 인물의 포착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단단한 기법을 말해 주고 있다.

 

건초를 묶는 사람들

밀레가 바르비존으로 오면서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작품으로, 점차 농민화의 전경을 드러내고 있다. 밝게 쏟아지는 햇볕 속에 건초를 묶고 있는 두 남자와 왼편에 건초를 긁어 모으는 여인의 모습은 일하는 즐거움과 노동의 신선함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명암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주는 긴장감과 더불어 거대한 자연과 투쟁하는 인간의 숭고한 모습이 극적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하겠다.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요소 역시 자연과 인간의 대비적이면서도 조화 있는 관계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초상화 에서는 볼 수 없는 거칠고 투박한 표현이 농민화의 특성에 더욱 걸맞는 효과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봄(spring)

밀레는 사계의 시리즈를 몇 장 그린 바 있다. 이 작품도 사계 중 봄의 풍경이다. 알사스의 실업가 프레드릭 알트망으로부터 주문받아 그린 것이다. 농가의 사계는 더욱 자연의 풍부한 변화를 보여 주는데 만년에 갈수록 자연이 갖는 하나의 서사시로서 엮고 있다.

아마도 화가로서나 인생으로서의 완숙과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닌가 본다. 수평의 구도적 맥락을 보여 주면서 신비한 기운이 한층 짙게 깔려 있다. 과수들이 선 사이로 난 길 저쪽엔 목책이 수평으로 가로 지르고, 그 뒤쪽으론 수목이 울창하다. 이제 막 비가 개이는 듯 한쪽 하는엔 무지개가 반원을 그리며 하늘에 걸려 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롱고스 작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그리스의 전원 시적(田 園時的)인 소설 '다프니스와클로에'에서 취재된 그림 으로, 코르마르의 은행가 토마의 의뢰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다. 사계(四季)를 나타낸 3점(봄, 가을, 겨울)의 타블로와 1점(여름)의 친정화 가운데 <봄>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농민화가로서의 밀레에게는 다소 특이한 신화적 주제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초기파리 시대의 신화적 소재의 그림에서는 엿볼 수 없는 인물 이나 배경이 고전적인 완벽함을 보여 주고 있다. 밀레는

이 작품에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후에 몇 장의 소품으로 남기고 있기도 하기때문이다. 섬세한 필치와 아름다운 색채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밀레의 오후의 휴식, 1866, 종이에 연필, 파스텔, 29.2*41.9cm, 보스톤 미술관

 

The Walk to Work (Le Depart pour le Travail)

1851 ; Oil on canvas, 55.5 x 46 cm (21 7/8 x 18 1/8 in)

 

   

  

어머니와 아들

1857, 캔버스 유채, 29*20Cm,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

밀레가 옮겨가 산 바르비존은 가난한 한촌이었다. 밀레도 이 마을의 가난한 농부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아마도 밀레의 농민화가 너무 나도 비참하게 보인다는 평도 어쩌면 이 가난한 마을의 정경을 솔직하게 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밀레는 두 번째 아내 카트리느와의 사이에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내 카트리느는 아내로서 뿐 아니라 어머니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밀레는 갸륵한 어머니로서의 카트리느와 그 아이들을 모델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다. 견고한 돌문 사이로 아이와 어머니의 모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드러나고 있다. 두 아이의 천진한 동작과 어머니의 보살핌이 밀레의 눈을 통해 영원화되고 있다.

 

 

 

성화해설 : 박혜원(소피아)

   끝없이 펼쳐지는 드넓은 대지 한 가운데에는 힘찬 발걸음으로 내딛으며 씨를 뿌리는 성실한 농부가 그리고 하늘에는 검은 까마귀 떼의 날아드는 모습이 생기 넘친다. 이 농부의 거친 동작 속에는 비장함과 굳은 기지가 느껴지고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고귀한 기품마저 느껴진다. 또한 전체적으로 갈색톤이 지배하는 부드러운 파스텔과 목탄 종류인 콘테(Conte)로 그려져서 그 표헌이 은은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뿌리는 사람"으로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약속과 확신에 찬 모습이다.(마르 4.1-20) 19세기 프랑스 자연주의 화가 밀레는 거의 전 생애를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Barbizon)에 살면서 하느님의 위대한 창조물인 자연 속에 보다 가까이 살면서 신의 존재를 발견하려 하였다.               

=2011년 7월 16일 의정부 주보 중에서=

 

 

성화해설: 박혜원소피아

멀리 짚더미가 있는 수평선을 배경으로 드넓은 들판이 있고 중경의 나지막하게 쌓아올린 돌담 위에는 두터운 외투 차림에 지팡이를 든 양치기가 있다. 그는 그의 주위에 흩어져 자유로이 풀을 뜯는 양들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평화롭고 잔잔한 사랑의 시선으로 양떼를 지키는 그에게서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자신을 낮추어 오신 목자 예수를 연상시킨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화면의 여유로운 양들에게서는 하느님이 허락해주신 평화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만끽하는 천상의 안식을 엿보게 해준다. 특히 은은한 파스텔로 표현되어 천상의 평화가 우리 영혼을 물들인다.  = 의정부주보 2011년 7월 24일 중에서 =